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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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8.12.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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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朝鮮王陵)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2009년 6월 동구릉·광릉·태릉 등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한국의 조선왕릉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42릉이나 되는 것은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사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총 42기의 조선시대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厚陵,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는데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포함되지 않았음).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근본적인 요인은 왕릉이 단순한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라 조선시대(1392〜1910) 519년의 역사를 포함해 당대의 건축 양식과 미의식,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 왕릉 40기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① 유교사상과 토착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葬墓) 문화 공간이다.

② 자연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石物) 등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③ 제례 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④ 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 (儀軌)』, 『능지(陵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⑤ 조선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조선 왕릉을 실사한 유네스코 심사위원은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재위한 모든 왕의 무덤이 남아있는 경우는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경탄했다. 일본의 경우 3세기 이래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침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후 왕릉은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지고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왕릉 대신 석탑이 조성됐다. 베트남 경우엔 중국 왕릉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조선 왕릉에 비하면 독자성이 떨어지며 중국 명·청 시대의 황릉(皇陵)은 자연미를 엿볼 수 없는데다 더 이상 제례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 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시의 팽창에 따른 개발 압력을 견디고 녹지가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 세계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는데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무려 19,353,067제곱미터에 이른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느 정도로 파격적인 것인지는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 회의장에서도 나타났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조선왕릉에 최고 등급인 ‘등재 권고’ 평가를 내린 이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5분의 설명 이후 호주 등 4개국 위원의 지지 발언이 이어지자 마리아 세군도 위원장은 “모두 조선왕릉의 가치를 인정하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의를 끝내겠다”고 말했고 단 15분 만에 등재가 결정되었다. 논란이 되는 유산의 경우 3시간 이상 심의가 이어질 때도 있음을 볼 때 조선왕릉의 등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네스코 전문위원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 내역과 그 무덤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① 동구릉(사적 193호) :

1) 건원릉 : 제1대 태조.

2) 현릉 : 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3) 목릉 :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4) 휘릉 :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

5) 숭릉 : 제18대 현종 및 명성왕후 김씨.

6) 혜릉 : 제20대 경종비단의왕후 심씨.

7) 원릉 : 제21대 영조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8) 수릉 :추존문조 및 왕후 신정왕후 조씨.

9) 경릉 : 제24대 헌종 및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② 서오릉(사적198호) :

1) 경릉 : 제9대 성종 부친 덕종 및 소혜왕후 한씨.

2) 창릉 : 제8대 예종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

3) 명릉 : 제19대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4) 익릉 : 제19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

5) 홍릉 : 제21대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

 

③ 서삼릉(사적 200호) :

1) 효릉 : 제12대 인종 및 비 인성왕후 박씨.

2) 예릉 : 제25대 철종 및 비 철인왕후 김씨.

3) 희릉 : 제11대 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④ 헌인릉(사적 194호)

1) 헌릉 : 제3대 태종 및 원경왕후 민씨.

2) 인릉 : 제23대 순조 및 순원왕후 김씨.

 

⑤ 영녕릉(사적 195호)

1) 영릉 : 제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2) 영릉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⑥ 선정릉(사적 199호) : 삼성동

1) 선릉 : 제9대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윤씨

2) 정릉 : 제11대 중종

 

⑦ 태강릉(사적 201호) : 태릉

1) 태릉 : 제11대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

2) 강릉 :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

 

⑧ 홍유릉(사적 207호) :

1) 홍릉 : 제26대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

2) 유릉 : 제27대 순종 및 순명황후민씨, 순정황후 윤씨.

 

⑨ 광릉(사적 197호) : 제7대 세조 및 정희왕후 윤씨.

⑩ 장릉(사적 203호, 파주) : 제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

⑪ 장릉(사적 196호, 영월) : 제6대 단종.

⑫ 의릉(사적 204호) : 제20대 경종 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⑬ 융건릉(사적 206호)

1) 융릉 :추존 장조(사도세자) 및 헌경왕후 홍씨.

2) 건릉 : 제22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

 

⑭ 정릉(사적 208호) :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정릉)

⑮ 사릉(사적 209호) :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⑯ 파주삼릉(공순영릉, 사적 205호)

1) 공릉 : 제8대 예종비장순왕후 한씨.

2) 순릉 : 제9대 성종비공혜왕후 한씨.

3) 영릉 : 제21대 영조 맏아들 추존진종 및 효순왕후 조씨.

 

⑰온릉(사적 210호) : 제11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⑱장릉(사적 202호, 김포) : 제16대 추존 원종(인조부친) 및 인헌왕후구씨

특이한 것은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는 민간 차원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점이다. 동구릉이 소재한 경기도 구리시에서 지역 사회와 일부 역사문화학계 인사들이 왕릉 관광지 개발을 위해 동구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2004년에 문화재청이 이를 발전시켜 각지에 분산된 조선왕릉 40기를 일괄 신청한 것이다.

세계유산에 지정된 조선왕릉을 답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조선 왕릉에 대한 설명만 보아도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우선 지정된 조선왕릉 자체가 40기나 되는데다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것은 물론 왕릉 하나하나의 면적이 넓어 웬만한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더구나 조선왕릉은 철저한 규범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사전에 이들에 대한 정보로 무장하지 않으면 한 두 개소의 왕릉만 보아도 지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모든 왕릉이 똑같이 보이는 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전문 용어와 한자들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왕릉에 대한 전문학자나 유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용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왕릉이 조선왕조 519년 동안 42기나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들 왕릉이 어떤 규범과 절차를 기초로 하여 축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릉에 대한 기본을 이해한다면 어렵게 느껴지는 왕릉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왕릉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다소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500년 동안 견지되어 온 것을 보면 남다른 정보가 배어 있다는 뜻인데 그런 노하우를 단숨에 이해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조선왕릉이란 커다란 산맥을 넘기 위해 기초적인 정보는 사전에 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왕릉 현장에 도착하여 이들 정보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왕릉을 보다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1. 체계적인 왕릉 조성

519년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는 능⋅원⋅묘에 관련된 조선 왕조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른다. 그중 27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능에 한하여 왕릉이라고 한다. 119기 중 능이 42기, 원이 13기 그리고 묘가 64기로 분류된다. 능원은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능⋅원⋅묘로 묻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왕릉은 기본적으로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 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그 뒤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이후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이어서 왕이 묻힐 곳인 택지(擇地)를 정하는데 대부분은 지관이나 대신들이 정하지만, 왕이 직접 정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왕릉이 풍수지리설을 기본으로 한다. 동쪽에 청룡(靑龍), 서쪽에 백호(白虎)라 부르는 산줄기가 서로 감싸고 안산(案山)이 능의 전방으로 우회하며 안수(案水)는 능 좌⋅우 측에서 발원해서 연못과 도랑물이 능 앞의 명당(明堂)을 지나 안산으로 흘러 냇물에 임하는 형세를 최고로 본다. 중국 후한 때 중장통(仲長統, 179〜219)이 지은 『낙지론(樂志論)』에 의하면 명당이란 ‘산을 등지고 냇물에 임하여 도랑과 연못이 이어있고 대나무가 둘러졌으며 앞에는 마당과 채소밭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고 적었다. 선조들은 이러한 지형을 신라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에 길상지(吉祥地)라 했다. 참고적으로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훙서(薨逝) 또는 승하(昇遐)라고 하며 군자나 대부는 졸(卒, 수명을 다해서 늙어 죽는 것) 또는 종(終), 소인은 사(死)라 한다.

국상이 벌어지면 이조판서는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하여 임시기구인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이 국장을 분담했다. 빈전도감은 겉과 안이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습(襲), 염(殮), 성빈(成殯), 빈전(殯殿)을 설치하며(세자나 왕세자빈은 빈궁(殯宮), 그 외 일반인은 빈소(殯所)라 한다), 재궁 설치,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 장례가 끝난 후에 3년간 신위(神位)를 안치하는 혼전(魂殿)에 소용되는 물건을 준비하는 일 등을 맡는다. 염을 소렴과 대렴으로 구분하여 소렴은 겹옷과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 때에는 겹옷과 겹이불 90겹을 입힌다.

국장도감은 재궁, 견여(肩輿, 가마), 반우거(返虞車, 수레), 보여(寶輿, 금으로 만든 도장을 싣는 가마), 명기(明器, 생전에 쓰던 물건을 상징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으며 왕후 릉에는 넣지 않음), 책보(冊寶, 옥책(玉冊), 금보(金寶), 금인(金印)을 말함), 복완(服玩), 청석으로 만드는 지석(誌石), 제기(祭器) 등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옥책이란 왕이나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드리는 글로 재질은 옥이다.

또한 승하한 왕이나 왕비에게 시호(諡號), 능호(陵號), 묘호(廟號, 왕후에게는 없다), 존중해서 부르는 존호(尊號)를 내려준다. 일반적으로 ‘조’는 왕조를 처음 열거나 그에 준하는 공로가 있을 경우에만 붙였으며 ‘종’은 그 뒤를 이은 왕에게 붙였다. 철종 때 순종을 순조로 바꾸어 정하면서 묘호를 높이는 풍조가 생겼고 대한제국이 되자 묘호를 대대적으로 격상했으므로 현재 알고 있는 왕의 명칭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조선조의 왕 중 묘호가 ‘조(祖)’인 경우는 추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문조(文祖)를 제외하고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다. 참고적으로 정2품 이상의 재상이 죽어도 시호를 내려주었다.

능호는 왕이나 왕후 또는 추존된 왕이나 왕후에게 내려주는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웠으므로 건원(健元)이란 두 글자를 사용하고 그 외는 모두 외자이다. 왕세자나 왕세자빈 그리고 후궁 소생으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생모에게 원호(園號)를 내려주는 경우가 있고 그 외에 대군(大君)이나 군(君)은 모두 묘(墓)라 한다. 묘호(廟號)는 왕이 승하한 뒤에 이름을 피하여 종묘에 봉안하는 호칭으로 태조, 세조, 태종, 세종 등이다.

산릉도감은 금정(金井, 광중(壙中)을 파는 일), 현궁(玄宮), 석인(石人), 석수(石獸), 비각, 정자각, 재방(齋房, 제관이 목욕재계하는 처소로 지은 재실(齋室)과 제기고(祭器庫)), 제수․제복 등 제사일체를 관장하는 전사청(典祀廳),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그리고 수릉군(守陵軍) 70명이 능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복방(守僕房,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있던 방), 부엌인 수라깐(水刺間) 등을 준비한다. 장례기간은 죽은 지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내는데 이는 중국으로 볼 때 제후국이기 때문이다(중국 황제는 7개월).

능 자리는 왕궁에서 100리 거리 안에 정한다.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는 이유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0리 이내로 조성한 것은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능의 관리를 위해 기본적으로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 :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로이 임용하도록 하였다.

조선왕릉의 초기에는 분묘를 석실과 석곽으로 만들고 상부에 봉분을 만들었다. 『국조오례의』에는 두 명을 안장하는 합장릉 형식의 석실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 석실을 조립하고, 안에 재궁을 넣은 다음, 석실을 삼물(석회와 세사 황토를 석은 것)과 숯으로 감싸서 땅에 묻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했다. 15세기 전반까지 대부분의 왕릉 내부에는 석실로 조성되었는데 이와 같은 왕릉 조성에 엄청난 인원과 예산이 필요하므로 세조는 왕릉을 간소화하라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쓰지 말라.”

석실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돌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므로 대안으로 회격(灰隔, 관을 봉분 속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회로 메워서 다지는 일)을 채택했다. 세조의 유언으로 광릉이 조선왕릉 중 최초로 회격을 이용한 방식으로 조성되었는데, 회격을 이용한 방식은 석실을 만드는 대신 재궁 위에 덮을 외재궁을 따로 만들고 그 위에 삼물을 채우고, 남쪽으로 퇴광을 만들어 그 밑으로 재궁을 넣는 방식이다. 회격으로 만들면 무덤 자체가 견고한 것은 물론 공사기간 및 인원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왕릉을 만드는 것이 워낙 큰 역사이므로 각종 부작용이 일어나자 세조가 이를 우려하여 간소화를 명령한 것인데 회격으로 만든 왕릉은 예상보다도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정왕후 태릉을 도굴하려고 100명이나 동원했음에도 워낙 견고하여 도굴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정도다.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봉분의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왕비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의 형태를 단릉이라고 하는데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건원릉(태조)과 정릉(중종)뿐이다. 쌍릉은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형태로 태종의 헌릉이 가장 돋보인다.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마련한 형태를 말하는데 경릉(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이 유일하다.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로 세조의 광릉이 효시를 이룬다. 동원상하봉은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걸쳐 각각 조성된 형태를 말한다.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형태로 조선 왕실의 기본 능제다. 그리고 순종의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으로 유일한 동봉삼실의 삼합장릉이다.

 

2. 명당에 위치한 조선왕릉

필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의 왕릉을 가능한 한 자주 방문하라고 추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건강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등산을 하는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등산복을 입고 조그마한 산등성이라도 걸으며 자랑스러워하며 특히 산림이 우거진 곳을 주파한 후에는 삼림욕으로 건강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다. 삼림욕이라면 왕릉이야말로 적소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왕릉은 천하의 명당 자리 즉 길지를 엄선하여 조성한다. 이와 같이 명당 자리를 찾는 것은 기(氣)가 충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사를 보면 수많은 천장(遷葬)을 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능침이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붕당 간의 정쟁과 풍수적 논리로 천장된 조선 왕릉은 15개소).

풍수지리에 나쁘다고 해서 천장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풍수지리에 대해 문외한이더라도 왕릉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자신이 있는 자리가 왜 그렇게 좋은 자리인지 즉 기가 높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유산을 답사하면서 덤으로 기를 한껏 받을 수 있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왕릉에 상설을 설치하는 목적은 후세인들이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아보도록 하는 데 있다. 피장자의 일대기를 적은 지문(誌文)이 있으나, 땅 속 깊은 데 묻기 때문에 겉에서는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데 비해 상설은 쉽게 그 피장자의 신분 위상을 분별할 수 있다.

상설이란 단어는 그 뜻이 넓어져서 능침(陵寢) 자체를 가리키는 용례로도 많이 쓰였다. ‘마음이 상설에 매달려 있다’, ‘멀리 상설을 바라 본다’는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 때 상설이란 능침 자체는 물론 능침에 묻혀 있는 선대의 왕을 가리키는 뜻이다.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외금천교, 재실, 연지 등 진입 공간을 지나 홍살문, 정자각과 참배도(향도 + 어도), 수복방, 수라청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이며 둘째는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곳은 죽은 자를 위한 성역인 능침 공간을 말한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다리인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와 구분해주는 구실을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다. 붉은 석간주칠을 한 신문(神門)인 홍살문(혼전문)은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는데, 그 중앙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세로 6자(1.8m) 정도의 네모난 배위(拜位, 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함)가 있다. 이 배위에서 혼백을 부를 때 4배한다.

홍살문 앞에서부터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박석)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御道)로 구분돼 있다. 좌측의 신도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도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배위청은 앞면 1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에 맞닿은 정청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배위청보다 단을 10센티미터 정도 높게 조성한다. 이 두 건물이 결합해 정(丁)자 형태를 갖추므로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은 일반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자 형태로 나무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웠는데 규모는 혼유석의 4분의 1 정도다.

정자각 앞쪽 양옆에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수라청과, 능원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수직방)이 있다. 수라청과 수복방은 참도를 향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수라청 근처에는 제례 준비를 위한 어정이 있다. 어정의 위치에 따라 수라청은 아래위로 자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정자각 좌측(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우측)에는 비갈(碑碣), 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데 개석(蓋石) 양쪽에 쌍룡을 새긴다. 석비(石碑)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데 비신 앞면은 표석(表石), 뒷면은 음기(陰記)라 한다. 비각의 위치는 능원의 왼쪽 상단부로 학생 시절 달던 명찰의 위치와 비슷하다.

 

3. 능침의 상설제도(象設制度)

능침까지 올라가는 능역은 기본적으로 잔디(왕릉에서는 사초(莎草)라고 함)로 조성한다. 정자각 뒤쪽으로 작은 동산 모양의 사초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라 부르는 긴 돌들이 단을 지어 놓여 있고 가장 높은 상계에 능의 주인이 영면한 봉분이 자리한다.

능의 높이는 10자〜15자, 광중(壙中) 깊이 10자. 너비 29자, 길이 25자5치이고 지름 20자〜30자이며 능상 모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룬다. 반구형은 살림집의 지붕을 모방한 것이고 광중은 살림방을 모방한 것이라 하여 지하궁전을 의미한 현궁(玄宮)이라 부른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의 묘소는 음택(陰宅) 또는 유택(幽宅)이라 한다. 지석(誌石)은 사대석 남쪽에서 석상(石床) 북쪽 사이에 깊이 5자를 파서 3물(三物, 모래·황토·생석회)로써 사방과 윗면에 굳게 다져 쌓은 다음 흙으로 메워 묻는다.

일반인은 분상, 봉분, 무덤, 산소라 하지만 왕릉은 능상(陵上) 또는 산릉(山陵)이라 한다. 산릉이란 고대 중국에서 제왕을 장사지낼 때 산을 인(因)하여 왕릉을 만들었으므로 산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시황 때에는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 하였고 한(漢)나라에서는 능이라 하였다.

봉분 주변 3면에 곡장이라는 낮은 돌담이 조성되어 있다. 궁궐에서의 담장(높이 21자1치)을 치는 것과 같다. 북면에 일직선으로 낮게 담을 쌓은 곳은 담장(垣墻)이라 하는데 이곳을 능침이라 한다. 곡장 안에는 석호와 석양들이 봉분을 호위하고 능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봉분을 병풍석(호석)이 둘러싸고 병풍석 외곽을 난간석이 둘러싼다. 이들 난간석과 병풍석이 초기 조선왕릉 양식의 특징이었으나 제7대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왕릉들이 전통 왕릉의 기본 양식이 된다. 한편 추존된 능은 대부분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는다.

난간석은 12각형을 이루고 석주는 사각기둥이고 죽석은 원주형을 이루고 있다. 능원 석물에 연꽃 조각이 많이 등장하는데 불교의 상징적 의미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왕실의 번영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꽃이 물을 정화하는 생태적 특성과 군자를 상징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난간석 앞에 석양(石羊) 2좌(二座)와 석양사이에 석호(石虎)를 동․서쪽에 각각 1좌와 북쪽에 2좌씩 담장을 향하여 배치한다.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호랑이는 지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용맹하므로 지상의 모든 미물을 수호해달라는 뜻이며 석양은 지하의 미물을 지켜주는 영물로 지하세계 미물의 수호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석호는 중국과 베트남의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이 갖는 수호 조각물이다.

상계단(上階段) 장대석 위 제1단 능상 정면에 장방형의 석상(石床, 혼유석(魂遊石) 또는 상석이라고도 함)을 두고 좌우에 석망주(石望柱, 또는 망주석(望柱石))를 세운다. 중계단(中階段) 장대석 위 제 2단 정면 중앙에는 장명등(長明燈, 또는 명등석(明燈石))을 세웠다.

장명등은 능침의 능침 공간의 중심시설로 일반적으로 멀리 조산 또는 안산에 축을 맞춘다. 장명등에는 대부분 모란, 연꽃 문양인데 영지, 국화 등이 새겨지기도 한다.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왕릉과 일품(一品) 이상 사대부 묘에만 사용하는데 장명등의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에는 사각의 창을 뚫고, 옥개석을 올린 뒤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을 얹었다. 태조에서 순조까지는 사각창으로 만들었으나 사도세자의 융릉(隆陵)과 정조의 건릉(健陵)은 원형(圓形)이다.

장명등(長明燈) 좌우에 관복을 입은 문인석(文人石, 또는 문관석인(文官石人)) 1쌍 또는 2쌍을 대립케 하고 문인석의 뒤나 옆에는 각각 석마(石馬) 1좌를 세우며 하계단(下階段)인 제3단 좌우 문인석 앞에는 무인석 1쌍 또는 2쌍과 석마를 각각 1좌씩 세운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 왕조 특성상 문인석을 무인석보다 한 단 더 높은 중계에 설치했다.

문인석은 관대를 착용하고 홀(笏, 길이1尺, 폭2寸)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홀은 관원들이 조복·제복·공복을 입고 두 손에 쥐는 작은판으로서 옥이나 상아(象牙), 괴목으로 만들어 왕의 교명(敎命)이나 전할 말을 써서 잊지 않게 하려는 기구였으나 후세에는 단순한 의례용 장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무인석은 대체로 사람 키보다 훨씬 크므로 무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는데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는데 3미터 이상이다. 비교적 조선 후대인 철종의 릉의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민 것으로 추정한다. 석인을 설치하는 습속은 전한(前漢, 기원전206〜기원24)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초기부터는 더욱 활발하게 세워졌다.

석상의 좌우에 각각 1좌씩 설치하는 망주석은 상단에 둥근머리를 만들고 운두(雲頭)를 새기고 아래에는 염의(簾衣)를 새긴다. 그 아래에 8각형으로 만들고 상층과 하층을 만들며 그 중간에 허리를 만든다. 망주석의 생김새는 남성의 심볼을 모방하여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추정하며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우는데 대체로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용도로 생각한다.

왕릉의 좌향(坐向)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여 볼 때 북향으로 쓴 능은 전혀 없으며 동향 10기, 서향 10기, 남향 33기 등 모두 53기이다. 중국의 황릉의 경우 능원의 문에서 정전까지 이르는 신도의 양측에 석수를 마주보게 일렬로 세우는데 조선에서는 능침 공간에 수호 형식으로 외향시켜 놓았다. 이는 중국의 묘제 중 제후의 제도를 따르면서도 조선의 독특한 능제 모습이다. 물론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칭했으므로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이들 석수들이 능침이 아니라 신도 양측에 배치되었다. 왕릉의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와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리느냐도 큰 관심사다.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를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내부를 추정해보면 현궁은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가운데에 있으며 애책(哀冊, 죽음을 애도해 쓴 글)을 서쪽, 증옥(贈玉,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던 옥돌)과 증백함(贈帛函, 비단 선물함)을 남쪽에 두고 그 옆에 명기(明器, 그릇 등 도기)와 복완(服玩, 일상 집기와 애장품)을 나열했다. 이외의 것은 문비석(門扉石, 남문의 문짝) 밖의 편방(便方)에 넣었다. 지석(誌石)은 남쪽 봉분과 석상 사이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벽화에 대한 궁금증의 정답을 말한다면 벽화를 그린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석실 내부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벽화 및 내부 축조에 대해서 홍순민 교수의 설명을 인용한다.

‘석실을 덮는 개석(蓋石)의 내면, 곧 아랫면에 먹-유연묵(油烟墨)을 써서 하늘의 형상(天形)과 해와 달, 별들과 은하수 등을 그 운행의 순서에 따라서 그린다. 해는 붉은 색, 달과 별들과 은하수 등은 흰색 분(粉)으로 그린다. 개석의 그 천상(天象) 바깥 부분과 네 면의 벽을 이루는 방석(旁石)은 모두 분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동편에는 청룡(靑龍), 서편에는 백호(白虎)를 그리되 이들은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바라보게 하고, 북쪽 벽에는 현무(玄武)를 그리되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남편은 문짝(門扉石)이 되는 두 돌이 서로 합쳐지는 곳에 주작(朱雀)을 그린다. 두 문짝돌에 나누어 그리되 합쳐지면 하나의 형상을 이루게 하고, 머리는 서쪽을 향하게 한다. 네 동물 그림의 상단이 두 석실의 사이 벽에 뚫린 창 아래부터 시작되도록 그린다. 석체(石砌)에는 같은 크기의 황장목판(黃腸木板)을 놓고 그 위에 돗자리(地衣)와 요를 깔고 그 위에 재궁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문 안에다 발을 드리운다.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가 석실을 만든 공인(作工)을 거느리고 현궁(玄宮)의 문짝돌을 닫고, 끝으로 문의석(門倚石)을 더 놓는다.’

위의 설명만 읽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왕릉을 직접 답사하면서 위 설명을 되돌려 보면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조선왕릉의 규모가 만만치 않으므로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 자료에 의하면 왕릉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전문 장인들과 잡역부들이 동원되었는데 대략 연인원 20만 명에서 30만 명 가까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장례가 나가는 발인 절차에 필요한 인원도 6,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다. 바로 이런 거대한 역사를 거쳐 왕릉이 만들어지므로 왕릉 축조가 조선 왕조에서 가장 중요시한 사안 중의 하나이지만 동원되는 인원과 경비가 많이 소요되므로 조선왕조 내내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세조가 능역을 간소하게 만들라고 명령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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