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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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8.12.2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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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

남한산성(南漢山城)

이동길, 한국문화재보호연구회장

南漢山城(남한산성)은 京畿道(경기도) 廣州市(광주시) 中部面(중부면) 山城里(산성리)에 位置(위치)하여 地理的(지리적)으로나 山勢(산세)로 보아 天惠(천혜)의 要塞(요새)터이다.

自然地形(자연지형)을 그대로 利用(이용)해서 紀元前(B.C) 6年(년) 온조대왕 (溫祚大王 13년 ) 百濟의 都邑(도읍)터 였으 며 新羅文武王(신라문무왕)(661~681) 12年 唐兵(당병)을 맊기 위해 東峰(동봉)에 城(성)을 構築(구축)하여 書長城(서장성) 日長城(일장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朝鮮時代(조선시대) 와서는 15代 (대) 光海君(광해군) 13年(년) (1621年)에 처음으로 南漢山城을 守禦使(수어사) 李曙(이서)에게 命(명)하여 東南城(동남성) 修城(수성)은 단행하게 되었다

李活(이괄)의 亂(난)을 치르고 .淸(청)의 威脅(위협)이 增加(증가)되자 朝廷公論(조정공론)이 首都(수도)의 保障之策(보장지책)으로 가까운 곳에 축성을 해야 領議政 李元翼(이원익) 李貴(이귀)등의 建議(건의)에 의거 本格化 되었다.

築成(축성)의 命을 받은 守禦使(수어사) 李曙는 東南城(동남성) 築城에 책임을 자기가 맡고 西北城(서북성)은 각성 白巖大師(백암대사) 都廳攝(도청섭)에 任命하여 그 責任을 주었는데 八道의 僧軍을 動員하여 築城共役(축성공역)에 임(任)하였으며 2年만인 仁祖4년 에 工事가 竣工(준공)되였다.

같은 해 11月에는 廣州(광주) 邑治(읍치)를 山城으로 옮긴 바 도 있다.

石城이대 城郭形態(성곽형태)는 大體로 東西로 긴 長方形을 이루며 內外城郭(외성곽)의 總(총) 延長(연장)은 11.76KM에 이른다.(본성 9.05km. 외성은 2.71km 城郭의 주변부가 높고 險(험)한대 비해 中心部(중심부)는 낮고 평편한 盆地(분지)를 이루고 있서서 外部로부터 수비와 城內居住(성내거주)가 容易하며 山城으로서는 最適(최적)의 條件(조건)을 가추고 있다.

山城은 크게 本城과 外城(외성)과 甕城(옹성)으로 構成(구성)되어 있는데 本城의 城郭(성곽) 東(동) 西(t서) 南(남) 北(북) 의 四大門(사대문)을 設置하고 16個의 暗門(암문)과 2個의 排水問(배수문) 5個 의 甕城 2개의 烽火(봉화)터로 되어 있다.

外城에는 5개의 暗門과 砲穴(포혈) 2個所

排水口(배수구) 1個所등 이 設置되여 있으며 각 甕城(옹성)에는 出入을 위한 暗問이 各各있다.

城郭은 自然石과 治石(치석)한 돌들을 합께 使用(사용)하여 쌓았는데 下層部(하부층)는 큰 돌로 쌓고 上層部(상층부)는 갈수록 작은 乭(돌)을 조금식 안으로 들여 쌓다.

현재 山城의 둘레는 약 9.05kM이며 城內에는 守禦將臺.(수어장대) 顯節祠(현절사). 演武館(연무관). 沈戈亭(침과정). 池水堂(지수당).의 建物과 行宮地(행군지). 南將臺址(남장대지). 절터. 등의 建物址(건물지)가 遺存(유존)하고 있다.

조선 16代 仁祖(1624년)때 城을 改築할 때 南漢山城 도총섭(都摠攝) 松月(송월) 白巖大師(백암대사)를 任命(임명)하여 僧軍(승군) 總指揮官(총지휘관)으로 삼고 八道(팔도)에서 僧軍을 召集(소집) 크게 축성케 하였다.

당시에는 망원사. 옥정사 두 개의 寺刹(사찰)만 있었는데 賦役(부역)으로 徵集(징집)된 僧軍이 宿食(숙식)하고 訓練(훈련)을 하기 위해 1624年에 7개의 寺刹(사찰)을 建立 성(城) 竣工(준공)이후 全國에서 370여명의 僧軍이 組織되여 淸軍(청군)과 對峙(대치)한 軍士要衝地帶(군사요충지대)였다.

當時朝鮮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겪은 直後(직후) 混亂(혼란)스로운 시기였고 滿洲(만주)땅에서는 女眞族(여진족)이 득세하여 1616년에 후금을 세운 후 명나라를 위협.세력을 확장하였다.

仁祖가 卽位하여 親明(친명) 背金(배금) 政策(정책)으로 전환하자 1627년 후금은 3萬(만)병력으로 침입 兄弟의 盟約을 强要(강요)하였고

1635년 國號를 淸(청)이라 고치면서 형제관계를 君臣關係(군신관계)로 고칠 것을 강요 협박하여 이에 불응하자 淸은 12만 大軍(대군)을 거느리고 朝鮮을 침약하게 된 것이다.

힘이 약했던 조선(朝鮮)은 드디어 청(淸)에게 降伏하고 南漢山城의 守備軍 (수비군)도 千秋(천추)의 한을 씹고 이곳에서 수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남원산성(南漢山城)은 그들에게 함락(陷落)되지는 안 않다.

몽고침입(蒙古侵入) 1次(1231년) 태무진 장수(將帥)도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점령하지 못하고

2次 侵入(1232년 )에도 침범(侵犯)하지 못하고 칠례탐은 龍仁(용인)의(처인성) 處仁城에서 戰死했다..

歷史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南漢山城은 後孫에게 敎育의 産室이며 民族信仰과 많은傳說를 간직한 有名한 文化寶庫인 것이다.

南漢山城을 오르면서 느끼는 感悔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汚辱的 歷 史라 羞恥라 감추지 말고 轉禍爲福으로 삼아 오늘의 國難을 지혜롭게 풀어가는 것도 意味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 서쪽 주봉인 (일장산)日長山 頂上에 세워진 (시설물)施設物로 朝鮮 仁祖 2년 (1624) 성 築城과 동시(同時)애 築造되였다.

(동서남북)東西南北 4개의 將臺중 唯一하게 남아있는 것이며 指揮 및 觀測을 위한 軍事的 目的으로 지어진 누각(樓閣). 築造當時 樓閣으로 西將臺(서장대)라고 부르던 것이 英祖 27년 (1751)에 2層누각을 增築하고 內部扁額(내부편액)은 無忘樓 外部扁額(외부편액)은 守禦將臺라고 命名하였다.

無忘樓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인조가 격근 시련과 인조의 아들 17代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歸國)하여 항상 淸나라에 대한 복수심(復讐心)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在位 10 年만에 죽은 원한을 후세(後世)에 전하고 그 (바통)悲痛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어진 이름이다.

이 누각(樓閣)은 한식 목조 2층 와가 으로 1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의 2층 누각(樓閣)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고 연등천정으로 하였으며 상층은 모두 겹처마이고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상층은 판문으로 막고 문에는 태극문뇌를 그렸으며 하층은 개방되어 있다.

1989년 누각의 우측에 보호각을 지어 무망루현판을 보존하고 있다.

 

2. 將臺(장대)

남한산성 서쪽 주봉(日長山) 정상에 세원 진 지휘 및 관측 등 군사목적으로 세워진 누각이다. 이 건물은 산성 축성 당시 東. 西. 南. 北 4개에 장대중 유일한 현존하는 건물이다. (지방문화재: 제 1호)

1)동문(東門)은 좌익문(左翼門) 산성에 동편에 있는 성문으로 정조2년(1778년)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보수하고 좌익 문이라 칭하였다.

2),서문(西門)은 우익 문(右翼門)산성의 서쪽에 문으로 서장대와 북문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2년( 1778년)에 개축하여 우익 문 이라 하였다.

3)남문(南門)은 지화 문 (至和門) 산성은 남쪽에 위치한 문으로 정조 2년애 개축하여 지화문 이라 칭하였다.

4).북문(北門)은 전승문(全勝門) 산성북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서장대로 가는 중간지점 능선에 있으며 정조2년에 개축하고 전승문 이라 칭하였다.

3.숭열전(崇烈殿)

남한산성 성곽(城郭)의 북서쪽 능선에 남향으로 축조된 건물로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과 산성(山城)의 축조(築造) 총책(總責)이 였든 이서(李曙)의 영혼(靈魂)을 모신 사당(祠堂)

4.청량당(淸凉堂)

수어장대 서쪽에 인접한 곳. 성(城)의 축조시 동남쪽성(城)을 맡다던 이회(李晦) 그 부인의 영혼(靈魂)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남한산성 축조 시 총 책임자는 이서(李曙)이고 동남쪽은 李晦 서북쪽은 碧巖大師가 맡아는 데 다른 사람들은 기일 내 축성을 마첬으나 李晦만이 완료하지 못하여 축성경비(築成經費)를 주색의 탕진하였다는 누명으로 처형.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오는데 남편이 처형 되였다 하여 강물에 두신자결 무고함이 발켜저 그후 사당을 지어 영혼(靈魂)을 위안하고 있다

5.현절사(顯節祠)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 순화도로건너편에나 있는도로를 따라 20M 올라간 산자락에 위치한다. 이건물은 병자호란후 심양에 끌려간 충절을 지키다가 참혹하게 피살당한 삼학사 오덜제. 윤집, 홍익한.(吳達濟.尹集 .洪翼漢)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代 肅宗 14年 建立한 祠堂이다 .숙종(肅宗) 25년에 삼학사(三學士)와 함께 항복(降伏하기를 거부한김사헌 정온.( 金尙憲. 鄭蘊) 의 位牌도 함께 모시고 있다.

6.침괴정(沈戈亭)

침괴정은 성내(城內) 로 타리에서 서북쪽 야 70m 지점이다.

백제온조왕(百濟 溫祚王)의 왕궁지(王宮址)라는 설이있으나 이를 고증할 아무런 자료도 없기 때문에 단정하기 어려우며 현재(현재)의 건물은 조선(朝鮮) 21대 영조(英祖) 27년이라 명명(命名)하였고 1751에 유수(留守)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여 침괴정(枕戈亭) 고각(古閣 )우측에 무기고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어서 침괴정을 무기고 또는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한 곳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나 온돌과 마루방 화랑 처럼된 뒷 마루등 건물구조(建物構造)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최초로 건립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명나라 사신 정용이 ‘종융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건물은 처마를 두른 팔작 집웅 양식으로 정면 7칸 측면4칸이다.

7.연무관(演武館)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로타리에서 동쪽 순환도로를 따라 약 200m 지점에 있는 파출소(派出所) 맞은편 구능상(丘陵上)에 위치한다. 조선 16代 仁祖 2년 南漢山城 築城시 세운 것으로 武術을 鍊磨하는곳 이였는데 이곳에서 武藝가 뛰어난 人材를 뽑아 中央으로 보냈다고 한다.

원래 鍊武堂 이라 불리던 것을 朝鮮 19代 肅宗때 演武館으로 改稱하였고 守禦使 金在好로 하여금 일대 改修케 하고 22代 正祖때 다시 守禦營으로 改稱한다고 하는데 現在建物 中央에는 演武館이라는 懸板이 걸려있다 이 建物은 木造 單層瓦家 의 팔작지붕으로 正面 5칸 側面 3칸이다

8.망월사지(望月寺址)

南漢山城 東門에서 長慶寺로 向하는 소로 따라 200m 올라가서 長慶寺와 갈라지는 길에서 左側으로 접어들어 約 400m地點에서 位置한다.

朝鮮 16代 仁祖2年 南漢山城 築城시 都摠攝을 두어 僧軍 指揮官으로 삼고 八道에서 僧軍을 召集하여 築成케 하였다.

南漢山城內에는 原來 望月寺와 玉井寺 두개의 寺刹만이 있었는데 八道에서 賦役으로 召集된 僧軍의 宿食과 訓練을 위하여 長慶寺를 비롯한 7個의 寺刹을 새로 지어 모두 9個가 되었다 이 9個의 寺刹中 當時에 模襲이 남아있는 有一한 寺刹이다. 이 寺刹은 大雄殿.과 三聖閣,鐘閣 宗務所, 療舍體 2棟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大雄殿 마당에는 石材의 舍利塔이 있다

9.국정사지(國淸寺址)

南漢山城의 西門안 50m支點에 位置하고 있는 國淸寺로 부텨 남쪽으로 약 100m地點에 位置한다. 절터는 작은 稜線 사이에 緩慢하고 넓은 垈地를 形成하고 있으며 周邊에 기와 片들이 보이고 1996年7月 24日 廣州郡守가 세운 標石이 있다. 國淸寺는 朝鮮 16代 仁祖 王이 南漢山城 築城시에 創建된 7개 寺刹中 하나이다. 당시 城內에는 望月寺 玉井寺가 있었는데 1624年 8道의 僧軍을 動員하여 南漢山城의 축성을 專擔케 하였기 때문에 7個의 寺刹을 創建하여 모두 9個의 寺刹에서 僧軍의 宿食 訓練 및 外敵侵入에 對備하고 秘密裏에 軍器와 火藥 軍糧米를 保管하였다고 한다. 國淸사는 그후 乙巳條約때 義兵의 군 武器庫로 使用하다가 秘密이 漏泄되어 日軍에 의해 放火된 것을 近來에 重建하였다. 寺刹내에는 大雄殿과 三聖閣 그리고 宗務所 寮舍體가 있다.

10.천주사지(天柱寺址)

南漢山城 南門에서 散策路를 따라 守禦將臺 못미쳐 右側 地點에 位置하여 현재 賣店등의 休息施設이 설치되어 있다. 周邊에는 기와 편들이 많이 흐터저 있고 廣州郡에서 세워놓은 標石이 안쪽 3m 地點에 주춧돌로 보이는 石材가 있으며 休憩所 벤치주변에는 맷돌 1점이 남아 있다.

이곳은 海東地圖에 의거 天柱寺로 推定되는 곳으로 南漢山城 修築時 徵集된 僧軍의 宿所와 訓練을 할 수 있는 軍幕寺刹의 役割을 하였든 곳인데 日帝가 朝鮮人의 武器 火藥 收去때 爆破하였다.

11.동림사지(東林寺祉)

南漢山城 東쪽에 位置하는 峰岩쪽 外城에 位置하는 蜂岩쪽 外城에 있는 절터로 벌봉 아래에 있다.

東林寺는 城內의 9個의 寺刹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創建된 寺刹로서 절터 내에는 當時에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과 멧돌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使用하고 있는 우물이 있다. 現在 이곳은 상치 호박밭으로 耕作하고 있다.

12.한흥사지(韓興寺址)

南漢山城 9個의 寺刹 漢興寺가 있었든 옛터로 城廓의 남쪽 南壇寺址의 東쪽에 位置한다. 現在 곳곳에 築臺가 남아있는 기와 片등이 흐터저 있다.

13. 玉田寺祉(옥전사지)

南漢山城 民族도장 北쪽에 위치하는데 北門에서 城郭과 隣接하여 나 있는 登山路를 따라 東쪽으로 가다가 약 400m지점에 이르러서 길 우측에 맥돌이 殘存하여 있고 廣州郡에서 세운 표석이 보인다. 望月寺 함께 南漢山城 築城 이전부터 存在했던 寺刹인데 日帝 의한 朝鮮人의 武器 및 火藥收去때 爆破되엇다.

14.행궁지(行宮祉)

南漢山城이 여타 山城과 다른 것은 비록 짧은 期間이지만 王宮의 役割을 하던 歷史的인 場인 行宮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行宮이란 正宮에 對備되는 用語로서 王이 宮闕을 벗어나 擧動할때머므는 別宮. 離宮 또는 臨時 宮闕를 말한다. 造成目的은 王이 陵行을 目的으로 華城行宮을 비롯하여 戰亂에 대비한 南韓行宮. 江華行宮.全州行宮.월미행군.격포행궁 등 있으며 休養空間(溫陽行軍)은 물론 초수행궁, 利川/行宮 혹은 王이 宮闕를 벗어나 擧動하면 서 中間 休息地 이용 사간평행궁하는 것 등 모두 包含한다. 이러한 行宮은 三國時代 이래 조선시대까지 持續的으로 造成되어 왔다. 行宮에 대한 紀錄은 百濟때 부터 나타난다. 三國史記 百濟본기 辰斯(百濟 16代) 8년 (391일부에서는 391년에 王이 구원행궁(拘原行宮)에서 死亡했다는 記錄도 있다. 高麗史에서도 40件의 記錄이 確因된다. 朝鮮時代의 초기 造成된 行宮은 풍양군과 온양행궁.초수행궁.이천행궁 등이 행당된다. 임진왜란이후에 인조에서 肅宗때까지 는 南韓行宮.北韓行宮. 江華行宮.晉州行宮.격포행궁.월미행군등이며 正租때에 華城行宮 .始興行宮. 果川行宮 등을 造成했다. 行宮 터는 南漢山城 내 行宮은 朝鮮16代 仁祖(1624)때 山城을 改築할 때 같이 함게 신축하여 1626년 11월 완공하였다..특히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병자호란당시 단순한 행궁이 아니라 임시궁궐ㄹ 했었다는 데 중요성(重要性)이 있다. 行宮은 크게는上闕과 73칸 下闕154칸등 總 3段 227칸으로 이루워 진 行宮으로 후대의 지방관(地方官)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건물로서 왕실로 격식을 가추 어 건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궁궐건축(宮闕建築)은 삼문삼조(三門三朝)를 갖출 것을 기본으로 하고 남향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行宮은 정궁(正宮)에 비해 격이 낮기 때운에 宮闕 배치에서 궁궐요소를 가추 되 다소 자유롭게 건축한다. 따라서 크게 왕이 머므르는 치전과 정무를 보는 편전(便殿)은 두 구역으로 구성되지만 행궁마다 목적에 맞는 특징을 가추기도 한다. 일반적인 행궁(行宮)은 궁궐을 갖춘 삼조(三朝)의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원리를 적용한 형태로서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진입부 치조(治朝에) 해당되는 정전(正殿)부분 燕朝(연조)해당하는 참전(寢殿)부분의 세영역으로 구분된다

남한산성 행궁의 기본적인 구조는 상궐(上闕) 하궐(下闕) 그리고 한남루(漢南樓)라는 와삼문의 누문을 갖춘 구조로서 이들를 둘러싸고 영결된 행각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상부로부터 내행전과 외행전 그리고 문지를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완만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三段의 층단식으로 둠으로서 안으로 들어 갈수록 단을 높이는 방식이며 좌향을 동남향을 취하면서 기본적으로 궁실건축 형태를 따랐다.

南漢行宮의 규모는 行宮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남한지(南漢志)』ㆍ『여지도서(輿地圖書)』 등 문헌마다 명칭이 다소 다르며 규모 또한 일정치 않다. 따라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지만 대체로 上闕은 70여 칸 내외로 추정한다. 그리고 下闕 154칸과 기타 좌전 26칸, 우실 4.5칸, 인화관 68칸 등을 합하여 모두 약 325칸에 이른다. 이것은 정조 대에 건설된 화성행궁(576칸)과 더불어 이 시기에 조성된 것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처럼 남한산성 행궁의 규모가 확대된 것은 행궁이 광주부의 치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조선조 최고의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복원공사가 착수되어 2002년 상궐, 2004년 좌전, 2010년 하궐 등이 옛 모습을 찾았다.

2002년에 복원된 내행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인 왕의 침전으로 중앙 3칸은 대청, 양 옆은 온돌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데 대청을 제외한 3면으로 퇴가 있다. 창경궁의 침전인 통명전, 환경전과 동일한 평면으로 궁궐 침전의 법도를 그대로 적용했다. 내행전의 기둥 상부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과 봉황 문양의 막새기와를 사용했다.

상궐 내행전의 담 밖에 있었던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이다. 이 건물이 건설되기 전 광주부 유수는 내행전을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좌승(坐勝)은 ‘앉아서 이긴다’라는 뜻으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발굴에 의해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밝혀져 2002년 복원되었다.

2004년에 복원된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이라고도 부르는데 정면 7칸 측면 4칸의 상궐 내행전과 같은 규모이지만 바닥 면적이 다소 작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괘를 이곳에서 시행했다.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관련 유구들이 발견되어 행궁 내의 전시관에서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좌승당 후원에 있는 이위정(以威停)은 2010년에 중건되었는데 광주유수부의 활쏘기 위해 만든 정자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도 천하를 제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이 용도로 건립한 것이 숙종 37년(1711)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이다. 이 건물은 행궁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도성 배치원리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여 건설했다. 즉 행궁을 도성의 정궁으로 보고 종묘봉안처(宗廟奉安處)인 좌전(左殿)을 행궁의 왼쪽, 사직봉안처(社稷奉安處)인 우실(右室)은 행궁의 오른쪽에 두었는데 2010년 복원되었다.

이외에 광주부 읍치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장각(日長閣), 재덕당(在德堂)ㆍ유차산루(有此山樓)ㆍ이명정(以明亭), 인화관 등이 있었다. 인화관은 객사 건물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거나 외국 사신,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행궁이 조성된 인조대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는데, 후대로 갈수록 행궁 본래의 기능보다는 광주부 치소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이 강화된다.

남한산성 행궁은 지리적 입지 때문에 병자호란 때의 인조 외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했다고 전한다. 행궁 입구 현판은 한남루(漢南樓)다. 이는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다.

15. 남장대지(南將臺祉)

南漢山城 南쪽에 第2甕城에 있는 建物인데 南將臺 옛터로 推定된다 .南漢山城 竣工된 後 守禦廳을 두었고 守禦廳에는 前.後.中.左.右의 五營이 所屬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後營將이 配置되어 陣을 치고 휘하 將卒들을 指揮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둥굴 게 잘 다듬어진 주추 돌 21개와 석축이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한 건물의 평면은 한변 이 9.3m인 장방형을 이룬다.

주춧돌의 크기가 조금 식 차이가 있으나 대채로 윗면 직경이 40~50CM 정도다. 이 지역은 성곽을 크게 돌출시켜 장대 앞에 면적을 넖히는 한편 수성의 효과를 크도록 하였는데 특히 돌출된 성곽의 끝에는 옹성을 설치하고 그 끝에는 포혈을 배치 수비하도록 하였다

16.동장대지(東將臺祉)

남한산성 제4암문이 있는 동쪽 내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내성과 외성이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곳은 『해동지도』에 의거 동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기와 편과 잡석들이 흩어 저 있다.

17.병암(屛巖)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서문의 중간 위치에 산책로 우측 숲속에 폭 1.5m 최대 높이 3.7m 의 바위인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병풍바위라고도 전해오고 있다.. 조선 22대 졍조 때 산성의 서문근처가 파괴 된 것을 주민들이 스스로 보수하여 당시 부이(府尹)이 이를 찬양하여 이 암벽에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그 글을 지은 사람은 정조때 서명응

(徐命膺)이라한다.

18.응암(鷹岩)

남한산성 수어장대 뜰 안에 위치하는데 폭 5.8m 높이 3.7m 의 바위이다. 바위에 정상부에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53cm 폭 27cm 깊이 7cm의 네모진 흠이 패여 있고 암벽에는 『守禦西臺』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남한산성 축성시 기한내 성을 쌓지 못한 이회(李회)가 모함을 받아 사형당할 때 자기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떨어진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나와 근처 바위에 앉았는데 그곳에 매 발자욱이 남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고 , 그가 처형되기 전에 『내가 죽는 순간 매가 날러올 것이니 매가 오지 않으면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내가 무죄 였슴을 알라』고 하였는데 과연 매 한마리가 날아와서 이 바위에 앉아 그가 처형되는 순간을 응시 하였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19.국청사 정(國凊寺井)

남한산성내 내 국청사 삼성각 뒤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00M떨어진 숲속에 위치한다.

우물의 하단부는 벽돌을 사용하여 3단정도 쌓고 그위에 자연석으로 5~6단을 쌓았으며 둘레는 약 1,1m이다. 우물의 뚜껑은 없이 등산객들이 나무를 걸치고 비닐장판을 덮어두었는데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승촌(僧村)에 살던 이집(李集)이라는 사람이 부친의 악성독종(惡性毒腫)을 고치기 위하여 남한산성에서 100일 기도를 하니 꿈에 산신(山神)이 현몽(現夢)하여 이곳에 이르러 석벽(石壁)사이에 쌓인 나무잎을 긁어보니 맑은 샘물이 나와 그물을 부친에게 마시게 하여 독종(毒腫 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고 새벽이면 이 우물에서 금닭이 나와 홰를치며 울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20. 효자정(孝子井)

남한산성(南漢山城) 북문(北門)아래 있는 영락 신0락원 정문 앞에 위치하여 현재에는 바로아래 새로운 우물이 생겨 식수로 이용하고 있으며 옛 우물은 철판으로 문을 닫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엤날 15~15세가 된 어느 효자가 병으로 신음하는 부친이 잉어를 먹고 싶다하여 돈을 빌리기 위하여 친척과 친우를 찾아가다가 여의치 못하여 귀가 하던중 이 우물에서 잉어가 노는 것을 발견하고 잉어를 잡어 부친에게 드려 곧 완치 되였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며 우물의 둘레는 약 60cm이다

21.영월정(迎月亭)

남한산성내(南漢山城內) 산성호텔 뒷 편에서 수어장대로 가는 산채 로를 따라 약 300m지점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1957년 당시 경기도지사 이익흥(李益興)이 건설한 것으로 저녁달이 뜰 때에 전경이 아름다워 영월정이라 명명하였다 고 하며 현판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썻다. 정,측 1칸의 2 익공 집으로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4각지붕이다.

22.영춘정(迎春亭)

남한산성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가는 산책로를 따라 가다가 천주사지(天住寺址)못가서 서쪽 숲속에 있다.

남문 에서 직선거리로는 약 600m되는 지점 이다.일명 팔각정(八角亭)이라고 하는데 원래 남문 아래쪽에 있었던 것을 근래에 이설(移設)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서울. 인천.등 경기지방 일때를 전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이며 현판은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가 썻고 1967년에 지었다고 한다. 2익공(翼工) 집으로 겹처마에 팔모지붕이다. 끝

23.옹성(甕城)

성(城)의 부속시설로서의 본성(本城)과 본성과 성문(城門)에 대한 외적(外敵)의 직격(直擊)을 막기 위해 다른 차폐물(遮蔽物)이 없을 때 성문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한편 1차적 방어를 하는 성곽 시설물 인 것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이 5개소 있는데 성의 남쪽에 남옹성 (제1.2.3.옹성)과 연주 봉 옹성.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등 이다.

*제1 남옹성(第1南甕城) : 남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둘레는 344보(334步) 109개의 여장(女墻)이 있으며 옹성 끝에는 7개의 대포혈(大砲穴)이 뚤려 있다. 이옹성은 성곽에서 직각으로 돌출하여 가운데가 잘룩한 손가락모양에 원성 방어 시설로서 원성과 연결되는 옹성 시축지전(始築地點)에서는 약간 넓게 버러 졌다 가 중심부에서는 가장 좁혀 졌으며 끝부분에 가면서는 다시 넓어서 가장끝 부분에서는 몽턱하게 넓혀졌다. 옹성의 벽은 석축(石築)이 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고 잡목만이 무성하다 .이옹성에는 중간지점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는데 이 또한 붕괴되어 흔적(痕迹)만이 남아있다.

제2남 옹성(第2南 甕城) : 남쪽에 있는 3개의 옹성에서 중앙에 위치한 옹성이며 둘레 276보(327.9m)에 87개의 女墻(여장)이 있었다.

이옹성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며 다른 옹성의 축조방식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이 砲첩?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위치에 紅禮門이 설치되어 잇는것이 암문과 비슷하고 대포혈이 동서남 3방향으로 각 3개식 9개가 있다.

제 3남 옹성 : 파손이 심하여 전체유구를 살피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옹석의 전체적인형태는 앞에 두옹성이 원성벽에 연결되어 시축하는 곳에서 포루(包루)입을 빌리듯 약간 넙ㅂ게 쌓았다가 점점 좁아지는 것과는 달리 시축부분에서 축조가 끝나는 부분에 이르는 양쪽벽에 거의 평행으로 이어지다가 대포혈을 설치한 부분에가서 약간 안쪽으로 수축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둘레는 98보(116.8m)에 31개의 여장이 있었고 대포혈은 모두 22개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5개소가 남아있으며 남쪽에 3개소 동서에 각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 옹성에 포혈 외형은 방형이 아니라 윗부분이 오무라드는 형으로 축조한 것이 특이하다.

제4옹성 :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甕城) 장경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는 127보(150.9m)40개의 여장이 있고 옹성 끝머리에 대포혈 2개가 설치되어 있다.그러나 석축한 성벽이 대부분 붕개 되어 황량한 성벽의 잔 해위에는 잡목만이 무성하다. 옹성은 암문을 통해서 안 박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옹성내에는 곳곳에 시설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옹성은 남안산성에서 가장 작은 것이다. 옹성안에 좌측벽에 무기고가 있었으며 포혈이 안벽을 2단으로 쌓고 천장은 4장의 장대석으로 이루워졌다.

제5옹성 : 연주봉 옹성(連珠峰甕城) 남한상성의 다섯 번째 옹성으로 서북 모통이의 元城과 連珠峰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31보(274m) 에

73개의 女墻이 잇었으나 붕괴가 가장 심해졌다. 이옹성도 암문을 토해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다. 다른 옹성들은 돌출한 첨단부에 포혈이 설치되어 있으나 이옹성에는 봉수난 망루의 소임을 한듯한 원형의 석축시설물의 잔해가 4~5단 남아있다.

24.암문(暗門)

암문은 城郭과 樓閣없이 만들어 놓은 門으로 성내는 성밖으로 또는 甕城으로 연결되는 통로 구실을 한다. 南漢山城에 남아 있는 暗門의 모양은 홍현무(紅蜆形)과 일반적이 장방형의 두가지 형태인대 10개의 홍현형이 있고 나머지는 장방형이다. 暗門은 元城에 11개소 外城에 5개소 설치되어 있다.

제1암문(第1暗門)

이암문은 동문 (同門)에서 장경사 신지옹성 사이에 있다. 내외 홍현문은 長大石형 扁單位와 홍현석이 10개로 이루워 졌으며 암문좌우에 쌓은 석축은 여장(女墻)까지 15~17단의 높이로 돌을 잘 다듬어서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다. 암문의 내벽은 6~6단으로 크고 작은 돌을 섞어서 쌓았다.

내벽과 천정석(天井石)의 빈 공간에는 회삼물(灰三物)과 잔 돌을 섞어 메웠다.

이암문의 전체적인 모양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녋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내벽의 양쪽 상하 단에는 돌쩌귀 구멍이 있고 내벽 2단에는 빗장거리 홈이 패여 있다. 이암문 바로 위에 장경사가 있어 장경사로 드나드는 중요한 통로이다.

제2暗門

암문은 장경사 신지 옹성 연결되는 통로로 높이 약 1.5m 폭이 약 1.3m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문이다.

암문구조는 양쪽 밑바탕에 장대석 형편단석을 하나 씩 설치하고 그위 작은 무사석을 얹었으며 다시 그 상단에 천정을 이루는 투박한 장대석을 올려놓은 장방형문을 이루고 있다.

天井石 위에 2단의 石築을 쌓은 다음 여장(女墻)을 축소했으며 암문의 좌우에는 10~9단의 석축을 여장하단까지 쌓아 올렸다.

암문(暗門)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옆석축은 큰 돌로 쌓았다. 내벽은 균형있게 3단으로 쌓았고 천정은 6개의 장대석을 걸쳤으며 내벽과 천정사이에 빈 공간에는 회삼물(灰三物) 잔 돌을 섞어서 메웠다.

제3暗門

이암문은 성의 북쪽方向으로 나가는 통로로 이 山城 암문중애서 규모가 가장 큰 虹形門이다.

홍현을 이루고 있는 것은 24개의 扁單石과 9개의 虹蜆石이며 ,내벽의 하단에서 4~6단의 석축을 한 다음 상단의 벽돌을 2단으로 쌓아 虹蜆을 만들었는데 벽돌 사이사이에는 灰三物로 발랐다

虹蜆石에 내벽에는 武沙石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저 있고 암문전체가 잘 보존 되

가 잘 보존 되어 있는 편이다. 홍현석에 상단에는 5~6단에 석축을 쌓은 다음 여장을 축조하였으며 문의 좌우에는 여장까지 19~20단의 석축을 쌓았다.

제4 暗門

이 암문은 본성에서 봉암성(峰岩城)으로 나가는 통로이며 虹峴形門이다, 暗門의 모양은 제3암문과 비슷한 바깥쪽 홍현만 남아있을 뿐 다른부분은 전부 파괴되어 원형을 찾아 볼 수 없다. 홍현문은 양쪽에 육중한 扁團石을 설치하고 9개의 홍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벽은 六段으로 크고 작은 돌을 맞추어 쌓아 올렸는대 돌과 돌 사이에 공간은 灰三物로 메웠다. 암문의 天井은 3암문과 같이 벽돌을 2단으로 축조하였는데 회삼물로 발랐다.

제5암문

이 暗門은 峰岩城의 城郭 中間쯤에 위치하고 있는 門으로 虹峴形이 아닌 長方形의 暗門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城郭 밖에서 바라본 暗門의 模樣은 左側 에 4단 右側에 5단의 武砂石을 設置하고 그 위에다 4개의 長大石으로 天井를 얹었다. 천정석은 위에는 3단 을 쌓은 다음 女墻(여장)이 축조되어 있다. 武砂石은 自然石을 거친 다음으로 하여 쌓았고 내벽과 天井石 사이는 灰三物로 메웠다.

제6暗門

이암문은 5암문의 남쪽에 인접해 있으며 파괴가 심하여 문의 높이는 겨우 1m 정도이며 문안에는 토사가 흘러들어 3/1가량이 매몰되었다. 이 암문도 제5암문과 같은 장방형 암문이며 구조도 유사하다.

제7暗門

이 暗門은 봉암성(峰岩城)에서 외성(外城)인 간봉성(忓峰城)으로 가는 통로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문은 양쪽의 2개의 장대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각각세우고 그 위에 투박한 장대석으로 청정을 얹었다.

天井 石인 長大 石사이애는 공간에는 작을 돌을 끼어 넣어 틈새를 없게 했다. 天井위에는 3段의 石築을 쌓고 그 위에 女墻을 축조(築造)하였으나 심하게 붕괴(崩壞)되였다. 內壁 4段으로 쌓아올렸으며 이(齒)가 꼭 맞도록 잘 다듬어서 연결(連結)시켰다.

제8 暗門

이 暗門은 外城인 간봉성에 만들어 진 唯一한 暗門으로 다른暗門의 石材보다 거친 다듬이를 하였다 . 暗門의 바깥쪽은 양쪽에 各各 2段의 長大石을 세우고 天井도 투박한 長大石을 얹었으며 돌과 돌 사이는 작은 天井石 上段石築은 무너젔으며 그 위에 女墻동 崩壞 되였다 .暗門의 하단부도 토사에 밀려 좁아 저 있고 내벽은 4~5단으로 쌓아 올렸으나 下部인 안으로 좁아 저 있다.

제9 暗門

이 暗門은 옥정사 (玉井寺)터 東北쪽에 位置하고 있으며 홍현형문(虹蜆形門)이다. 양쪽에 蛡單石(익단석)을 설치하고 무사석을 올려놓은 다음 3개의 홍현석을 얹었다.

이암문의 홍현석은 정교하게 다듬지 않아 홍예석에 만나는 부분에는 많은 틈이 있다. 내벽은 4~5단으로 쌓아 올렸으나 크고 작은 돌을 섞어 균형이 잡히자 않고 있다. 청정은 4개의 장대석을 얹었으니 사이에는 빈 공간이 많다. 홍현 위에 6~7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축조하였으나 현재는 붕괴된 상태이다..

제10 暗門

이 暗門은 영주봉 (蓮珠峰) 옹성(甕城)으로 연결되는 通路인데 虹峴門이다. 바같 문은 양쪽에 長大石과 같은 익단석을 성치하고 그 외에 거친 모양에 홍현석을 얹었으며 그 외 또 거친 모양의 岳形武砂를 올렸다.

岳形武砂외에 7~8단에 石築을 쌓고 여장을 축조 하였다.내벽에는 큰 돌 3단과 작근 돌 1단으로 쌓았는데 비교정 정교하게 정리 하였다.암문의 폭은 5M인데 다른 것에 비해서 매우긴 편이다

천정은 5개의 장대석을 얹어는 큰 것은 폭이 1m 가까운 것도 있으며 자연석을 거친 다듬이 하여 얹었다. 이암문은 홍현문이 있는 쪽이 성벽에서 둥굴게 퇴어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제11 暗門

이 暗門은 守禦將臺 서쪽에 약 1,5m밖에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통과하기에는 불편하다

양쪽에서는 익단석과 장대석을 구별 할 수 없는 같은 크기에 장대석 2개를 쌓은 다음 5m가되는 자연석 天井石을 얹었다. 그 위 4~5단의 석축을 쌓고 女墻을 縮小했다. 내벽은 4단으로 쌓았으며 돌과 돌 사이에는 회삼물을 발 메웠다. 암문의 길이는 4m가 넘는데 암문이 성곽에서 암문이 성 안쪽에서 많이 퇴어 나와 있다. 이암문은 통로규실보다 수로 구실을 할 정도로 물이 이곳을 통해 성 밖에 계곡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제 12 暗門

이 암문은 남한산성 제1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며 홍현형 문이다. 익단석을 매몰되고 11개 홍현석은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았으며 남문과 동문사이 에서 가장 큰 암문이다.

현존상태는 성의 안쪽에서 무너져 완전히 막혔다. 천정은 벽돌의 회삼물을 발라 홍현을 이루웠고 홍예석 위에 9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여장(女檣)을 축조했다.

제 13 암문

이 암문은 남옹성(南甕城)에 제2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며 홍형형문이다. 성벽이 무너저 내려 내부가 흙과 잡석으로 채워 저 있다. 외부홍현문은 익단석은 매몰 되여지만 비교적 정교하게 5개개의 홍현석으로 축조 하였다. 상당중앙 홍현석은 약간 아래로 처저 있다. 내벽은 4단으로 정교하게 쌓았으며 천정은 55개의 장대석으로 언젔는데 자대석 사이에 이(齒)가 맞아 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홍현석 위에 석축은 무너져 내려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제14 암문

이 암문은 남옹성(南甕城)의 제 3옹성의 서쪽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며 홍현형 문이다. 홍현문 거의 매몰되어 암문상단에 3개의 홍현석만 보일뿐 하단부(下壇部)는 확인할수 없다 .내벽은 정교하게 다듬어 6단으로 쌓았으며 천정은 3개의 장대석을 얹어 논았으나 사이사이 빈틈이 많아 작은 돌을 끼워 놓았다. 내벽에 사이사이에는 회삼물로 발랐으며 홍현 위 석축과 홍현 석축과 여장은 완전히 붕괴 되였다.

제 15 암문

이 암문은 남옹성의 동쪽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며 홍현형문이다. 홍현의 구조는 서쪽은 武砂石 2개로 되어 있는데 바닥에는 익단석을 설치하지 않고 자대석을 새로 로 세웠으며 그 우에 많은 무사석을 옆으로 눞혀 얹어 놓았다.

동쪽에는 자대석현 무사석을 하나만세우고 위에다가 거친 다듬으로 된 3개의 홍현석을 올렸다.

내벽은 5~6단으로 쌓았고 천정에는 3개의 장대석을 올렸다. 돌과 돌사이 빈틈으로는 적은 돌을 끼우거나 화삼물로 메웠다. 홍현의 상단에는 10단에 석축을 쌓아 올리고 여장을 축조했다.

제 16 暗門

남한지(南漢志)에 암문이 16개소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성곽애 설치된 것은 모두 15개소이다. 1개는 남한산성 중에 옹성꿑에 대포혈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곳에 홍현문이 있다 성곽에 설치된 암문 비슷하다.

 

參考文獻(참고문헌) :

『답사여행(踏査旅行)의 길잡이 7 - 경기남부(京畿南部)와 남한강(南漢江)』, 한국문화유산답사회(韓國文化遺産踏査會), 돌베개, 2012

남한산성(南漢山城)」, 문화(文化)콘텐츠닷컴, 한국(韓國)콘텐츠진흥원, 2004

「[남한산성(南漢山城) 세계유산(世界文化遺産) 등재권고 특집 | 남한산성(南漢山城)둘레길 遺跡 巡禮] 陷落된 敵 없는 天惠의 요새(要塞)지만… 고대(古代)〜조선(朝鮮)까지 城壁 築城術 보여줘」, 박정원, 조선매거진, 2014.06(제536호)

參考

봉수(熢燧)-新南城烽燧臺

山城里(善政碑)----43基

黔丹山頂上---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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