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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慶州歷史遺蹟地區)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8.12.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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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慶州歷史遺蹟地區)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인 경주는 다소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 경주에 있는 불국사․석굴암이 1차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2000년 보다 큰 영역의 경주시 전체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유산 속의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경주 일원이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다른 유산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종묘나 창덕궁들은 단일 품목으로 등재되었지만 경주는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와 같은 예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우선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세계사 전체에서도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신라가 있을 뿐인데, 경주는 그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1천 년 내내 ‘서울’이었다. 로마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여 1,000년을 넘긴 나라이기는 하나 동⋅서로 분리되어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는 1453년에 멸망했다. 경주와 동일한 선상에서 로마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는 토함산과 남산, 선도산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분지와 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5세기가 되면서 경주는 점차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5세기 중반에 중국의 서안을 본떠 방리제(方里制)라고 불리는 도시계획법을 도입한다. 방리제란 시가지를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방’과 ‘리’로 나누어 구획한 것을 말한다. 최준식 박사는 하나의 방리는 동서가 160미터, 남북이 140미터의 크기로 경주에 약 360개의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었다.

경주는 방대한 지역에 산재한 유적의 다양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적이 만들어진 시대가 매우 길다는 점도 특징이다. 가령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나정이라는 신라 초기 유적 인근의 남산에서는 신라 전성기의 유적은 물론 신라의 말기 유적까지 포함된다. 근 천 년에 걸친 역사가 고스란히 세계유산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경주는 불교 유적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왕릉은 물론 왕성이나 산성도 있고 첨성대나 포석정 등 과학유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주 지역의 유산을 개개로 등록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등재했다. 궁궐터인 월성지구, 불교 미술이 대다수인 남산지구, 적석목곽분으로 대별되는 신라 초창기 왕들의 릉이 모여 있는 대릉원지구,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황룡사지구, 그리고 고대 신라의 방위 시설이라 볼 수 있는 명활산성이다.

경주는 천년 고도이므로 시내에 많은 유산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반월성과 안압지, 계림과 첨성대, 대릉원 등이 한 걸음 거리이므로 도보로 산책을 겸해 천 년의 역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덕목이다. 또한 시내 한가운데 노동동과 노서동에 적석고분들이 줄이어 있는데 이곳에서 봉황대와 같은 거대한 고분과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둥그런 빈자리만 남아있는 서봉총, 금령총터가 있으며 유명한 호우총도 보인다. 더구나 황남대총, 천마총 등은 밤에도 개장하여 경주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데 이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은 물론이다.

신라 천년의 모든 유산들이 ‘경주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지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네스코 지정 유산들만 감안한다면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형산강을 기준으로 우측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지정되고 좌측에 있는 많은 유산들이 배제되었다. 형산강 좌측에 있는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무열왕릉(사적 제20호),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경주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 등 경주의 간판급 중요 유적지들이 지정되지 않은 이유다. 또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기에 충분함에도 단독이거나 위치나 접근로 등이 불리하여 지정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경주 일원을 답사할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되지 않은 것들도 함께 보아야 신라 천년 유산의 진수를 보다 충실하게 맛볼 수 있다는 뜻이다.

경주를 자주 방문하거나 답사 자료를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들은 남산에 대해 남다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남산의 경이로움은 어느 정도 신비화되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남산지구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장소만 해도 37곳이나 되는데다 4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자칫 길을 잃기 쉬운 것은 물론 남산 지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루에 한 곳을 답사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산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며 지도 등 간략한 정보만 갖고 초행길을 떠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경주를 맛보기 위해서 한 달도 부족하다는 말은 경주는 ‘살아서 꼭 가봐야 할 곳’이란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유산 중에서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경주를 단숨에 모든 곳을 주파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자신의 일정에 따라 두고두고 한 두 곳씩 방문해도 좋고 이미 방문한 곳을 재차 방문하면서 경주의 진면목과 정취를 느끼는 것도 방안이다. 그러므로 경주를 찾으면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보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 것을 권유한다. 더불어 가까운 거리는 되도록 걸어 다닐 것을 권한다. 신라 천 년 고도를 ‘빨리 빨리’라는 한국 특유의 습성으로만 지나치기보다 경주 전체의 면면을 일일이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 대릉원지구(적석목곽분)

 

천년 고도 신라를 외국인과 함께 답사해보면 한마디로 놀랍다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경주 시내 곳곳에 동산만한 무덤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경주 중앙에 있어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있다며 더욱 신기하게 생각한다. 생자와 사자가 함께 있는 도시는 많이 있지만 경주와 같이 평지에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부여 능산리(陵山里)의 백제 고분군이나 경북 고령 주산(主山)의 대가야 고분군 등도 있지만, 그곳 무덤들은 지명 그대로 ‘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경주의 고분군들은 온통 평지에 널려 있다. ‘과연 세계의 신라다’라는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대릉원지구의 고분들은 경주 시내의 서남부 반월성의 북쪽부터 노서동에 이르는 동서 약 1킬로미터, 남북 약 1.5킬로미터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대릉’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의 ‘미추왕이 죽은 뒤 대릉에서 장사 지냈다’는 구절에서 연유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지구에 등록된 고분은 경주 전체의 고분에 비해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또한 대릉원지구라 해서 현재 대릉원이라 불리는 공원에 있는 고분만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는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신라오릉(사적 제172호), 재매정(사적 제246호)등이 포함된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현재 약 56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중 왕의 이름이 확인된 능은 38기뿐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것은 고분이 거대해진 시기 이후의 것들로 대체로 신라 왕의 호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무렵과 일치한다. 국왕의 호칭이 가장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에서 흉노의 왕들을 의미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들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손으로 왕위를 인계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할 경우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어 935년에 멸망할 때까지 무려 천년을 이어 온 한국 역사상 최장수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신라지역은 고분의 형태도 다양하다.

청동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토착적인 토광묘(土壙墓, 특별한 시설이 없이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 무덤으로 움무덤 또는 널무덤이라고도 함)와 석곽묘(石槨墓,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네 벽의 덧널을 쌓은 돌덧널무덤)가 발견된다. 기원전 1세기에 박혁거세에 의해서 건국된 이래 약 3백 년 동안의 적석목곽분에 선행하는 고분도 발견된다. 이들 고분에서는 신라고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경질의 고배, 장경호(長頸壺) 등 신라 토기가 발견되지 않는 대신 전대에 성행한 와질토기와 고대의 철제품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또한 5세기부터 횡혈식 석실분도 출현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적석목곽분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는데 창령, 삼척, 경산 등지에서도 약간씩 발견된다.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조성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중국(동이족의 터전 제외),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다. 또한 적석목곽분은 4~6세기 6대에 걸친 마립간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비-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데 이를 만든 신라 김(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이라는 기록을 증빙한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지하로 6~7미터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대형 목곽을 설치한 쿠르간도 있음)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된다. 신라에서는 신라 김씨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나타나는데 그들도 북방기마민족의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반구형(半球形) 봉분을 했다.

그러므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어 낙타등(쌍봉)처럼 된다. 봉토는 거의 대부분 원형인데, 적석시설이 상당히 큰 규모이고 그것을 둘러싼 봉토 또한 대규모여서 신라의 고분이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고분에 비해 상당히 대형인데다 무덤 구조의 특성상 도굴하는 것이 간단치 않으므로 부장품들이 매장 당시 그대로 출토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릉원에서 발굴된 대형고분의 경우 한 고분에서만 1만 점에서 2만 수천 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2. 남산지구

 

흔히들 ‘매를 먼저 맞을래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맞을래’ 또는 ‘좋은 소식을 먼저 들을래, 나쁜 소식을 먼저 들을래’라고 말하는데 경주 역사지구를 답사할 때 이런 말이 적격이다. 남산을 답사하려면 남다른 고생이 필요한 곳도 있으므로 이를 먼저 답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소 쉬운 일정부터 시작하느냐를 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5구역으로 나뉘었지만 경주가 평탄한 대지위에 건설되었으므로 접근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 반면에 남산지구는 포석정과 같은 과학 유산과 왕릉 같은 불교와 연관이 없는 문화재도 있지만 야외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온 산이 불교 문화재로 뒤덮여 있는 곳이다.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논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이므로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오봉과 고위산(수리산)이 있는 남산은 경주 일대에서 보기드문 기암괴석들이 산재하며 수십 개의 작은 골짜기의 소나무 숲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오봉은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남산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해발 500미터 미만의 낮은 산이기는 하지만 산은 산이므로 남다른 산행을 각오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남산을 철저하게 답사하려면 한 달도 부족하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불탑 96기, 불상 118기, 석등 22기, 사찰터 147곳, 왕릉 13기, 고분 37기 등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만 672점. 이 중 국보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점, 문화재자료 3점, 지방유형문화재 11점, 지방기념물은 2점으로 남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물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담 없는 역사박물관으로 볼 수 있다.

남산에 대한 전설은 매우 흥미롭다.

 

‘아주 오래 전 경주는 맑은 시내가 흐르는 푸른 벌판으로 ‘쉬벌’이라 불렀다.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이 평화로운 땅을 찾은 두 신을 보았다.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신과 부드럽고 고운 얼굴의 여신이었다. 너무 놀란 처녀는 “저기 산 같은 사람 봐라”해야 할 것을 “산 봐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비명에 놀란 두 신이 발길을 멈추었는데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처녀의 외침으로 두 신이 산으로 변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망산이 되었고 남신은 억센 바위가 있는 남산이 되었다.’

 

남산을 불국토로 여긴 신라인들은 천년을 두고 간수했으므로 남산 자체가 그대로 신라의 사찰이며 신앙처라는 것이 과언이 아니다. 역사학자 박홍국은 경주 남산을 두고 ‘신라인의 마음’이라고 했고 시인 이하석은 남산을 ‘아득한 옛사람들의 꿈길을 찾아가는 길이며, 화강암의 굳은 덩어리에 아로새겨진 시간의 뒷길을 서성이는 것이며, 무엇보다 성지순례의 길’이라고 했다.

남산은 동서길이 13킬로미터, 남북 길이 8킬로미터로 40여 개의 계곡이 있는 468미터의 금오산과 494미터의 고위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높이는 비록 높지 않지만 수십 개의 작은 골짜기 사이로 난 길과 수많은 기암들이 함께 어우러져 신라인들의 믿음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금오산은 남산을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쓰이며 유명한 김시습의 『금오신화』도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 설화가 얽힌 나정(蘿井), 신라 최초의 궁궐 자리인 창림사터, 신라 종말의 비극을 맞았던 포석정터가 남산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상 신라의 역사는 남산에서 막을 열고 막을 닫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신라인들은 남산을 신령들이 사는 신성한 장소로 숭배했지만 불교가 들어오자 남산의 바위가 석가모니의 진신(眞身)이라는 믿음으로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 민속신앙과 불교가 융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남산에 마애불이 많은 것은 그 때문으로 추정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남산지구의 세계유산 37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보리사 마애석불(지방유형문화재 제193호)

2)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3)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4)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5)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6)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7)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8) 남간사지 석정(지방문화재자료 제13호)

9)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10) 경주배리 삼존석불입상(보물 제63호)

11)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12)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13)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국보 제312호)

14)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15)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16) 남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17) 남산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

18) 경주남산 입곡석불두(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

19) 남산 침식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20)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21) 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

22) 남산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

23) 남산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24)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

25)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26)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27)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28)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29)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30)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31)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32) 경주 남산신성(사적 제22호)

33) 서출지(사적 제138호)

34)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35) 경주남산동 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

36) 백운대 마애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

37) 신라 내물왕릉(사적 제188호)

 

많은 문화재들이 있음에도 국보급이 하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곳의 유물들이 야외에 있으므로 보존상태가 좋지 않고 완성도도 다소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하나하나 남다른 유서가 있는 문화재들이다. 한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산지구 목록 안에 신라 내물왕릉이 있는데 이는 착오다. 우선 내물왕릉은 남산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및 월성지구의 내물왕릉계림월성지대(사적및명승 제2호)인 계림 안에 있기 때문이다.

 

3. 명활산성지구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라벌은 신라초기부터 외부 세력에 의해 많은 침공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침입으로부터 서라벌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산에 성곽을 쌓아 국방에 대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도성 전체를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지 않고 대신 동⋅서⋅남⋅북의 높은 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했다. 즉 동쪽에는 명활산성, 서쪽에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에는 남산신성과 고허성, 북쪽에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경주 산성 중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남산지구에 포함된 남산신성을 제외하고 명활산성(사적 47호) 하나 뿐이다. 명활산성만 등재된 것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산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남쪽의 환등산을 둘러싸고 테뫼식(山頂式) 토성을 먼저 쌓았다가 나중에 북쪽에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包谷式) 석성을 쌓았다.

테뫼식이란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둘러 쌓은 것을 말하는데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 하여 테뫼식이라 하고 멀리서 보면 시루에 흰띠를 두른 것같이 보이므로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규모가 작고 축성 년대가 오래된 산성은 대부분 이에 해당하는데 단기 전투에 대비한 성곽이라 할 수 있다. 포곡식이란 성곽 안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으로 규모가 테뫼식보다 크다. 기본적으로 성곽 내에 수원지가 있고 활동공간이 넓은데다 외부에 대한 노출도 테뫼식보다 훨씬 적다. 일반적으로 테뫼식성에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점차 포곡식으로 축조되거나 성곽의 규모를 확대하면서 만드는데 명활산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데 전체 길이가 약 5.6킬로미터로 결코 작은 성은 아니다.

이 성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성왕(이사금) 4년(405) 왜군이 이 성을 공격하다 철수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로 명활산성은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건설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당시는 토성이었다.

자비왕(마립간) 16년(473) 7월에 산성을 개수하고 소지왕(마립간) 10년(488)에 거처를 옮겨가기까지 13년 동안 궁성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당시 신라의 정황이 매우 급박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의해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살해되고 그의 아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했으며 죽령과 동해안을 고구려가 위협하던 상황을 고려하면 자비왕이 명황산성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551년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어떤 사람들이 어느 구간을 맡아 공사했는지 등의 정보를 상세하게 적은 비석이 근처 포도밭에서 발견되어 신라 산성 연구에 일조했다. 또한 1988년에는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 조각도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선덕여왕(647) 때 당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 비담이 쿠데타를 일으킨 곳도 이곳이다. 비담의 쿠데타와 진압과정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여왕이 존재하는 한 나라가 옳게 다스려질 리가 만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군인 김유신 장군의 부대가 반월성에 본진을 두고 10여 일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의 무리들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외치자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선덕여왕은 이 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김유신 장군은 김유신 장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매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튿날 김유신 장군이 사람을 시켜 선전하기를, ‘월성에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적군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백마를 잡아서 별이 떨어졌던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악이 선을 이기고 신하가 왕을 이기는 괴변이 없기를 기도하였다. 마침내 김유신 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명활산성에 주둔한 반란군을 총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설명이다.

 

4. 황룡사지구

 

황룡사지구는 경주박물관, 안압지와 지척의 거리 소위 말해 코 닫는 거리에 있는데 공터만 남아 있는 사적 6호의 황룡사지와 국보 30호로 지정된 분황사탑만 포함된다.

이 두 사찰은 흥륜사와 함께 신라 초기 사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특히 황룡사는 신라의 사찰 가운데 가장 큰 절로 대지가 약 2만여 평, 동서가 288미터, 남북이 281미터에 달한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원래 사찰을 지으려고 한 장소가 아니라 궁궐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우물 속에서 황룡이 나오는 바람에 신라 변방 아홉 개 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궁궐 짓기를 포기하고 황룡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황룡사는 자비마립간 12년(469)에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인 방리제(坊里制)가 실시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 왕경에서 하나의 방(坊)의 크기는 대략 동서 160미터, 남북 140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결과 황룡사의 경계는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로 이것은 대체로 4개의 방리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면적이다.

황룡사터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이때 원래 늪지였던 땅을 매립해 대지를 만들었다. 황룡사지는 발굴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 있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서회랑을 놓아 백제의 1탑1금당 형식이었다.

황룡사라면 645년에 완성된 9층 목탑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탑은 높이가 80미터에 이르는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에 목탑을 세우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대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자장은 신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큰 우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자장이 귀국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신인은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자신의 큰아들이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주변 9나라가 복종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9층탑 세울 것을 건의하자 신하들이 백제에서 기술자를 데려와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는데 처음 목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아비지가 불안하여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탑을 완성시켰다.’

 

『삼국유사』의 글만 보더라도 황룡사탑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80미터나 되는 목조탑은 나무의 결구에서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없으면 건설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탑 기술이 부족하여 신라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던 백제의 탑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탑을 완성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소위 외국에서 기술자를 초청하여 완성한 것인데 백제는 640년에 이미 익산 미륵사에 구층 목탑을 건설했으므로 충분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유사』에 9층탑을 세우면 아홉 나라가 복종한다고 했는데 아홉 나라를 보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으로 이 중에는 백제와 고구려는 빠져 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이질적인 국가가 아니라 당연히 합쳐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추정도 있다.

여하튼 중건된 2차 가람은 9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공했는데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을 제거했다. 중문을 창건 가람의 남쪽에 새로 설치하고 그 북쪽에 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금당의 동․서쪽에 동․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1탑3금당의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후 통일신라시대에 종루와 경루를 정방형으로 개조하고 동․서회랑을 개조하여 남북자오선을 중심축으로 중앙에 금당, 그 좌우에 또 다른 전각, 그 남방에 탑, 북방에 강당, 탑 전방좌우에 또 다른 건물, 그리고 중문과 강당 좌우로 장방형으로 회랑을 두른 1탑3금당의 변형된 가람형식을 하고 있다.

특히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회가 자주 열렸고 자장이나 원광과 같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실제로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설명도 있다. 황룡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벽화 속의 노송이 실물과 꼭같이 그려져서 자주 새들이 앉으려다 미끄러졌으나 황룡사의 스님이 새로 색칠을 한 이후로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금동장륙상이라 불리는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쇼카 왕이 쇠와 금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뒤 최후로 배에 구리 57,000근, 황금 40,000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어 보내면서 인연 있는 곳에서 조성되기를 빌었더니 이 배가 신라에 닿았다. 이들 재료로 진흥왕 35년(574)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 불상의 기원을 불교의 고향인 인도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추측한다. 여하튼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황룡사탑을 건설된 지 20여년이 지나 곧바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현재 금당 주위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이 바로 이 금동장륙상을 안치하였던 대좌다. 이 대좌만 보아도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좌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런 모양은 좌우협시불의 대좌도 마찬가지이다. 황룡사의 자랑거리는 이뿐이 아니다. 황룡사에는 754년에 주조된 황룡사 대종이 있었는데 종은 에밀레종의 네 배나 된다고 알려진다.

발굴 결과 발견된 유물이 4만여 점에 이르렀는데 목탑지 심초석 밑에 있는 넓은 판석 중앙에는 사리를 봉안하였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패어 있었고, 그 위에 석재의 덮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심초석 아래의 거대한 판석 밑에서는 금동태환이식(金銅太環耳飾)․동경(銅鏡)․백자호(白磁壺)․수정옥(水晶玉) 등 2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리를 봉안하고 심주를 세우기 전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 장엄구였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황룡사 강당 자리 북동쪽에서 출토된 높이 18.2센티미터, 최대 폭 105센티미터의 대형치미다. 이와 같은 크기의 치미는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이 큰 것이다. 치미는 길상과 벽사의 의미로 궁궐이나 사찰의 용마루 끝에 사용되던 장식기와인데 이렇듯 거대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다.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룡사 탑은 워낙 높은 관계로 몇 번이나 벼락을 맞고 보수를 거듭했는데 1238년 몽골의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만 남아 있다. 9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 높이 183척, 상륜뷰 42척, 합해서 225척(80미터)로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며 요즈음 건물로 치면 약 20층이 된다.

그동안 한국 고고학자들의 염원은 1300년 전에 건설된 황룡사 9층탑을 복원하여 그 위용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목탑을 복원한다면 세계의 건축가들은 물론 관광객만도 수없이 순례하는 명품으로 세계에 군림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황룡사 9층 목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고유섭 선생은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목탑은 중국식 누각의 받아들여 조영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 엄격한 의미의 목탑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원 지방, 황하 유역은 세기 초엽에 갑작스런 사막화 현상으로 원시림이 사라지면서 목재가 귀한 지역으로 돌변했다. 북경만 해도 거대한 목탑을 건설할 만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 후대인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금성을 축조하면서 수양제가 판 운하를 이용하여 남방의 목재를 운송하여 조달했다. 그러나 통나무로 운반하기 어려우므로 나무를 각재로 켜서 차곡차곡 포장하여 운반한 후 그것을 다시 복원하여 둥근 기둥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인 천단(天壇)의 경우도 이런 방식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조로 만든 형태의 목탑 모양이 희귀하나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비족이 세운 영령사탑(英寧寺塔)은 중국 건축사상 가장 대표적인 초기 건축물인데 흙으로 쌓은 토심(土心)에 의지하고 목조로 외곽 구조를 만들었다. 소주(蘇州) 시내의 북사탑(北寺塔)은 중국에서 유명한 현존하는 탑파이지만 표면의 목조를 제거하고 보면 전축(塼築)구조로 항주(杭州)의 육화탑, 상해의 용화사탑도 동일한 구조다. 응현(應縣)의 불궁사 석가탑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한 목조탑인데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 기반을 전승한 요나라 시대의 북방 민족(중국 한족이 아님)이 조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백제 건축양식이 전해진 일본의 법륭사(法隆寺)·약사사(藥師寺), 중국의 9층 목탑인 육화탑(六和塔), 뇌봉탑(雷峰塔) 등 해외 건축물을 참고하면서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목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67미터의 불궁사 석가탑과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불궁사의 석가탑이 목조이기는 하지만 건립연대가 1056년이므로 이것을 놓고 약 400년 전에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이라고 볼 수는 없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학자들의 고민은 바로 황룡사 옛 터가 보이는 탑골의 부처바위(보물 제201호)’에서 9층 탑 암각화 모습이 나타나 그동안의 의문점을 해소시켰다. 정부는 이들을 근거로 황룡사목탑을 복원하는데 학자들과 힘을 모아 2011년 8월 최종 복원안을 확정했고 2016년부터 2025년까지 79.2m 실제 높이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공방에서 10분의 1 축소 모형 즉 8미터 높이를 완성했는데 1/10 크기이지만 엄청나다. 가로·세로 3.4m 길이의 바닥면 가운데 심주(心柱, 중심기둥)를 포함해 65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4면 7칸 구조로 내부를 꾸몄다. 층마다 마루를 깔고, 층과 층 사이엔 암층(暗層,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구조를 튼튼하게 했다. 예산은 무려 1,500억 원으로 황룡사 전체 복원사업의 예산(2900억 원) 중 절반이 넘는다. 2025년이 되면 한국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석가모니 이전 세상에 서라벌에 있던 7군데 사찰터의 하나’로 꼽던 중요한 사찰이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이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왕’이란 뜻으로 선덕여왕 대인 634년에 세워졌는데 이때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분황사는 부처의 힘을 빌어 국가의 어려움과 여왕 통치의 허약성을 극복하려는 호국적 염원을 담고 지은 것이다.

분황사에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들이 머물렀다. 643년 당나라에서 공부한 자장이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모시고 분황사에 머물게 했다. 자장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신라 불교의 교단조직과 승려들에 대한 일체의 규정을 정비했다. 분황사는 신라의 명필 혜강을 비롯하여 원효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편찬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입적했다. 그의 ‘십문화쟁사상’은 여러 교파의 차이를 화쟁하여 통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삼국통일을 이룬 무열왕과 문무왕의 정ㅊl 성향과 부합되는 측면도 있으므로 크게 모셔졌다. 아들 설총이 그의 유골을 부수어 소상(塑像, 진흙을 빚어 만든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예를 올릴 때면 소상도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 소상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활동하던 13세기 후반까지도 얼굴을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에는 경덕왕 14년(755)에 구리 36만6000근으로 주조한 약사상과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에 모셔진 장육존상이 4만 7000근이었다니 얼마나 큰 불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찰의 전각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 눈 먼 여자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당대에 신라의 거찰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남아있다.

분황사탑은 전탑양식을 채택했으나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의 재료는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신라에서 석재로 불탑을 축조한 백제와는 달리 모전석탑으로 불탑을 축조한 이유로 강우방 박사는 당대에 신라에서는 벽돌을 구울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벽돌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없으므로 결이 일정한 안산암을 이용하여 벽돌 모양으로 다듬고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모전석탑은 벽돌과 같이 작은 규모의 석재로 만들었으므로 일반형 석탑과는 두드러진 상이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벽돌을 쌓아올리듯 지붕의 아랫부분은 내어쌓기로, 반대로 윗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단식 지붕은 목조 건축에서는 볼 수 없다. 둘째는 1층탑신의 문이 4면에 보이는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 안에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이러한 사방불(四方佛) 제도는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시원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방불 제도는 후대에도 지속되었는데 현재는 감실 안에 사방불이 없다.

 

5. 월성지구

 

황룡사지구 인근의 월성지구에는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월성(사적 제16호),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첨성대>

첨성대가 남다른 것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무거운 돌(한 개의 무게는 평균 357킬로그램)을 쌓은 중력식 구조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높이는 9.108미터, 밑지름 4.93미터, 윗지름 2.85미터이며 전체 무게는 264톤이다. 특히 첨성대가 하늘과 연계될 수 있는 부분은 첨성대 중앙에 위치한 창문이 정남향으로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남중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친다는 점이다.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 측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투른 아이디어로 첨성대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첨성대를 건축학적으로 보면 유연하고 아름다운 병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세계의 많은 석조 구조물 중에서 이러한 형태를 지닌 구조물은 유례가 없으며, 이것이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균형 잡힌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도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원통부의 완만한 반 곡선 형태를 채택하였고 여기에 기능에 알맞은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기단에서부터 둘레 약 15.5미터인 원(제1단)을 만들면서 거의 같은 두께의 돌을 12단까지 쌓아 완만한 곡선을 만들고, 13에서 15단까지의 사이에 네모난 구멍을 만들었다. 이 네모난 구멍(약 95x95센티미터)은 정남이 아니라 약간 서쪽을 향하는데 이 구멍은 관측자들이 첨성대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출입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3단을 더 쌓아 올린 다음 제 19단에는 네 방향으로 밖을 향해 튀어나온 돌이 있다. 건축 구조상 안전을 위한 조치인지 아니면 관측 기기를 설치하는 데 사용되는 부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돌출된 돌은 제25단과 26단에도 있다. 이것은 마지막 단인 제27단의 높이에 맞는 바닥돌을 얹어 놓기 위한 지지대(대들보)인 동시에 몸통의 돌들이 이완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몸통은 기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씩 가늘어지다가 제19단에 이르면 거의 같은 둘레를 지키면서 21단에서 23단까지는 직선과 직선을 연결하는 이변곡선(移邊曲線), 24단에서 27단까지는 수직직선(垂直直線)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내물림 구조 자체는 아치구조법이 사용되기 전에 통용된 구조법이다. 마지막 제27단의 둘레는 약 8.95미터이며 총 365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몸통 위에 눕혀 놓은 2단으로 된 긴 돌기둥이 정(井)자 모양으로 상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2단으로 눕힌 돌기둥은 서로 벌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몸통의 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무겁게 누르는 역할도 함께 한다.

첨성대의 설계자는 내부 정자석의 배치, 원주부 하부에 채운 흙, 창구의 위치 등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여 안정성과 기능적 곡선미에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특히 11단 아래에 채워져 있는 흙은 원형으로 인한 변형에 저항할 수 있는 내력을 만들어 축조 시에 무너지는 위험을 감소시켰고, 완공 후에는 외력과 기초부 등, 침하 및 지진으로 인한 진동 등에 대비하여 첨성대의 원형을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가 세워진 후 경주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지진이 일어났는데 접착재도 사용하지 않은 첨성대에는 지진 피해를 입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하투과 레이더 탐사법으로 첨성대의 지층 구조를 조사해 본 결과 첨성대의 지하와 주변을 인공적으로 공고하게 기반을 다진 것이 확인 되었다. 즉 건축 당시 땅을 깊게 파서 큰 돌을 채웠고 특히 첨성대 바로 아래 부분에는 더 많은 돌들을 채웠다. 한마디로 첨성대의 장인들은 안정성과 기능은 물론 심미적인 면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다는 뜻으로 1300여 년 간 비바람과 지진을 견딘 첨성대의 비결이야말로 신라 건축 기술과 예술의 개가인 셈이다. 첨성대를 겉모양만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나일성 박사는 첨성대의 효용도에 대해 매우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국사기』에 첨성대가 완성된 후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볼 때 첨성대 아래에서 물시계로 정확한 시각 층정을 하는 동안 첨성대 꼭대기에서 조위가 서술한 대로 규표로 태양으로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서 1년의 길이를 정하기도 하고 해와 달을 관찰하여 절기를 구별한다. 또한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살피고 별을 관찰하여 국운을 점치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런 관측은 맨 눈으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첨단 과학이었다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천문학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발달했다. 백제는 천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관부라는 기관이 있었고, 백제에서 사용한 역(歷)은 고구려와 같은 것이었다. 6세기부터 새로운 역을 쓰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1년의 길이를 365.2467일로, 한 달의 길이를 29.5306일로 썼다.

백제는 일식, 월식, 행성, 유성, 지진, 우박 등에 대해 세밀하게 관측하였는데, 『삼국사기』에 혜성에 관한 관측 기록만 15건이나 있다. 특히 87년에 있었던 일식에 대한 기사는 매우 일찍부터 천문 관측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554년에는 왕보손이, 602년에는 관륵이 천문 관측방법과 역법, 지리책 등을 일본에 전하였다.

 

<계림(鷄林)>

첨성대의 과학성을 본 후 월성지구에 있는 계림으로 향한다. 글로만 보면 먼 곳에 있는 곳처럼 보이지만 지척지간이다. 계림은 나정과 더불어 신라인들이 매우 중요시하던 장소이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김알지는 신라 미추왕(262~284)과 내물왕(356~402)의 선조인데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는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탈해 이사금때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 호공(瓠公)을 보냈다. 호공이 가보니 보라색 구름이 하늘에서 드리웠고 작은 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궤를 열자 외무가 준수한 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씨 시조인 알지다. 그 뒤로 시림이라는 이름을 고쳐 계림(鷄林)으로 고쳐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의 탄생과 함께 신라는 국호를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고쳤다고 한다. 계림이란 국호는 다시 사로(斯盧)로 바뀌었다가 지증왕 4년(505)에 신라로 고정된다. 그러나 계림은 후대에도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천축국(天竺國, 인도) 사람들이 신라를 ‘구구타예설라(矩矩타䃜說羅)’라고 불렀는데 ‘구구타’은 닭을 말하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라고 적었다. 또한 인도 사람들은 ‘신라사람들이 닭신을 받들기 때문에 날개깃을 꽂아서 장식한다.’고 적었다.

최고 지배자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고구려나 가야의 건국신화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고대 사회의 최고 지배층은 자신이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혈통을 신성시하고 지배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김알지의 탄생신화는 김씨 집단이 일찍부터 외부에서 이주해온 집단임을 암시한다. 탈해왕은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지만(탈해왕은 석씨) 왕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한다. 이는 아마도 김알지를 정점으로 하는 이주세력이 아직 완전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정황으로 해석한다. 경주 김씨가 왕이 되는 시기는 262년 미추왕이 13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그는 김알지의 6세손이다. 근래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김알지(가야의 김수로 포함)는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였던 김일제의 후손으로 신라 56왕 중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인 내물왕릉(사적 188호)은 계림 안에 있는 무명의 무덤과 함께 있다. 내물왕은 김씨 성으로는 미추왕에 이어 두 번째로 왕이 되며 비로소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경주 월성>

경주월성(사적 제16호)은 파사왕 2년(101)에 축조된 왕궁이다. 그동안 신라 왕들은 혁거세왕이 창림사 터에 쌓은 엉성한 궁궐에서 살았지만 나라 형편이 좋아지자 번듯한 왕궁을 건설한 것이다. 월성은 계속해서 신라의 왕성이었는데 5세기 후반 명활산성에서 왕족들이 거처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왕성으로 남아있었다. 전체 길이는 약 1.8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토성인데 높이는 남쪽이 다른 쪽보다 좀 낮다. 성벽과 바로 접해 있는 남천이 자연적인 해자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인공으로 해자를 만들었는데 1979〜1980년에 북쪽 해자를 발굴한 뒤 일부 구간을 복원했다. 이때 뻘 속에서 많은 목간이 나왔다.

월성이 궁성이 되면서 점차 궁궐 영역을 확장하여 전성기에는 귀정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을 비롯하여 월상루, 명학루, 망덕루 등의 누각이 있었고 성안에는 건물들이 조밀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둘레에는 인공해자를 설치하였으며 남쪽은 절벽 밑을 흐르는 남천을 해자 삼아 석벽을 쌓았다고 한다.

 

<석빙고>

현재 반월성터에는 아무런 건물도 남아 있지 않고 숲이 우거진데다 잔디만 잘 깔려 있는 공터이다. 세계유산이라고 지정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으므로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가 강석경은 ‘비어있기에 상상력을 주는 장소다’라고 산책길로 추천한다.

한국의 수많은 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을 골라 보라면 석빙고를 지목한다. 현대인들의 기본 가전제품인 냉장고는 얼음이나 냉기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계장치이지만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이다.

석빙고의 우수성은 가정의 필수품이라는 냉장고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부모가 항상 하는 말은 냉장고를 열면 항상 문을 꼭 닫으라고 한다. 아무리 냉동고에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을 꽉 채워 놓더라도 냉장고문이 조금만 열려 있다면 몇 시간 내에 모두 녹아버린다. 그런데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캐어 기계적인 장치 없이 다음해 가을까지 얼음을 저장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석빙고가 얼마나 우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얼음의 용도가 반드시 음식 저장 같은 실용적인 측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함으로 여름철에 극성하는 양기(陽氣)를 억제하여 자연의 조화를 회복시켜 보겠다는 동양철학적인 발상도 큰 몫을 했다. 그러므로 겨울이 춥지 않아 얼음이 얼지 않으면 동빙고의 북쪽에 있었던 사한단(司寒壇)에서 얼음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다. 기한제를 지냈더니 날씨가 추워져 얼음을 채취할 수 있었다고 제관이 상을 받기도 하였다.

경주 월성 지구의 석빙고는 빙실의 규모가 35평 정도로 남한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길이 19미터, 너비 6미터, 높이 5.4미터의 규모로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고 계단이 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다섯 개의 기둥에 장대석이 걸쳐져 있고, 환기용 구멍 3개가 장대석을 걸친 곳에 있으며 바닥 한가운데가 경사지게 되어 있어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석빙고에 저장된 겨울철의 얼음이 한 여름에도 사용될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인지는 계명대학교의 공성훈 박사는 석빙고의 실내 환경 분포를 측정했다. 실험 결과 석빙고는 비교적 날씨가 따뜻한 경우 실내 온도 조건의 분포 범위는 평균 19.8도로 온도교차 범위는 1.3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외의 온도 교차 범위는 8.2도로서 이와 같이 실내 온도 교차 범위가 낮은 것은 장기적인 얼음 보관을 위한 석빙고 외부 구조체의 축열 성능과 잔디 식재에 의한 복사열의 효율적인 산란 작용 등에 의한다고 추정되었다.

장동순 교수는 석빙고가 반지하 냉동 창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경주 석빙고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정말로 석빙고가 겨울에 얼음을 캐내어 여름까지 저장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우선 얼음이 50%와 100% 석빙고에 채워져 있을 때와 단열재로 볏짚이나 갈대를 사용했을 때 계산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매우 놀랍다. 얼음의 충진량이 50%인 경우 짚이 없을 때는 석 달 후에 얼음량의 감소가 6.4%, 여섯 달 후에는 38.4%가 되는 반면에 짚이 있을 경우 석 달 후의 얼음량 감소는 0.04%, 여섯 달 후에는 0.4%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얼음의 충진량이 100%인 경우 짚이 없을 때는 석 달 후에 얼음량의 감소가 9.2%, 여섯 달 후에는 51.8%로 절반 이상이 감소한 반면에 짚이 있을 경우 석달 후의 얼음량 감소는 2.8%, 여섯 달 후에는 18.4%나 되었다. 얼음의 양과 볏짚의 유무에 따라 얼음의 저장 능력을 조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였다.

여기에서 볏짚의 역할인 단열재란 열을 전달하지 않는 재료로서 그 원리는 재료가 비어있는 공간을 많이 갖도록 한 것이다. 현대 건축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스티로폴(k:0.03W/m°C)이나 우레탄은 미세한 공기구멍을 되도록 많이 포함하여 열을 차단하고 있다. 석빙고에서 사용한 볏짚도 속이 비어 있는데다 재료 자체가 열을 잘 통과하지 않으므로 외기 온도에 의해 얼음이 녹지 않는 단열재 역할을 한 것이다. 단순하게 얼음을 짚으로 덮는 것으로 보이는 석빙고가 어떤 기계적인 장치에 비견하여 결코 떨어지는 과학적 기술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석빙고와 같은 시설을 만들어 여름에 항상 얼음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다는 것을 부연하면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으쓱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안압지>

월성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사적 제18호인 안압지(雁鴨池)가 있는데 임해전(臨海殿)으로도 불린다.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신라 왕실의 별궁인 동궁 안에 세워진 전궁(殿宮)을 의미하기도 한다.안압지는 문무왕 14년(674)에 만들어졌는데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왕 14년 2월에 대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무산십이봉을 본 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산십이봉은 중국 사천성의 비산산맥에 있는데 초나라 회왕이 그곳에서 선녀를 만나 놀았다는 전설 때문에 신선이 노니는 정원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둥근 못을 만든 뒤 돌을 쌓아 섬을 만드는 석가산 방식의 정원은 도교가 활발했던 당나라 무렵 크게 유행하였는데 국내에서는 백제의 궁남지와 신라의 안압지가 바로 무산십이봉의 영향을 받은 연못이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미터, 남북 길이 약 190미터의 장방형 평면이며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미터다. 석축을 보면 불국사의 석축, 불국사의 천장, 남산신성의 석축 등에서 보이는 동틀돌(돌못)이 나타나 안압지의 비중을 알 수 있다. 못의 깊이는 약 1.8미터 정도이며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깔았다. 가운데에는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은 건물을 배치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보인다. 못 속에 섬이 세 곳이 있는데 크기가 서로 다르다. 학자들에 따라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는 삼신도(방장산, 봉래도, 영주도)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발굴 조사로 3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24,000점에 달하는 기와와 전(塼)류이다. 용도별로 보면 수막새,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특수기와, 장식기와, 바닥에 깔거나 벽이나 불단 등에 장식되었던 전(塼) 등이다. 전 가운데 옆면에 당의 연호를 사용한 보상화 무늬가 있는 것과 벽사의 의미로 사용된 귀면와들이 돋보인다.

와전류는 거의 대부분 삼국통일 직후부터 신라 멸망시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신라에서 언제부터 기와가 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4〜5세기경부터 궁성에 암키와⋅숫키와가 사용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불교가 공인되고 흥륜사⋅황룡사 등 큰 사찰이 건설되는 6세기 중엽 경에는 연꽃무늬 수막새도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기와를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안압지의 원래 이름을 ‘월지(月池)’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월지라면 ‘달빛이 곱게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보면 적절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바닥의 뻘 속에서 신라시대의 통나무배가 발견되었다. 완형 1척과 2척분의 파편이다. 완형은 세 개의 나무를 통으로 파서 배 모양을 만든 후 비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안쪽 바닥에 앞뒤 하나씩 가로 질러 조립한 것으로 우리나라 배의 실물로는 가장 오래된 배이다. 통나무배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뻘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썩지 않고 보존되었던 것인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경주특별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고성민 기자  rexgo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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