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양동(良洞)ㆍ하회(河回)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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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을 양동(良洞)ㆍ하회(河回) 마을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9.01.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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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마을 양동(良洞)ㆍ하회(河回) 마을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2010년 하회(河回)ㆍ양동(良洞) 마을이 ‘한국의 역사마을’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이는 한국의 세계유산 숫자 하나가 늘어났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역사도시’ 또는 ’역사마을’은 단순히 마을이 오래됐거나 고건축물이 많다고 해서 등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회ㆍ양동마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특정한 유산(Heritage)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기회는 오직 한 번밖에 없다. 유네스코는 한 유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두 번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등재 여부를 최종 판가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앞서 각국은 등재 가능 여부를 면밀히 따져, 해당 유산이 등재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 자체를 철회하는 일이 많다.

등재 후보지가 ‘문화유산’일 때는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라는 자문기구가 현지실사를 포함한 해당 유산에 대한 광범위한 심사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마을’은 ICOMOS의 사전 평가보고서에서 ‘등재 보류’(Refer) 판정을 받았다. 등재 보류란 말 그대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미비점으로 말미암아 등재를 ‘보류’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류’가 등재 신청 자체를 해당 국가에 돌려보내는 ‘반려(Defer)’나, 등재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등재 불가(Not Inscribe)’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평가이긴 하지만, 등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통상 ‘등재 보류’ 판정을 받으면,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을 철회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다.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9년 조선 왕릉과 함께 정부가 동시 등재를 추진한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은 등재 보류 판정을 받자 등재 신청을 사전에 철회하였다.

그렇지만 정부는 하회ㆍ양동마을에 대해서는 이런 우회 방법을 쓰지 않고 정공법을 채택했다. 한국은 비록 ICOMOS 평가보고서에서는 ‘등재 보류’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하회ㆍ양동마을이 왜 등재 보류 판정을 받게 됐는지, 그 이유를 분석했는데 결론은 두 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볼 때 대표적 양반 씨족마을인 두 마을을 한데 묶어 ‘연속유산’으로 등재할 필요성은 충분하게 이해했으나 행정구역이 다른 두 마을에 대한 통합관리 체계를 문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와 유사한 예도 있었다. 2008년 말레이시아의 역사도시인 말라카(Malacca)와 교치시(喬治市, 조지타운 시)가 ICOMOS에서 ‘보류’ 권고를 받았음에도 보완책을 마련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 전례가 있었다.

원인 진단이 나오면 처방전도 나오기 마련이다. 정부는 ICOMOS가 지적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즉 지자체, 문화유산보존활용전문가와 마을 주민대표까지 모두 참여한 통합관리 체계인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구축했다. 이런 체제를 구축한 후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키를 쥔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에 대해 ICOMOS가 우려한 통합관리 체계의 마련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마침내 두 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에서 주목한 것은 이곳에 이어져 내려오는 유교문화였다. 전봉희 서울대 교수는 이번 등재에 성공한 이유는 ‘유교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철저히 지켜온 한국 전통의 유교문화가 세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즉 유교를 이념으로 한 유․무형의 문화와 한민족이 갖고 있는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계승해온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에 대해 ‘주거 건축물과 정자, 서원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 문집, 예술작품, 조선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 세시풍속과 전통 관혼상제 등 무형유산이 잘 전승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1. 하회(河回)마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자(父子)가 방문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모인 씨족마을로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이다. 씨족마을이란 같은 성씨가 혈연집단을 이루고 있는 유교문화 특유의 마을로 장자 상속을 근간으로 한다.

하회마을이 한국에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들이 가장 풍부히 보존된 마을이지만 처음에 마을은 화산의 산기슭에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풍산 류씨는 화천 주변의 현 하회마을에 정착했다. 이들 세 성씨는 17세기 중엽까지 마을에 함께 살았으나 점차 두 성씨가 사라지면서 하회는 류씨 동족마을이 되었다.

하회는 경북 안동시의 서남쪽 방향에 위치하는데 하회가 속해 있는 풍천면 주변은 동쪽으로 풍산읍, 서쪽으로 예천군 지보면, 남쪽으로 의성군 신평면, 북쪽으로는 예천군 호명면이다.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이곳에 와서 봉우리를 맺은 화산과 북애(北崖)를 이루었고 일원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이루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의 상징으로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데 부용이란 연쪽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그 사이를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다리미형)이라고 설명된다. 하회(河回)라는 이름도 강(河)이 마을을 감싸고돈다(回)는 뜻이다. 풍수지리상 하회마을(양동마을 포함)은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즉 비단옷을 밝은 달빛 아래 깔아놓은 명당이다. 그 덕인지 두 마을은 비단옷 입은 귀인들을 수없이 배출했다고 알려진다.

하회마을처럼 마을이 강가에 바로 붙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십중팔구 수해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이 수해를 받지 않는 이유는 낙동강의 흐름이 다른 곳과 달리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의 다음 글로도 알 수 있는데 이중환은 살기 좋은 곳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강은 산골에서 나와서 유유하고 한가한 모양이 없고, 항상 거꾸로 말려들고 급하게 쏟아지는 형세가 있다. 그러므로 강을 임하여 정자를 지은 것은 지세의 변동이 많아 흥하고 스러짐이 일정치 않다. 오직 시냇가에 사는 것은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스런 운치가 있고 또 관개와 농사짓는 이점이 있다. (중략) 무릇 시냇가에 살 때는 반드시 영(嶺)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평시에나 난세에나 모두 오랫동안 살기에 알맞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살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陶山)과 안동의 하회가 으뜸이다. (중략) 하회는 평평한 언덕 하나가 황강(낙동강) 남쪽에서 서북으로 향하는데, 거기에 서애 류성룡의 집이 있다. 황강물이 휘돌아 흘러 마을 앞에 머물면서 깊어진다. 수북산(水北山)은 학가산(鶴駕山)에서 갈라져 와 강가에 둘러 있는데 모두 돌 벽이며, 돌 빛이 또한 온화하고 수려해 조금도 험하지 않다. 암벽 사이에 옥연정과 작은 암자가 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로 덮여 진실로 절경이다.’

이중환은 영남에서 4곳을 길지로 적었는데 봉화 유곡마을, 안동 도산의 토계 부근,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다. 마을의 집터도 풍수사상이 반영되어 풍수적으로 마을 중앙의 삼신당(三神堂)을 중심으로 풍수길지에 자리 잡았다.

하회마을의 형상은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삿갓이나 대접을 엎어 놓은 것처럼 가운데가 도톰하게 솟아 있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졌다는 점과 집들의 분포가 대충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마을의 전체적인 형상은 비행접시 모양을 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 바로 이런 형상을 뜻한다.

마을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까닭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마을은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 강을 낀 이른바 배산임수 형태를 갖고 있는데 하회는 산과 멀리 떨어진 채 강폭에 휩싸여 있으므로 강줄기의 흐름을 따라 둥글게 분포되기 마련이다.

하회마을의 물길이 S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S자보다는 태극 모양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물이 태극 모양을 이루고 흐르면 땅도 의례 태극 모양을 이루기 마련이다. 하회를 두고 수태극, 산태극이라고 하는 이유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태극형을 매우 귀하여 여긴다. 이는 태극도설의 철학적 이치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강과 산은 음양의 관계로서 태극 형상으로 맞물려 있으므로 특별한 의미로 해석되는데 한국인들에게 태극은 너무나 잘 알려진데다 곧바로 이해되므로 이곳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여하튼 하회마을이 남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회마을은 현재 세계가 부러워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지만 하회의 현재와 과거가 매우 달라졌다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하회의 주산은 화산이고 하회의 수구맥이는 화천인데 하회의 별칭도 꽃과 관련이 있다. 하회에는 옛날에 배나무가 많아서 늦은 봄이면 배꽃으로 온 마을이 하얗게 뒤덮혔다고 한다. 배나무를 정원수로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회를 ‘이화촌(梨花村)’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하회마을에서 배나무가 거의 사라진 것은 새로운 조경관 때문이다. 마을에서 정원수를 신식으로 조성하면서 향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향나무와 배나무는 상극이다. 향나무의 포자 때문에 배나무가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나무도 마찬가지로 향나무 때문에 과수 나무가 곤욕을 치른 셈이다. 이 문제는 하회마을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자 하회의 옛 정서를 되살리기 위해 향나무가 아닌 배나무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된 상태다. 이런 과거의 낭만과 향기를 찾는 일이 진척될지는 시간을 거쳐 두고 볼 일이다.

하회마을에 처음부터 풍산류씨가 터전을 잡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김해 허씨가 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광주 안씨가 문중을 이루었는데 풍산 류씨가 들어와 잔치판을 벌였다고 말해진다. 한마디로 세 번째 들어온 풍산 류씨가 하회마을 자체를 인수한 격이다.

여하튼 풍산류씨들이 하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이다. 류절(柳節)을 시조로 하는 풍산류씨는 공조정서(工曹典書)를 지낸 7세 류종혜 때 이곳에 정착했다.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한 전설을 보면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덕을 쌓고 적선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했다.

특히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등의 배출로 더욱 명성을 높여 조선 중기 이후 풍산 류씨 세거지로서 경향 각지에 국반(國斑)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즉 명문 세가의 한 상징적 마을로 또는 유교 문화의 전형적 마을로 주목받았는데 여기에는 겸암과 서애에 힘입은바 크다.

겸암은 퇴계가 향리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겸암이 부용대 남쪽 기슭에 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할 때 ‘겸암정사’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퇴계다. 겸암은 30대 들면서 관직에 나가 의금부도사, 한성판관, 원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몇 차례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아우 서애는 선조를 수행하여 서울을 떠났지만 겸암은 벼슬을 그만두고 팔순 노모를 업은 채 고향 하회로 돌아왔다. 57세에 잠시 원주목사에 있었으나 노모를 위해 사직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겸암집』, 『오산지』외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서애는 겸암의 아우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게 만든 조선의 명신 중의 한 명이다. 서애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간략하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에 대해 설명한다. 류성룡은 중종 37년(1542)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유성룡은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로 알려진다. 21세의 유성룡은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하여 추후 퇴계의 학통을 잇는다. 23세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며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했으나 여러 차례 사직하여 물러났다. 43세에 예조판서, 46세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고 50세에 좌의정이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명실공히 전시 행정의 총수가 된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휩쓸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란길을 오르는데 그 행방이 분분할 때 서애는 ‘만일에 왕이 한 걸음이라도 조선 땅을 떠나면 조선을 잃는다’며 의주로 가서 끝까지 본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조가 이를 따랐다. 피란중에도 당쟁이 끊이지 않아 영의정 이산해가 탄핵을 당하고 그 후임으로 서애가 임명되어 왜군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특히 류성룡은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 과정에 대해 설명한 『징비록』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한 달 전에 모함을 받아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뒤에 무고함이 밝혀져 공신으로 직첩을 받는다. 서애는 벼슬길에 나간 지 30년, 재상의 자리에만 10년 간 있었으나 청빈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의 정확한 정황 등을 기록한 『난후잡록』, 『징비록』 등을 저술했다.

풍산 류씨는 12세 류중영과 그의 장남인 13세 겸암 류운룡이 종손이면서 불천위 제사를 받아 두 신위를 모시는 양진당이 대종택(大宗宅)이 되었다. 또한 차남 13세 서애 류성룡도 불천위로서 별도의 사당에 모시게 되자 그의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이 충효당이 되었다. 불천위란 공신이나 대학자 등에게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는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릴 수 있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마을에서 터전을 잡아나가자 허씨와 안씨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당대에 몇 사람의 허씨와 안씨가 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는 이들 성을 가진 사람이 단 한 가구도 없으므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유교마을>

하회마을의 길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마을의 지리적 중심부를 이루는 삼신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길이 방사선형으로 뻗어 있어 방천과 농로 또는 마을 바깥으로 나가는 길과 만난다. 또한 마을 외곽을 순환하는 도로가 방천길 및 농로로 이어져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중심부의 순환도로 사이에 또 하나의 순환도로가 있어서 결국은 방사선의 길과 몇 겹의 순환도로가 만나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길이 마을을 일정한 영역으로 나누어준다. 이러한 길의 구조는 마을의 형상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일반 마을들은 주거지가 산기슭을 따라 가로로 길게 분포되어 있거나 산의 골짜기를 따라 세로로 길게 분포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하회는 산기슭이나 골짜기에 터잡지 않고 하안(河岸)의 둔덕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소위 연화부수형으로 주거지가 분포되었다. 이 때문에 도로도 마을 중심부에서 방사선형으로 형성되어야 주변부와 소통이 원활하게 된다. 당연히 집의 방향도 제각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의 골목길도 집의 분포에 따라 집과 집을 이어 주는 소통 체계로 형성되었다. 도로가 집의 향(向)에 따라 방향이 바뀌므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데 특히 골목길이 집 뒤쪽으로 통하지 않게 만든 것이 더욱 복잡한 길을 유도한다. 집 뒤가 바로 길에 인접해 있어도 집과 같은 담장을 사이로 소통이 차단된다. 따라서 대문을 찾아 들어가려면 뒤편의 담장을 길게 따라 돌아가서 집의 전면부인 대문 앞까지 가야한다. 이런 고집이 오히려 하회의 참 맛을 느끼게 함은 물론이다.

하회의 담장이 대부분 돌을 사용하지 않은 황토흙으로 만든 것도 하회의 특성 중의 하나다. 이들 토담은 양쪽에 판자를 대고 나무틀은 짠 뒤에 그 속에다 작두로 썬 짚을 넣어 반죽한 진흙을 채워 넣고 발로 다진 후에 굳어지면 판자를 뜯어내어 완성한 것이다. 담쌓는 과정이 돌담보다 다소 번거롭게 힘들지만 그렇게 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회에 돌이 없다. 돌담을 쌓으려면 최소한 돌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하회는 하안에 위치하므로 산의 암석을 채취해 오기도 어렵고 강변은 모두 모래톱이나 뻘로 형성되어 있어 자갈조차 구경하기 힘들다.

둘째는 풍수지리설 때문이다. 하회는 행주형(行舟形)이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데 행주형이란 배를 의미한다. 배에 돌을 실으면 가라않는다. 또한 물 위에 뜬 연꽃에 돌담을 쌓으면 연꽃이 상한다. 우물을 파지 않고 화천의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돌담을 쌓지 않고 흙담을 쌓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흙담이기 때문에 관리를 하지 않으면 엉망이 되기 마련이다. 비가 많이 오면 흙담이 쉽사리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담장에 지붕 못지않게 기와나 이엉으로 잘 이어 둔 까닭도 흙담이라는 재질의 특성 때문이다.

하회가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사의라고 말하지만 이 역시 하회의 지형 때문이다. 마을에 일단 들어오면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 하회가 민속마을로 일찍부터 지정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연 환경과 조선의 유교적 이념과 제도, 주민들의 문화적 역량이 오늘의 하회마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회마을이 방사선형으로 구성되어 복잡하기 짝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의 경계는 있다.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으로 북촌, 아래쪽으로 남촌이 나뉘어진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류씨,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았다. 또한 마을 전체가 농경지(생산영역)-거주지(생활영역)-유보지(의식영역)로 나누어져 유교적 의식이 강조되는 독특한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가장 유교적이라 할 수 있는 의식공간에는 정자 등이 세워져 학문과 교육, 사교의 중심으로서 문화의 산실 역할을 했다.

 

<마을전체가 역사유물>

하회마을의 역사가 600여년에 이르는 만큼 중요한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도 많다.

하회마을에 있는 유성룡의 『징비록』이 국보 제132호, 하회탈 및 병산탈이 국보 제121호이며 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이다. 서애 류성룡 종가 문적11종 22점이 보물 제160호이며 류성룡 유물 3종 27점 등 고문서류가 보물 제460호이다.

또한 건물로는 보물 2건, 중요민속자료 9건이 있다. 이들 지정된 가옥은 풍산류씨 종가인 양진당(보물 제306호), 서애 류성룡의 생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 원지정사(遠志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5호), 빈연정사(賓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6호), 작전고택(柳時柱家屋: 중요민속자료 제87호), 옥연정사(玉淵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謙菴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남촌댁(중요민속자료 제90호), 주일재(主一齋: 중요민속자료 제91호), 하동고택(河東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등이 있고 인근에 병산서원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수많은 문화재 중심으로 찾아가므로 마을을 답사하는 동선에 약간의 중복이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한 장소를 다시 한 번 방문할 수 있는 것도 묘미다.

 

①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양진당(養眞堂)은 하회마을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진다. 류종혜가 입향하기 전에 화산 자락에 이미 살고 있던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의 마을을 피해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알려진다.

하회마을이 사회적으로 명문 반열에 오른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기반을 굳힌 것은 류종혜의 5대손인 입암(立巖) 류중영(1515~1573)과 그의 두 아들인,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배출되면서부터이다. 겸암의 하회마을 큰 종택은 양진당, 서애의 종택은 충효당으로 하회마을의 중심을 이루는데 양진당과 충효당은 서로 길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다.

양진당은 하회마을 풍산류씨 문중의 상징으로 문중의 대소사가 이곳에서 논의되었는데 하회마을의 중추임에도 불구하고 남향이 아니다. 이는 하회의 높은 지점인 마을의 중심 삼신당을 등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은 16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있고 좌우로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에 합각지붕으로 된 5칸x2칸 규모의 사랑채(양진당)를 ‘一’자 형으로 배치했다. 4칸에 온돌방을 만들고 6칸 대청의 3면에 4분합문을 달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부엌과 광 등이 사이에 있어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지만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방과 마루로 이어져 있어 버선발로 오갈 수 있도록 지어졌다. 다만 사랑채만 마당 건너 북쪽에 별채로 자리잡고 있다.

양진당은 사랑채와 안채의 기단 양식이 다소 다르다. 사랑채 기단은 막돌 바른층 쌓기이며 안채는 막돌을 사용하도 허튼층쌓기 방식을 택했다. 사랑채의 규칙성과 안채의 융통성이 기단 양식에서 드러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사랑채의 기단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청에 오르면 다섯 단 높이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종택의 사랑채 다운 품격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행랑채의 가단은 상대적으로 낮다. 측면에서 모면 지붕이든 기단이든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게 되어 있다.

사랑채 주변으로 계자난간 툇마루를 달아 건물의 위상을 높였는데 처마 아래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은 겸암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고도 부르며, 양진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석봉이 사랑대청의 현판을 썼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졸재 류원지가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느낌을 시로 적은 ‘하회 16경’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안채는 막돌로 초석을 놓고 사랑채의 원형기둥과 달리 사각기둥을 세웠다. 그러나 전면 네 개의 기둥은 원형이다. 안방 전면에는 기둥에다 장대로 시령을 만들어 얹어서 손님 접대용 상과 광주리 등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런 실용성인 장치를 했음에도 양진당은 실용성 면에서는 떨어진다. 그것은 건물이 년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집은 실용성보다 관례가 존중되었다. 즉 실용성보다 종택의 권위를 중요시한 것으로 바로 이점이 양진당으로 하여금 하회에서 우뚝 서는 최고의 집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현재 사랑채의 대청은 학술 및 문화 단체들의 모임 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우측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의 불천위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의 불천위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 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으로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4칸이 남아 있다.

 

② 충효당(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애 생존 시의 집은 아니며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충효당은 전면에 보이는 화천과 원지산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하고 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는데 이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알려진다.

서애는 64세 때인 1605년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하였으므로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건물을 완성했다. 이후 증손자 류의하(柳宜河)가 확장했는데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솟을대문과 함께 ‘일(一)’ 자 모양의 긴 행랑채에는 대문간을 포함한 열두 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대문간 오른쪽에는 대문 출입을 지키는 소위 수위실과 광, 헛간이 제각각 한 칸씩 있고 왼쪽으로 마굿간 한 칸, 광 두 칸, 다시 마굿간 한 칸, 부엌 한 칸, 방 두 칸, 헛간 두 칸이 배치되었다. 행랑채가 독립 건물을 이루며 수위실과 두 칸의 마굿간이 별도로 있는 것을 보면 이 종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는 6칸x2칸 규모로 가운데 4칸 대청이 놓였는데 양진당 사랑채와는 달리 전면에 나와있다. 이를 중심으로 왼쪽에 2칸씩의 겹방. 우측에 작은 사랑방과 마룻방이 있다. 작은 사랑방 앞마루는 문을 달아 폐쇄하고 오히려 남쪽을 개방해 독립된 공간을 이룬다. 사랑채 주변의 앞마당은 물론 대문간채 밖의 마당까지도 여러 가지 나무들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어 경관이 일품이다.

사랑채의 구조는 익공계이며 장대석의 기단, 계자난간, 기둥 사이의 화반 수장들이 고급스럽다. 당호를 ‘충효당’이라고 한 것은 서애가 임종할 무렵에 자손이 꼭 지킬 좌우명으로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忠孝之外無事業)’는 시구절을 받든 것이다. 충효당 편액은 전서체(篆書體)로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의 글씨라고 한다.

사랑채는 ‘ㅁ' 자 모양의 안채와 붙어 있는데 통로는 방과 마루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 문이나 대청의 후원문을 이용하여 안채에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불을 때기 위한 작은 부엌과 헛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채로 가려면 반드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사랑채 기단은 간지석(間知石) 쌓기 방식에 장대석으로 마감을 하였으며 기단부의 높이도 매우 높다. 조선조 중기의 건축을 볼 때 향리의 만가에 기단을 간지석으로 쌓는 예는 거의 없다. 따라서 현재의 간지석쌓기식 기단은 보수 공사 때 고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단 위에 막돌을 사용하여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안채는 좌측 구석에 부엌을 두고 부엌 우측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커다란 안방을 만들고 그 우측에 사랑채 대청 크기로 안채 대청을 마련했다. 안채의 앞쪽으로는 찬모방에서부터 우측으로 마루, 광이 있으며 사잇문인 중문간과 헛간이 사랑채의 사랑방과 이어져 있다. 사랑방은 바깥마당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 곁에 있으므로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지켜볼 수 있어 마치 관리소 같은 느낌을 준다.

사당은 서향인 본채와 달리 남향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면에 중문과 동협문, 서협문의 삼문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삼문은 3정승 6판서와 같은 인물을 모신 공경대부의 집이 아니면 세우지 못한다. 충효당의 사당에 삼문을 낸 까닭은 이 사당에 봉안된 신위 한 분이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기 때문이다.

1999년 4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이고 전통이 살아 숨쉬며 그 정취가 남아 있는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하회마을을 방문할 때 충효당 안방으로 안내받았다. 여왕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마루에 신을 신은 채로 올라갔는데 한국에서 집안으로 들어갈 때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는 것이 한국의 생활방식이라고 하자 여왕도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서양에서는 맨발을 보이는 것이 알몸을 보이는 것 같다고 여겨 실내에서조차 신을 벗지 않는데 여왕이 충효당을 방문하여 신을 벗었다는 것은 사건 중에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여왕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발을 벗은 맨발을 보인 것은 충효당 안채에서가 처음이라고 알려진다. 충효당 대문간채 앞뜰에 여왕이 기념 식수한 구상나무 한 그루가 있다.

 

③ 화경당(북촌댁 :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하회마을은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는데 북촌댁은 북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한 후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지었다. 원래 만수당(萬壽堂)으로 이름을 불렀는데 현재는 화경당으로 불린다. 영남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 있는 99칸으로 알려지나 실제로는 72칸이다. 현재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으로 화경당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하여 각(刻)한 것이다.

대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이며 대문을 중심으로 광을 좌우에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 면 곧바로 사랑마당이고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본채이며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별당인 ‘북촌유거’이다. 북촌댁의 특징은 별당의 위치로 별당채가 독립된 사랑채의 기능을 갖도록 앞부분이 부각시켜 ‘ㅁ'자 안채 동쪽이 비스듬히 놓여있다. 북촌유거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 반 크기의 건물로 기본적으로 부엌, 방, 대청이 차례로 이어져있는 평면구조이다. 사대부 선비들이 독서를 하며 수양을 하던 별서나 서당들은 부엌-방-대청으로 이어지는 평면 구조를 했는데 북촌댁은 이러한 형식에서 더 발전하여 방들이 겹집처럼 두 줄로 배치되어 내부공간이 넓으며 대청과 누마루는 깊이가 두 칸이나 되는 큰 공간을 만들었다.

사랑채는 가운데 부엌을 중심으로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나뉜다. 안채는 6칸x2.5칸으로 깊이가 깊어졌으며 앞 툇마루가 각 방을 연결한다. 부엌․광 등 설비공간이 중대한 매우 실용적인 구성인데 이는 19세기 후반에 주로 보이는 특징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같은 몸체이면서도 서로 구조가 다르다. 사랑채는 사각기둥․납도리를 사용한데 반해 안채는 원기둥․굴도리를 사용했다. 사랑채가 안채보다 더 발달한 건축 양식을 보이는 특이한 경우다.

별당채는 다른 건물과 달리 남향이며 본채와 비스듬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집이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가까운 왼쪽에 넓은 방을 여럿 두고 같은 비중으로 사랑채에 가까운 우측에 대청을 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별당채에 출입하는 외부 남자들이 개방된 공간인 대청에 있을 경우 안채와 자연스럽게 격리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높은 지붕과 솟을대문은 양진당과 충효당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별채 뒤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치 하회마을의 물줄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하회 소나무’라고 불린다. 북촌택은 하회 마을에서 가장 책이 많은 곳이었는데 불행하게도 1,000권이 넘는 귀중한 책이 도난되었다고 한다.

 

④ 염행당(남촌댁 : 중요민속자료 제90호)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남촌댁이 위치한다. 남촌택은 양진당, 충효당, 북촌택과 더불어 하회 마을을 대표하는 4대 건축물이다. 원래 단출한 가옥이었으나 류기영이 고종 15년(1878)에 크게 확장하여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한다.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었는데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이 그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이 남아있으며 1980년 낙동강 건너에 있던 백율원에서 옮겨온 정자가 있다.

건물의 특징으로 문간채는 솟을 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낸다. 별당채는 별도로 일곽을 둘러 후원 별당의 아취가 느껴진다. 벽체의 화방담은 화경당(북촌)의 화방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식이나 과장 없이 장식하였는데, 기와쪽을 이용하여 석쇠 무늬를 바탕으로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하회마을은 건축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러 가지 양식의 집들이 시대별, 양식별로 갖추어져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뼈대 있는 집이 있고 기와집이 많이 있지만 하회마을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초가집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회마을의 초가집이 남다른 것은 초가삼간부터 제법 대문채도 갖춘 다양한 집들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초가삼간이란 삼칸 집을 의미하는데 흥미있는 것은 마루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마치 초가에는 부엌과 방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방 앞이든 뒤든 툇마루조차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이들은 마루보다 방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가집에서 나무는 크게 말하여 문짝만 보이며 기둥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데 이는 토담집을 의미한다. 초가들 가운데서도 토담집들은 한결같이 지붕이 두텁다. 이는 여름보다 겨울나기를 겨냥해서 집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머리가 닿을 듯이 처마가 낮으며 댓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단도 낮다. 문도 작은 외짝문이라 출입이 어려울 정도이다. 초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소위 초가삼간은 북촌댁 우측 만송정 가까이에 많이 배치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모두 북촌댁 소유였다고 한다.

초가집임에도 다소 큰 집이 있는데 이 경우 문간채에 마루가 딸린 방도 있어 사랑채까지 갖추어져 있다. 제법 풍족한 농가로 볼 수 있는데 하회마을에서 이런 집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양반과 매우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하회마을을 설명하려면 병산서원과 화천서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회마을의 특징 중의 하나인 교육과 학문이 어디서 어떤 규모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서당은 사사로이 설치할 수 있었으나 서원은 격이 다르다. 유림이나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원래 서원은 서당이 승격되어 발전된 교육기관으로서 교육의 기능말고도 향사의 기능까지 겸한다. 병산서원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풍산 류씨들의 후진 양성을 위해 만든 풍악서당에서 비롯되었다. 풍악서당은 고려 때부터 있던 것으로 지방 유생들을 교육해 오던 유서깊은 서당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지방에 왔을 때 이 서당에서 유생들이 면학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사패지(賜牌地)와 여러 서책들을 하사하였다. 1572년 서애 유성룡은 유래있는 서당이 큰 길가에 있어 학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한적하고 풍광이 좋은 현 장소로 옮긴 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이름도 병산서원으로 고쳤다. 병산서원의 실질적인 창건자가 유성룡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1614년 서애를 흠모한 사림(士林)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서애를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3년 ‘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철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로 조선 5대 서원으로 꼽기도 한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의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여 화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있다. 원래 병산서원은 풍악서당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풍산현에 있었으나 서애가 1572년 서당이 큰 길가에 있어 학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한적하고 풍광이 좋은 현 장소로 옮긴 것이다.

병산서원은 서원으로 한국 최고의 건축으로 꼽는 명작 중 하나다. 병산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동재, 서재, 고직사, 장판각,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등이 있다.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복례문을 들어서면 규모가 대단히 웅장하게 보이는 누각이 만대루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 모두 14칸의 대규모 면적을 자랑하는 만대루는 원형기둥과 머리 위로 높이 설치한 누마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든다. 혹자는 기둥과 지붕만 있을 뿐 텅 비어 있어 전혀 쓸모가 없는 건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심건물인 강당의 대청에 앉아서 만대루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만대루의 뼈대 사이로 앞의 낙동강이 흐르고, 건너편의 병산이 마치 7폭 병풍과 같이 펼쳐진다. 만대루의 주된 효용은 자연을 선택하고 재단하여 인간에게 의미를 전해 주는 그릇으로 작용한다.

만대루를 지나 바로 보이는 건물이 강당인 입교당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6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2칸씩 온돌방을 설치했다. 만대루와 입교당 사이의 마당 좌우에 원생들이 기거하며 수학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들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뒤에 ‘ㅁ’자 형으로 구성된 고직사가 있고 입교당 서쪽 뒤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판각이 있다. 이 장판각에 서애가 저술한 문헌들을 찍어 낸 목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내삼문으로 계단을 통해 들어가면 사당인 존덕사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 전사청이 있다.

 

2. 양동마을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하는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함께 조선왕조시대의 대표적인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반촌이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이 강물이 휘돌아가는 강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한 산마을이다. 하회는 풍산 류씨들의 단일한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두 씨족으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하회에는 동제(洞祭)의 일부로 유명한 별신굿이 전해 내려오는 반면 양동에서는 줄다리기,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등 세시행사를 벌린다.

양동마을은 하회와 같이 강이 직접 맞닿지는 않지만 주변에 형산강이 흐른다. 형산강은 신라시대에 굴연 혹은 굴연천이라 불렀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형강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자로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으로 생겼는데 산세는 경주의 재물이 형산강의 안락천에 실려 양동마을로 모두 들어오는 형상이라고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는 배산임수형인데 임신한 개가 새끼를 낳는 형상으로 땅의 기운이 물(勿)자 어깨 부분에 모두 응집된다고 한다. 물(勿)자형 양동마을은 풍수지리상 문자형 명당 마을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이다.

마을은 내곡, 물봉골, 거림, 장터골을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물(勿)자 능선을 중심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능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낮고 북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데 각 능선과 그 사이의 진입로가 있는 골짜기들은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즉 마을의 진입로 쪽이 경사가 급한 산으로 시선이 차단되어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설창산(雪倉山)이 마을의 뒷 배경으로 겨울철의 바람도 막아준다.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여 기나 되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까지 오씨와 장씨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양동마을이 현재와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여주이씨 경주파)가 조선 초 혼인을 통해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부터이다.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의하면 양동에는 고려 말 여강이씨 이광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자 사위가 된 풍덕 유씨인 유복하가 처가를 따라 마을에 정착했다. 이어서 15세기 중반 손소(孫昭, 1433~1484)가 유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양동에 자리잡는다. 이를 ‘처가입향’이라 한다. 손소는 단종 원년 생원․진사시를 거쳐 세조 5년(1459)과 9년에 각각 문과와 문예시에 장원하였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되었으며 계천군으로 봉해졌는데 계천군이란 양동마을 앞으로 흐르는 실개천의 이름이라 한다. 성종 7년(1476)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망했는데 왕으로부터 양민(襄敏)이란 시호를 받았고 불천위에 오른다.

원래 손소 집안의 양동 정착은 혼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손소의 딸이 여주이씨 이번(李蕃)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조선시대 유학자 회재 이언적(晦齎 李彦迪, 1491∼1553)이다. 이언적 집안은 본래 경기도 여주의 토성이족이었으나 고려 말에 영일지방에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이번(李蕃)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양동에 정착했는데 이언적이 외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결국 영남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양동마을 형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말은 양동은 ‘외손 마을’이라는 이야기다. 마을 형성기에 이광호-유복하-손소-이번 등으로 이어지면서 친손 아닌 외손들이 번성했던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아직도 유효하여 요즘도 양동처녀라면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두 가문은 경주의 읍지를 편찬하고 향촌 내 주요 사족의 명부인 향안(鄕案)의 작성을 주도했다. 아울러 향교와 원사를 출입하면서 향촌사회를 영도하고 지방유림을 조직․동원하기도 했는데 특히 옥산․서악․동강서원을 중심으로 경주권의 유림을 대표하여 영남의 여러 지역 향교나 서원등과 연합하기도 했다. 손씨와 이씨 집안은 지금까지도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데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하회 마을의 경우 원래 살았던 허씨와 안씨는 사라졌지만, 양동 마을은 처음 살기 시작한 성씨와 사위로 들어온 성씨가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양동 마을이 유일하다고 알려진다.

 

<양동마을의 건축>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양동마을은 여러 작은 골짜기가 나란히 흐르는 물(勿)자 모양의 지세다. 양동마을은 특히 구릉 등과 같은 지세(地勢)를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활용한 건물 배치가 두드러져 고건축물의 보고로도 불린다.

두 문중 내에서의 위계 또한 마을의 공간 구성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했다. 대체로 한 골짜기의 가장 높은 곳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터를 잡고 있으며 그밖의 지손(支孫)들의 주택은 그 아래 기슭에 잡았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자손들의 주택이 종가 건물보다 규모가 작다. 17세기 말에는 600〜700채나 되어 우리나라에 있던 성씨 집성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고 알려진다. 양동마을의 이런 위치는 계속되어 1979년의 조사에 따르면 151가구 295채로 줄어들었지만 이 역시 한국의 전통마을의 거의 전부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마을 내 상류주택은 30여 호 정도 되며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꾸준히 전통을 이으면서 건설하여 몇세기 동안 변천하는 양상을 알 수 있고 또 나름대로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초기 건물인 '통말집(ㅁ자집)‘이 보이며 이어서 ’반말집(튼ㅁ자집)'이 주류를 잇는데 이는 ‘뜰집’ 등 ‘ㅁ’자집이 대부분인 안동지방의 상류주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조선 후대로 내려올수록 사대부주택의 성격보다는 부농주택으로서의 성격을 짙게 내포시켰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에 양반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낮은 지대의 길가에는 예외없이 모두 일반 민가가 위치하며 높이 올라갈수록 상류주택이 위치해 가옥 입지에서도 계급의 위계가 확연하다. 또한 중요한 상류 주택 앞에는 가람집이라는 외거노비들의 집이 있어 계급성을 또다시 확인시킨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손씨 18호, 이씨 78호, 다른 성씨 30여 호로 약 130호가 있다고 알려지며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으며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양동마을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보물로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 지은 향단(香壇·보물 제12호), 조선 전기 청백리 손중돈의 옛집인 관가정(보물 제442호), 이언적의 종가인 무첨당(보물 제411호) 등이 있고 15세기에 창건된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을 비롯하여 1504년에 건립된 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 사호당고택(중묘민속자료 제74호), 상춘헌고택(중요민속자료 제75호), 근암고택(중요민속자료 제76호), 두곡고택(중요민속자료 제77호), 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 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 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 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 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등 고건축물이 현존하여 단일 마을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 건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제76호, 제77호는 3채가 나란히 위치해 시대적 변화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

① 관가정(觀稼亭 : 보물 제442호)

관가정은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이 서백당에서 분가하여 살았던 집으로 서백당보다 늦은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적으로 지맥이 흘러드는 위치인데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는데 안채의 동북쪽에는 입향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건물은 사각기둥을 세운 간소한 모습이지만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이다. 이곳에서 앞을 보면 마을의 전경이 다 보여 양동마을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하나이다.

대문의 우측에는 온돌방․부엌․작은방 등이 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 건물은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와 있다. 건물 기둥 밑에 약간의 홈을 좌우로 파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둥이 빨리 썩지 말라고 한 것으로 비바람이 치면 빨리 건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정자처럼 난간을 두른 것을 계자각 난간이라고 하는데 다듬은 모양의 닭의 벼슬 모양과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 만약 앞이 막혀 있으면 평난간을 설치하며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 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안채로 들어가면 부엌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이 있고 부엌 위쪽에는 작은 대청 2칸과 방 2칸, 꺾여서 큰 대청이 있다. 종가 건물이므로 제례 의식을 많이 치루기 위한 용도로 대청마루가 크다. 안채의 기둥은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는데 사랑채의 경우 둥근 기둥을 사용한 것과 대조적이다. 조선시대에 둥근 기둥을 아무나 사용하지 못했다. 왕이 살던 궁궐, 공자를 모신 대성전, 사찰, 관공서 건물 등에는 둥근 기둥이 사용된 반면 일반 가옥은 네모난 기둥이 대부분이다. 관가정 안채의 기둥이 네모인 것은 사사로운 영역이기 때문에 철저한 유교 관념에 따른 것으로 인식한다.

행랑채(엄밀하게 보면 작은 사랑채)는 2칸부엌을 중심으로 3개의 방을 배치했지만 외관상으로는 4칸에 동일한 창호를 달아 구별되지 않는다. 이 집의 구조는 익공계지만 대들보를 직선재로 하지 않고 자연스런 곡선재를 사용해 대공없이 바로 종도리를 받는 특징적 구조다. 사당 건물은 단청이 칠해진 맞배지붕이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 증조,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신다. 사당이 없는 집은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다. 각 신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 앞에 놓는다. 생활공간과 사당으로 구성된 관가정은 전체적으로 격식을 갖춘 주택이므로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② 무첨당(無忝堂 :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의 부친인 이번(李番)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가집이다.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이다. 보통 별당은 살림채 안쪽 외부인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기 마련인데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보다는 큰사랑채 격이다. 그러므로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도 인식하는데 손님 접대나 쉼터, 독서 등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무첨당은 이언적의 맏손자 이의윤의 호로 조상에게 즉 나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는 뜻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자 형인데 서쪽의 꺾임부에 방을 배치하고 동쪽으로 대청 3칸과 방 2칸을 연결하여 정면 6칸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꺾임부에서 남쪽으로 누마루 2칸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정면과 주요 공간에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함께 사용했다. 우측 끝 반칸에 마룻방을 달아 고방으로 이용하며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부섭지붕으로 전체적으로 합각지붕과 같아 보인다. 구조는 초익공계로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청 대들보 위에 포대공(包臺工)이 있어 종도리를 받고 있음도 주목할 만 하다. 기둥 상부의 공포는 물론 난간도 계자난간을 돋보이게 장식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등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보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해서 튼 ‘ㅁ’자이며 안채는 중문을 통하거나 부엌 쪽으로 난 문을 통해 외부 공간으로 출입할 수 있다. 건물의 중심에 무첨당, 우측 방 입구 위에는 흥선대원군의 글씨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죽필 글씨의 편액이 있다. 좌해금서는 영남 지방의 풍류와 학문을 뜻한다. 안채 지붕에 바위솔, 일명 와송(瓦松)이 자라고 있는데 오래된 지붕 기와 위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바위솔은 해열, 지혈 등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뒤편 언 위에 사당이 있다.

 

③ 향단(香壇 : 보물 제412호)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로 이언적이 1543년경에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중종 왕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어 준 집이다.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 자신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모시던 동생 이언괄에게 지어준 살림집이라는 설도 있다.

향단은 매우 큰 건물로 원래 99칸의 건물인데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 51칸 또는 56칸으로 줄여져 약 70평의 건평을 갖고 있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일반 상류주책과는 다른 ‘월(月)’자형이고 ‘일(一)’자형의 행랑채와 칸막이를 두어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해와 달이 함께 있는 부귀공명사상에 기인한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향단 건물의 내부는 한마디로 폐쇄적인 미로와 같은 구조로 일반 상류주택과는 많이 다른 특이한 평면구성을 갖고 있다. 밖에서 보면 화려한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마당이 5미터x5미터에 지나지 않아 답답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의 기다란 맞배집으로 양쪽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행랑체인데도 원형기둥을 사용했다. 행랑채 협문을 통해서만 사랑채로 연결되는데 특히 안대청이 중정 쪽으로 향하지 않고 행랑채 지붕을 보도록 계획한 것은 유례없는 구성으로 안마당과의 기능적 관계보다는 전망을 중시한 의도로 보인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형태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는 온돌방을 배치했다. 안채는 2개의 안방이 안대청 모서리를 두고 꺾여 접합되어 있어 모서리끼리 만나고 있으며 각 방의 서쪽에 부엌이 딸려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아래층은 헛간 모양으로 흙바닥이지만 그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정면에는 벽체 대신 가는 살대를 촘촘히 세우고 있어 여느 주택과는 다른 모습이다.

큰 틀에서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대부들이 지향하던 검박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과시적 입지,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3개의 박공면 혹은 합각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등 특이한 표현적인 외관, 주택의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변형한 대담성, 특히 행랑채마저 둥근 기둥을 사용하는 고급스러움 등은 일반 사대부 집으로는 유례가 드문 예로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 번쯤 들러보아야 할 곳으로 추천된다. 2008년 방송된 드라마 「가문의 영광」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양동마을은 고건축물로도 유명하지만 또 다른 자랑으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족보와 풍부한 문헌자료가 있다. 금속활자본 『통감속편』은 국보 제283호이며 손씨 문중이 소장한 「손소영정」은 보물 제1216호이다.

『통감속편』은 경자자본(서․목록․서례는 계미자)으로 인쇄된 24권 6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중국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단종이 왕세자 시절 공부하던 자선당(資善堂) 전적에만 찍던 집희경지(緝熙敬止)라는 도장이 권수(卷首)와 서문 등 5개 처에 찍혀 있다.

1995년 보물 제1216호로 지정된 「손소영정」은 1폭(105×160cm) 견본채색으로 성종 7년(1476) 도화서 화원이 그렸다. 1467년 손소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성종이 직접 하사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려진 것은 그로부터 11년이 경과한 후이다.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선 초기 초상이 많지 않아 한국 공신도상 및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서쪽에 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데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됐다.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은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창건된 해는 선조5년(1572년)으로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은 안강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 아래에 사당을 세웠으며,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선조7년(1574)에 ‘옥산’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최초 사액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헌종 4년(1838)에 구인당이 화재를 입어 다시 사액을 받으니 현전하는 것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양식은 전면에 강학처(講學處)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이다. 서원의 공간구성은 무변루가 중심이 되는 진입부, 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강학부, 사당이 중심이 되는 제향부 및 부속사 등 4개 영역으로 구분된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體仁廟)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구인당 후측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체인묘와 제기실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중심부 남측에는 부대시설인 고직사(庫直舍)·판각(板閣) 등이 있으며, 담장 밖으로 남측에 경각, 북측에 신도비각이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타난다. 역락문은 『논어』의 「학이조(學而條)」에 나오는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뜻을 취한 것이다.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원래는 납청루(納圊樓)라 이름 붙였으나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스승의 유허에 맞지 않다고 하여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집으로, 1층의 어간(御間)은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이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둘레에는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러 개방하였다. 구조는 초익공식으로 오량가구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누각건물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므로 벽변을 개방하고 외부의 경관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 점에서 보면 무변루는 예외적이다. 양 옆에 누마루가 있지만 중간이 온돌방으로 막혀 대청과 누마루 모두 개방이 제한적인데 이와 같이 건설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하튼 무변루는 구인당과 같이 모두 원형기둥이며 구조가 특이해서 가적지붕의 예로도 인용된다.

2007년 10월에 회재선생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는데 보관된 유물로는 필연, 연수병, 관대, 사모, 마상배, 관영, 옥적, 직인, 유서통, 옥관자, 금관자, 옥죽 2본과 『회재선생문집』외 1,000여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언적 수필고본은 1975년에 보물 제586호,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책은 1970년에 보물 제525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또한 현재까지 발견된 활자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1책은 보물 제524호로,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석각하여 탁본한 『해동명적』 2책은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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