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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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8.12.2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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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1. 불국사(佛國寺)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한다’는 토함산 동쪽 정상 못 미친 곳에 석굴암이 있고 불국사는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이 말해 주듯 흔한 이름의 절이 아니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였다고 기록했고 한때 화엄법류사(華嚴法流類寺사)라고도 불렸다. 불국사는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보다 오래 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첫째는 눌지마립간(417~457) 시절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 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는 문무왕 10년(670)에 불국사에 무설전을 짓고 의상대사와 제자 오진 등 열 사람의 대덕으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신문왕 1년(681) 4월, 가섭과 아란 상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복장기』에 나와 있다고 신영훈은 적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김대성(『삼국사기』에는 김대정)이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혜공왕 10년(774)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지만 정확한 완성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석굴암이 먼저 준공된 이후 불국사는 더욱 활발하게 건설이 진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을 쌓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총 공사기간이 30년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를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 당시에 건설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 전까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으며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

불국사를 이해하려면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었던 신라의 독특한 불교관을 이해해야 한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처럼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후 민간신앙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지 않았다. 즉 불교가 신라에 도입되는 초기에 불교를 수용하는데 다소의 저항과 반발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불교가 당면한 문제는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없는 곳이 아니라 본래부터 불국(佛國)이었다고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불국토사상은 불교가 우리의 종교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단원은 정병조의 글을 주로 참조했다.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당대에 전해지던 몇 가지 설화로서도 알 수 있다.

첫째는 전불가람지(前佛伽藍地)에 대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일곱 개 가람 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섭불이 설법했다는 황룡사이다.

둘째는 진흥왕이 불상 조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배에는 철과 황금이 가득 있었고 서축의 아육왕이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니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진흥왕은 아육왕의 기원대로 동왕 32년(573)에 아육왕이 보낸 재료로 장륙존상을 만들었다.

셋째는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으로 의상은 입당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동해변을 참배했다. 그러나 관음을 보지 못하자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이때 홍련(紅蓮)이 바다 속에서 피어나며 의상을 건지고 그 안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했다. 의상대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관음소상을 모셨다.

이들 설화는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다. 즉 신라인들에게 신라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국명도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 표기하면서 서라벌의 어원을 이룬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이 당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것을 충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이라 볼 수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불국사는 언뜻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무설전,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좌경루,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있는 넓은 구역과 그 옆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비교적 좁은 구역이 있다. 또한 무설전 뒤로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으며 앞의 두 구역과 달리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없어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세 구역 중 넓은 구역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며 다소 작은 규모의 구역은 『무량수경』에 의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무설전 뒤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이다. 결국 불국사는 세 분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대석단(大石壇)과 마주친다. 대석단은 크게 양분되어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석단 위는 부처님의 전유 공간으로 불국토이고 석단 아래는 범부의 세계이다. 동쪽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는 석단에 마련된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으며 서쪽의 극락전 역시 석단에 마련된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비로전이나 관음전 일곽 역시 대웅전 및 극락전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이 단원은 김동현 박사의 글을 많이 참고했다.

대웅전 일곽은 석단의 계단을 통해 자하문에 이르며 이 문을 통해 대웅전 정면 내정에 들어서게 되며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서쪽에 석가탑, 동쪽에 다보탑이 대칭되게 서있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자하문 및 대웅전의 남북 중심축 상에 강당인 무설전이 동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인 회랑으로 둘러져 석가모니불의 전유 공간임을 나타낸다. 회랑 일곽의 동남 및 서남쪽 모서리에는 동회랑과 서회랑이 연장되어 남회랑보다 남쪽으로 돌출되어 특수한 공간 처리를 하였다.

극락전 일곽은 서쪽의 석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구역에는 안양문과 극락전 그리고 남, 서, 북회랑이 있는 비교적 단순한 공간 배치로 되어 있다.

비로전 및 관음전 일곽은 사찰 후방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쪽 높은 대지에 관음전이 있고 서쪽에 비로전이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의 중요 부분을 아미타정토와 석가정토, 연화장 세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석가정토>

석가가 상주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다리의 중간 부분에 아치형 터널이 있어 밑에 물이 흐르는 다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함과 동시에 강 또는 바다를 건너 하늘에 있는 불국토에 도착한다.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탑과 다보탑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① 청운교와 백운교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조형물 중 하나인 석축(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뜻한다.

석단은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는데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굳셈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와 종루가 있다.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 극락전을 행하는 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층층다리가 국보로 지정된 예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아 불국사가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공법이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 많이 사용한 그랭이 공법이다. 그랭이 공법은 간단하게 말하여 기준 돌의 형태에 맞추어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다. 백운교 좌우의 거대한 바위로 쌓은 부분에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천연바위를 그대로 둔 채 장대석과 접합시켜 수평을 이루도록 했다. 이러한 작업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의 곡선과 장대석의 직선이 맞이음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신영훈은 불국사를 창건하면서 이와 같이 어려운 작업을 채택한 것은 불국사가 상징하는 의미가 그토록 컸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② 다보탑

불국사가 갖고 있는 예술의 정수로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높이도 10.4미터로 같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다보탑은 온 우주의 근본 형상처럼 네모나고 둥글고 뾰족한 원형과 방형과 삼각형이다. 원형은 하늘, 방형은 땅이며 삼각에서 발달한 팔각이 인산의 상징이다. 학자들은 다보탑에 우주와 인간들이 바르게 걸어야 할 길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다보탑은 외형상으로 개석 위의 난순에 둘러싸인 것을 탑의 주체부로 본다면 3층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체부가 편평한 개석 위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아래에 4개의 기둥으로 개방적인 공간을 구성한 부분을 하나의 층으로 보아 4층으로도 볼 수 있다고 김광현 박사는 적었다. 물론 다보탑이 몇 층인가 하는 외형상의 형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에는 지금 사자 한 마리가 서있다. 하지만 원래는 네 마리였다.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도 다보탑을 조사한 후 사자 네 마리가 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1909년 다시 왔을 땐 두 마리만 남았다고 했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에 두 마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두 마리가, 1916년 이후 다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③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다보탑과 대조되는 것은 대웅전 앞 뜰 서쪽에 있는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불국사삼층석탑이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탑’ 이라고 줄인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석가탑은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닫고 항마촉지하였을 때 모습을 표현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므로 석가탑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는 보리수 아래 석가가 않았던 암좌(岩座)이며 여덟 개의 둥근 연화석은 팔부금강신장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둘러앉았던 자리를 의미한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이 알맞은 뛰어난 작품으로 사람에 따라 다보탑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석가탑은 엉뚱한 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탑으로도 유명하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탑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도굴꾼이 훼손한 탑을 복원하기 위해 탑신부를 해체했는데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지붕돌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와 각종 장엄구 등을 발견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문은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690년에서 705년 사이 당나라 측천무후 당시에 공문서에 사용되었던 글자 중 네 글자가 10여 차례나 등장하고 있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다라니경은 석가탑 건립 이전에 만들어서 불국사 창건 당시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진건의 소설로도 유명한 아사녀와 아사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불국사가 널리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사준은 석가탑을 건축한 아사달이 황룡사 9층탑을 지은 아비지와 동족으로 백제 사람일 것으로 추정했다.

석가탑은 매우 정교한 시각 교정을 가하도록 건축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단 기둥의 수치를 보면 안쪽 기둥에 비하여 바깥쪽 모서리 기둥의 높이가 약간씩 높다. 또한 기단과 탑신의 너비는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이것을 귀솟음과 안쏠림기법이라고 부른다.

귀솟음은 중심 기둥과 모서리 기둥의 높이를 같게 할 경우 양쪽 끝이 중심보다 낮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기법이다. 이는 가령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부가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부의 기둥을 높게 하는 것을 반대로 이용한 기법이다.

안쏠림은 기단과 탑신의 기둥을 수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수직으로 올렸을 때 착시 현상에 의해 건물의 윗부분이 넓어 보이는 것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강우방은 설명했다.

 

<아미타정토>

칠보교와 연화교를 지나 다다르게 되는 아미타정토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역은 석가정토보다 면적도 좁고 건물도 낮으며 장식도 간단하다.

8세기에 한창 융성한 아미타 신앙은 모든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을 단 한 번만 염불하면 속세의 고통에서 즉각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고통이 없는 행복의 땅인 극락세계가 바로 아미타정토이다.

아미타 신앙대로라면 불국사에서 아미타정토 구역을 제일 장엄하고 높게 조성하는 것이 이치이지만 규모나 구조면에서 아미타정토는 석가정토의 부속물로 설계되었다. 권지연은 이와 같이 설계된 이유로 아미타 신앙이 신라시대 대중 사이에 크게 유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사상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화엄사상에 의하면 아미타정토는 가장 낮은 단계로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한 것이고 연화장세계는 가장 높은 단계로서 근기가 높은 중생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연화장세계는 바로 해탈의 경지인데 이곳은 만물이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불교 세계에는 아미타여래가 있는 극락정토, 약사여래가 있는 유리광정토 등 수많은 정토가 있지만 불교의 주 관심사는 석가여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사바세계에 있다. 그러므로 많은 여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여래는 사바세계의 석가여래이므로 연화장세계로 변모한 석가정토가 아미타정토보다 단계가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의 건축은 석가정토를 아미타정토보다 월등히 부각시킴으로써 이러한 화엄사상의 면모를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즉 우리의 이상은 저 멀리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연화장세계로 변모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노력과 실천으로 깨침에 다다르면 이 사바세계가 가장 훌륭한 정토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불국사의 건축은 말해주고 있다고 최준식 박사는 적었다.

대웅전으로 가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아미타여래의 서방 극락세계로 가기 위한 칠보교‧연화교가 있다. 안양문을 지나면 석등과 극락전(아미타여래가 주존으로 봉안된 사찰 건물을 무량수전이라고 하며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함)이 나타난다. 안양이란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으로 이 문을 지나면 사방의 극락정토에 이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석가여래의 사바세계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주석하고 있는 법계가 있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므로 연화장 세계의 불국인 비로전을 건축했다. 비로전은 대웅전으로부터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1970년대의 발굴로 터전이 확인되어 그 자리에 다시 중건했다.

 

<연화장세계>

불교 신앙에서 관음 신앙을 무시할 수 없다. 아미타 신앙과 더불어 가장 민중과 가까웠던 신앙이 관음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 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洛伽橋)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 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관음전 역시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1973년 중창할 때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복원된 다포식 건물이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관음전 주변에 여러 건물이 일곽을 이루고 있었으며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전했다고 하나 그 후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불국사를 왜 불국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국토들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민중적인 신앙인 관음 신앙까지 배려해서 설계했기 때문이다.

불국사의 건축 양식을 보면 그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출현했던 탑 중심형의 사찰에서, 탑의 비중이 약화되고 금당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룡사처럼 평지에 세운 탑 중심형 사찰은 탑을 기준으로 삼아 사찰의 전체 영역을 조직화하지만 불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탑과 금당이 병립되어 있다. 이런 탑-금당 병립형 사찰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탑으로부터 금당으로 신앙의 중심성이 전이되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권지연 박사는 해석했다. 탑-금당 병립형의 출현이야말로 바깥에서 들어온 사찰 배치 형식을 신라의 형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2. 석굴암(石窟庵)

석굴암을 방문한 사람들은 석굴암이 과연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될 가치가 있느냐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외국의 문화유산에 비하여 볼 것도 많지 않고 규모도 너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석굴암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우리나라 정부가 심의위원들을 매수해서 억지로 승낙을 받은 것이라는 불신까지 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자 정부에서 한국 유산을 보다 홍보하기 위해 편법을 썼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석굴암이나 종묘가 유럽에 있었다면 세계 문화유산으로 신청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당위성>

세계문화유산은 각 유적이 있는 지역과 특수성, 독창성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 선정된다. 따라서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4천5백 년 전에 건설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인정받았고, 우리 눈에 익은 외국의 대형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고 1996년에 지정된 석굴암이나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 의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외국에 있는 대형 건축물이나 문화유산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독창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 조각들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석굴암의 차별성은 설계와 시공뿐만 아니라 건축 상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바로 재료이다. 석굴암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전세계인들로부터 그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찬사받고 있는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에 있는 조각품들의 재료는 놀랍게도 석고이다. 석고판을 정교하게 찍어내어 천장이나 벽에 붙인 것으로 시공 기간도 고작 3~4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손재주 있는 사람의 디자인에 따라 얼마든지 손쉽게 제작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이나 프랑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정교한 조각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경탄한다. 그러나 세계인들이 찬탄하는 그 조각들의 원재료는 석회석이다. 석회석은 경도에 있어 활석 석음으로 무른 돌이다. 실제로 필자가 캔터베리 대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조각가들이 조그마한 조각 연장을 갖고 석회석 큰 조각으로 커다란 인물상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조각칼로 비누를 조각하는 것처럼 쉽게 정교한 인물상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수많은 조각상들의 아름다움과 반들반들한 표면 처리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옷의 주름이 실제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조각상도 재료가 대리석이라는 데 비밀이 있다. 대리석은 석회석과 같은 성분으로 다소 경도가 높은 돌이다. 물론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조각상의 예술적인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제작의 난이도에 있어 화강석에 비해 비교적 쉽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동남아에 있는 수많은 불상과 불탑에 정교한 인물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단단한 돌처럼 보이므로 그것들을 조각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으리라고 단언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진흙과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다. 미술시간에 석고로 모형을 만들듯이 진흙으로 조각상들을 정교하게 만든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것일 뿐이다.

중국 돈황, 운강이나 용문석굴들을 보면 어마어마한 동굴과 수많은 석상들의 숫자를 보고 놀란다. 천불동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말은 불상이 천 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천 개의 불상이 있는 석굴이 천 개나 있다는 뜻이다. 스케일과 숫자만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수 없지만 이들은 사암으로 된 굴을 파서 만든 것이다. 사암은 간단하게 말해 모래가 보다 단단해 진 것으로 거대한 굴을 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들에 비하면 석굴암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화강암은 경도가 7이나 되어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장석, 석영, 운모로 조성되어 있으므로 결도 있다. 노련한 석공은 원석의 결을 보고 힘들지 않고 잘라낼 수 있는데 이것은 서세하게 조각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의 모든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하다. 화강석으로 조각할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설사 마무리 단계의 조그만 실수로 조각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어김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존불을 자세히 보면 손금과 발바닥 금(불상 중에서 발바닥 금이 있는 것을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하지 못했음)이 있는 것은 물론 연화문의 꽃무늬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섬세하게 조각된 연화문 무늬하나만 떨어져도 다시 조각해야 하는 것을 감안할 때 조각가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루기 매우 어려운 화강암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제작 과정을 거쳐서 완벽한 배율과 아름다움을 갖도록 만들었으므로 석굴암이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세계 어느 문화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면을 강조하는 듯 강우방은 석굴암의 조각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위대하다고 말하면서 아름답다는 것과 위대하다는 것은 차원이 다름을 지적했다. 그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위대한 것은 세계에 드문데 석굴암이 바로 그렇다고 칭찬했다. 사실 아름다우면서 위대하려면 드높은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 즉 이 세상에 아름답지만 위대하지 않은 것, 위대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이 많은데 석굴암은 장인이 위대한 정신을 잘 나타내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음을 뜻한다. 즉 석굴암을 만든 장신의 정신 또한 고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석굴암을 직접 보고 나서 극찬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1909년경 소네 아라스케 통감의 지시로 석굴암을 탐사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굴암은 동양 무비 최고의 걸작품이다.'

즉 동양에서는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석굴암은 5세기 중엽에 건설된 중국의 운강 석굴, 7세기 초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法隆寺)에 남긴 불화와 더불어 ‘동양 3대 문화재’의 하나로도 꼽힌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본 거대한 건축물과 정교한 조각품들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석굴암은 세계에서 유일한 종합건축물〉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석굴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호의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에 세웠다고 한다. 한편 최완수는 원성왕이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인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주목했다. 그는 원성왕이 과거 왕들과의 단절을 표방하기 위해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는 것을 피하고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 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그 우수함을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이 잘 녹아 있는 종합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석굴암의 구조는 다른 나라의 어느 석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석굴암은 화강석을 다듬어 석굴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인공 석굴로서 자연석을 뚫고 굴을 만든 고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조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의 석굴암은 명백히 건축물인 것이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기원전 100년경부터 예배와 수련을 행할 수 있는 공간적 장치로 암벽을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늘한 곳에 부처님을 모시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는데 이 풍습이 간다라미술과 융합되어 고유의 석굴미술을 구비한 채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스(Termes) 석굴, 중국 신장의 키질과 쿰투라 석굴, 투르판의 베제클릭 석굴, 돈황과 운강 석굴사원 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도와 중국에는 조직이 무른 퇴적암의 사암이나 석회암의 거대한 암벽 지형이 많다. 따라서 암벽을 뚫어 규모가 큰 석굴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또한 기후도 일 년 내내 매우 건조하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은 매우 시원하므로 안락한 사원의 공간을 조성하는데 적당하다.

여하튼 이러한 석굴 신앙이 7~8세기 초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 군위 삼존석굴과 같은 석굴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연 여건은 중국이나 인도와는 다르다. 추운 겨울과 고온 다습한 여름을 갖고 있는데다가 전 지역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경주지역에는 큰 바위산도 없었으므로 신라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즉,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어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인공으로 구축된 석암(石岩)에 예술적으로 조각된 불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오직 석굴암뿐이다. 거대한 암벽을 뚫어 석굴을 만들지 않았다하여 석굴암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인공 석굴은 고도의 축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은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면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는 걸작이다. 김형자 교수는 석굴암이 10분의 1 비율로 건축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비율은 기원전 25년 헬레니즘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주창한 ‘균제비례(Symmetry)’와 유사하다. 그는 ‘건축미는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룰 때 얻어진다’고 강조했다. 균제비례는 인체에서 얻어진 것이며 인체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다.

석굴암 본전 불상도 이런 균제비례가 적용되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 본전불은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의 비율로 되어 있어 본존불상 자체를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균제비례가 적용되었다. 신라인들이 당시 비트루비우스가 주장한 균제비례를 알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신라인들도 비트루비우스가 발견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의 비율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 : 세로 또는 세로 : 가로의 비율이 1 : 2 인 직사각형으로 이뤄져 있다.

석굴암은 네모꼴의 전실과 둥근 후실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元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실의 천정은 돔형으로 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당시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석굴암의 정수는 시작적인 효과도 고려했다는 점이다. 사각형의 예배공간에서 당대의 일반 사람들의 키로 추정되는 160센티미터 되는 사람이 서서 본존불을 바라보면 본존불의 머리 뒤에 있는 광배의 정중앙에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적인 효과까지 고려했다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학자들은 원래 돔은 중근동지대에서 발생하여 로마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는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방에까지 알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전래된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면서도 축조법은 신라 특유의 기술을 사용했다. 석굴암의 천장 구조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돔형 구조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석굴암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돔형 구조라는 기본 틀에 쐐기돌이라고 하는 특이한 무게의 균형 장치를 갖고 있다.

반지름 12당척(29.7센티미터)의 궁륭형 천장은 화강석을 둥근 띠 모양으로 묶어 5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띠 둘레는 각각 10개의 2중 곡면 부재로 묶였는데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띠의 폭이 줄어들며 정점에 연꽃 문양으로 된 125개의 돌을 올려놓았다. 기울기가 크지 않은 아랫부분의 2개 층을 제외하고는 띠를 묶을 때 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연접부에 쐐기돌들을 수평으로 박았는데 이를 ‘멍에돌(팔뚝돌)’이라고도 한다. 멍에돌은 길이 2미터 크기의 약간 운두가 높고 폭이 좁은 단면의 장대석으로 그 길이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설치하면 머리 부분만 천장 벽면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적심에 넣어 고정시키게 된다. 멍에돌 머리 부분엔 잘록하게 판 흠이 있고 홈에 천장 판석을 끼운다. 멍에돌을 삽입하여 반 모멘트를 조성시켜 조립식으로 구형 방막을 건설한 것과 각 부재들의 이음줄이 세로 면에서는 궁륭의 원심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궁륭 표면상에서는 정확하게 자오선을 따라 형성되도록 한 것은 신라의 석공들이 높은 구조역학적 지식을 갖고 석굴암을 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돌 부재가 중심축 방향으로는 주로 압축력만이 작용하게 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부재의 무게를 줄이게 하는 합리적인 구조로 불국사 청운⋅백운교 좌우의 석벽 구조에서도 멍에돌 공법이 사용되었다.

천장 덮개돌은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 2.47미터, 높이 1미터, 바깥쪽 지름 3미터나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이나 된다. 기중기로 들어 올려도 만만치 않은 무게의 커다란 덮개돌이지만 정확하게 반구형 돔을 시공했기 때문에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 매우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석굴암의 천장구조에 있어서는 아랫돌이 먼저 무너지지 않는 한 위의 돌이 따로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본존불이 이 돔 천장 밑 주실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이다. 만약 천장을 구성하는 면석들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진다 해도 쐐기돌 머리 부분의 홈이 위아래 돌들을 잡아줌으로써 본존불을 향해서 떨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주실의 바깥쪽으로 떨어지도록 했다. 쐐기돌은 만약의 경우라도 본존을 보호한다는 절묘한 고안으로 한편으로는 돔 구조의 최하부로 전달하는 힘을 감소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본존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이런 쐐기돌은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다고 이성규 박사는 설명했다.

일반인들이 혼동하는 상식 이야기. ‘천장’과 ‘천정’의 차이점이다.

천정(天井)은 고급 집이나 법당과 같은 건물에서 반자(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시설)에 우물 정(井)자형의 바둑판 반자틀을 만들어 설치한 것을 말하며 천장(天障)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 보이도록 꾸민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당연히 천장이다.

경주의 석굴암은 해발 500여 미터나 되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하고 거기에다 멀리 동해 바다를 조망하고 있으므로 건물 구조체로서는 다소 불리한 지형에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곳은 해풍(海風)과 골바람은 물론 안개와 눈비, 그로 인한 습기, 이에 더해 동절기 동파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기 마련이다. 토함산 일대의 경우 강우 일수가 134일, 강설일수가 40일에다 안개 일수는 123일, 결빙일수는 110일에 달할 정도로 습기가 많은 지역이다.

당연히 신라의 기술자들은 이런 지리적 기상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특이한 주실의 지붕 처리 방식을 채택했다. 우선 주실 돔 지붕은 모두 108개가 되는 석재를 이용했다. 108번뇌가 대표하듯 짙은 불교적 색채가 묻어나는 구조인 셈이다.

 

〈석굴암의 수난〉

석굴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이,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으나 세인에 잊혀졌다가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석굴암이 발견된 이듬해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석굴암의 조각상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를 눈치챈 현지 관리가 석굴암 반출을 거절하자 총독 데라우치가 현지를 시찰하고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은 시작된다.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그 후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되어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1913년 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13년 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당시 철근콘크리트는 새로 발명된 최첨단 건축기법 중에 하나였다. 일본은 석굴암을 해체 복원하면서 습기로부터 완전하게 차단하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안정한 공법을 찾았으며 이것이 콘크리트였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한 마천루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당시에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라는 평가가 있으므로 일본인들이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석과는 상극이었다. 현재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 대상물이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간판급 문화재인 석굴암이라는 점이다.

여하튼 보수공사 때마다 첨단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습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석굴암의 훼손 상태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예고된 일이라는 게 지배적이다.

그러한 근거로 드는 것이 우선 오늘날의 석굴암이 원래 구조와 크게 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석굴암은 원래 일반 건물과 같이 주벽은 이중 돌로 축조되어 있었으며, 그 두께는 1.2미터 또는 1.5미터 정도였다. 지붕에는 판석을 덮어 빗물을 처리하였고 출입구는 개방된 구조였다. 출입구 상부에는 광창이 있었고, 주벽인 10개의 소감실 배후에도 창구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수리과정에서 이러한 원형이 모두 변형되었다.

또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하였다. 원래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마디로 밀폐구조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졸속한 보수공사 때문에 석굴암의 결로 현상이 악화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목조 전실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1960년대의 석굴암 보수공사 때 현재 목조 전실이 세워진 곳 주변에서 건물의 초석과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다양한 기와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목조 전실이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석굴암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 돈황의 여러 석굴에도 목조 전실이 있었으며 영조 9년(1733)에 정선이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에 나오는 경주군 양북면 안동의 「골굴석굴도」에도 석실 입구에 전실이 있었다.

또한 석굴 바닥의 샘물을 통한 습도 조절 문제도 내부 바닥 밑으로 찬 샘물이 흐르게 함으로써 온도 차이로 인한 벽과 천장의 결로 현상을 막았다면 바닥의 돌을 마치 구들을 놓듯 질서정연하게 시공해야 했을 텐데 1960년대의 보수공사 때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 바닥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보다 현실적인 문제, 석굴암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대안이 제시되었으나 가장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은 석굴을 원형대로 다시 재축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인공적인 조절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므로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옛 모습 그대로 재조립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물론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원형대로 재축하는 것에도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석벽을 콘크리트로 싸서 발랐기 때문에 콘크리트를 떼어내는 공사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본래의 석재에서 콘크리트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적용해 복원할 수 없으므로 현재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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