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 유적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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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 유적 지구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9.01.0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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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 유적 지구

왕 연 중(한국발명교육학회 상임고문)

들어가면서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백제역사 유적 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공산성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 과 부소산성능산리 고분군정림사지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미륵사지)이다.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로 달려가 백제역사 유적 지구는 물론 주변 유적에서 백제인의 지혜를 살펴보았다.

 

1. 백제(伯濟)는 어떤 나라였는가?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지금의 한강 유역 위례성에 건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지’ ‘동이전’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우선, 영역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기원전 1세기 초에 백제 온조왕이 전라북도 고부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마한(馬韓) 54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처럼 두 기록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 및 영역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결론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즉, 백제는 기원전 18년 위례성에 나라를 세운 온조왕부터 서기 660년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678년 동안 눈부신 문화를 발전시키며 동북아 문화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해상강국이었다.

 

2. 공주시의 유적 지구를 찾아가 본다

공주시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宋山里 古墳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더불어 공주시내 권역, 인근 계룡산 권역, 동북부 권역의 과학문화 유적도 찾아가 보고, 관련 축제도 알아보았다.

1) ‘공산성’은 어떤 곳인가?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성, 공산성은 백제의 시대의 왕성으로 금강에 접한 110m 높이의 공산에 능선과 계곡을 포함해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이 성은 백제 22대 문주왕이 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 한 뒤, 성왕 때인 538년에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왕이 거주했을 것으로 알려진 성이다.

성의 이름은 백제 시대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었다.

이 성은 백제 시대에 토성(土城)으로 축조된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을 거쳐서 현재는 동쪽의 일부만이 토성이고, 대부분은 석성(石城)이다.

성의 둘레는 2,660m인 장방형이고,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이 있다.

성내에는 추정 왕궁지, 임류각지와 같은 백제 유적을 비롯해 쌍수정, 영은사 등 조선시대의 유적들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특히 2011년에는 연도가 새겨진(645년) 백제시대의 갑옷과 마갑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공산성은 백제의 도성이자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다양한 과학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비단결 같은 금강을 감아 휘도는 고풍스러운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1,500년 전 고대 백제의 멋진 향취가 가슴 속 깊이 전해져 온다.

공산성은 보통사람의 경우 약 1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공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쪽에는 영동루, 서쪽에는 금서루, 남쪽에는 진남루, 북쪽에는 공북루가 있다.

동쪽의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 밑 부분의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는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2층 3칸 건물)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서쪽의 금서루는 공산성의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있는 문루(門樓)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1993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6~8월 혹서기 제외),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간,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하는 ‘웅진성 수문병 근무 교대식’과 다양한 백제 문화 체험행사가 금서루 일원에서 열린다.

남쪽의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며, 시내에서 공산성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다.

높은 석축기단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조선 초기, 공산성이 석성(石城)으로 개축되던 시기에 세워진 문루(門樓)로, 조선 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으로 통했던 곳이다.

북쪽의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루(門樓)로 조선 선조 36년(1603년) 옛 터에 다시 지어 공북루라 불렀다.

성문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있어 문루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멋스럽다. 송시열이 쓴 ‘중수문’을 비롯해 여러 글귀가 곳곳에 걸려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쌍수정, 임루각, 영은사도 성내에 있다.

쌍수정은 조선 인조가 이괄(李适)의 반란(1624년)을 피해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조는 난이 평정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에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곳을 쌍수산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조 10년(1734년)에 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지어진 누각으로 신하들과의 연회장소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궁궐의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었으며,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영은사는 조선 세조 4년(1458년)에 창건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훈련소로 사용된 장소다. 금산 전투를 치른 승병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광해군 때는 영은사에 승장(僧將)을 두어 8도의 사찰을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2) ‘송산리 고분군’은 어떤 곳인가?

공주시 중심지에서 서북방으로 약 1㎞ 정도의 위치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위치는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있다. 이곳에는 현재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동북쪽에 1~4호분이 자리하고 있고, 5호분과 6호분은 무열왕릉과 인접해 있다.

무덤형태는 1~5호분은 굴식 무덤이고, 6호분과 무열왕릉은 터널형의 벽돌무덤이다.

(1) ‘무령왕’은 누구이고, ‘무령왕릉’은 어떤 곳인가?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으로 이름은 사마(斯摩) 또는 융(隆)이고,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22년의 재위기간 동안 민생안정과 백제의 국력을 신장시켜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

1500년 전 백제의 숨결이 느껴지는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으로, 무열왕과 왕비의 능, 즉 합장이다. 이 능은 1971년 여름 장마철에 5호분과 6호분의 내부에 스며드는 물기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08종 4,600여점인데, 유물 또한 매우 우수하여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특히 내부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왕의 무덤 중 유일하게 피장자와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연구의 편년 자료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 또한 백제의 문화, 국제교류, 백제사 연구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이 고분군은 1997년부터 고분 보존 차원에서 내부 관람이 중지되어 관람객들은 웅진백제역사관과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통해 웅진 백제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역사 이야기를 비롯해 재현한 고분 내부를 볼 수 있고, 발굴과정과 무열왕 체험 영상 관람 등 다양한 코너가 있다.

무령왕릉 대표유물은 다음과 같다.

⚫무령왕 금제관식(武寧王金製冠飾) -국보 제154호

금으로 만들어진 왕관 장식으로, 왕의 머리 부분에서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 무늬와 불꽃무늬를 기본 문양으로 맞새김질 했다.

불꽃이 중앙으로 모인 형태로, 올라가면서 타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하다.

⚫무령왕비 금제관식(武寧王妃金製冠飾) -국보 제155호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으며, 왕의 것과 마찬가지로 인동당초무늬와 불꽃 무늬 장식을 맞새김질했다. 좌우 대칭구도로 되어 있다는 점과 둥근 달개가 매달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이며, 왕의 관장식 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 석수(武寧王陵石獸) -국보 제162호

돌로 된 동물상으로, 무덤 수호를 위해 만들어졌다. 무령왕릉 석수(武寧王陵石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석수로, 머리에는 쇠로 만든 뿔이 하나 있고, 몸뚱이 양측 면에는 불꽃같은 날개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지석(武寧王陵誌石) -국보 제 163호

지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일대기를 기록한 돌 판을 말한다. 무령왕릉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는 유일하게 발견되었는데, 연도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름과 사망일, 안장한 날짜 등이 새겨져 있고, 토왕·토백·토 부모에게 땅을 사서 왕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2) 무령왕릉 권역의 볼거리는?

무령왕릉 권역에 가면 국립공주박물관과 공주한옥 마을을 등이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백제 시대의 문화를 주제로 하는 테마박물관인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의 모든 출토품을 전시하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문화재 외에도, 구석기시대부터 마한과 백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고 있다.

공주한옥 마을은 한국 전통난방인 구들장 체험이 가능한 시설로 설계되었고, 친환경 건축양식인 소나무·삼나무 집성재를 사용하였다. 도시·현대인들이 머물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된 신식 한옥으로, 가족여행, 수학여행, 기관·단체의 워크숍 등이 가능하다.

2010년 9월 문을 열었으며, 6동/37실의 단체동과 13동 26실의 개별 동을 갖추었다. 부대시설로는 오토캠핑장 4대와 야외취사장 9곳, 다목적실이 있다.

 

3) 기타

공주시에 가면 시내 권역, 인근 계룡산 권역, 동북부 권역, 관련 축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내 권역에는 충남역사 박물관과 우금치 전적지 등이 있다. 충남역사 박물관에는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 시기까지의 역사 자료와 생활 민속품 5만5천여 점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도자기 공예 교실, 방과 후 전통 놀이 등 문화 행사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우금치 전적지에는 우금치는 동학 혁명군 최후의 격전지다. 1894년 공주의 남쪽관문인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약 10만 명을 자랑하던 동학군은 겨우 1천여 명만이 살아남는 참패를 당하고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민족사적 운동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을 기리기 위해 1973년 동학 혁명군위령탑이

세워졌다. 인근 계룡산 권역에는 계룡산, 남매탑, 갑사, 동학사, 신원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계룡산은 무학대사가 산의 능선을 보고 ‘금 닭이 알을 품고,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계룡산(鷄龍山)이라 이름 지어졌다.

해발 845.1m의 천왕봉을 중심으로 관음봉, 연천봉, 삼불봉 등 28개의 봉우리와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천년 고찰들이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서도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히며, ‘정감록(鄭鑑錄)’에 의하면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고 전해진다.

남매탑은 동학사와 갑사의 중간지점인 옛 청량사 터에 있는 두 개의 탑이다. 각각 5층과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량사지쌍탑’ 또는 ‘오누이탑’이라고도 불린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청량사 전각은 모두 소실되었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갑사는 통일신라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인 명찰로, 420년에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 주위에는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지대 등 수려한 명승이 줄지어 있어 갑사구곡(甲寺九曲)이라 불린다. 국보 제298호 갑사 삼신불괘불탱화, 보물 제256호 갑사 철당간 및 지주, 제257호 갑사부도, 제478호 갑사동종 등의 유물이 있다.

동학사는 동학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회의화상이 창건한 절로, 갑사, 신원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는 3대 사찰로 손꼽힌다. 현재는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비구니들의 수행사찰 역할을 하고 있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백제의 역대 왕들과 의자왕의 아들인 풍, 융의 신위를 모신 ‘고왕암(古王庵)’을 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계룡산에 왔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계룡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보물 제1293호인 중악단이 있다.

북동부 권역에는 공주석장리 박물관과 공주민속극박물관 등이 있다.

공주석장리 박물관은 선사시대의 자연·인류·생활·문화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선사시대 유물 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박물관으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해 전시하고 있으며, 선사시대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관, 선사공원, 체험 공간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1시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공주민속극박물관은 민속연극용 인형, 가면(탈), 전통악기, 무속자료, 각종 연희에 사용되는 소도구, 서적 등을 전시해 놓은 전문박물관으로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설립하였다. 전시실로는 민속극자료관, 농기구자료관 등이 있으며 인형극 교실과 종이공예교실과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관련 축제로는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과 계룡산 산신제 등이 있다.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제작된 의상과 소품을 이용해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하는 행사다. 4월부터 10월까지, 공산성 서쪽의 금서루에서 매주 토·일요일(혹서기 제외)에 근무 교대식이 이루어지며, 다양한 백제 문화 체험 행사도 함께 열린다.

계룡산 산신제는 매년 4월 신원사 일원에서 열리는 산악신앙 축제이자 마을 제사 행사이다. 무(巫), 불(佛), 유(儒)의 다종교 공존의 축제인 계룡산 산신제는 조화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의 심성과 정서를 반영한 전통적이고 특색 있는 향토축제이다.

 

3. 부여군의 유적 지구를 찾아가 본다

부여군은 사비성(泗沘城)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官北里遺蹟)과 부소산성(扶蘇山城), 능산리 고분군(陵山里古墳群), 정림사지(定林寺址), 부여 나성(扶餘羅城) 중심으로 살펴보고, 궁남지, 무량사, 대조사, 국립부여박물관, 송국리 유적, 서동요 테마파크 등도 찾아가 보고, 관련 축제도 알아보았다.

1)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성 어떤 곳인가?

(1) 관북리 유적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泗沘)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여읍내의 북쪽에 있는 부소산의 남쪽 및 서쪽 기슭 일대에 위치한다.

 

(관북리 유적)

1982∼1992년에 걸친 충남대학교박물관의 조사와 2001∼2008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이 일부 확인되었다. 

1983년 9월에 충청남도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었다. 이후 왕궁지로서, 이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2001년 2월 5일에 사적 제428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1982년 이래의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 건설과 확장을 위해 조성한 성토(盛土) 대지와 그 위에 만들어진 대형 전각건물 등 기와로 기단을 꾸민〔瓦積基壇〕건물터, 남북·동서방향의 도로, 축대 및 배수로, 목곽수조(木槨水槽) 및 기와 배수관, 연지(蓮池),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대지 조성 이전에 왕실 수공업 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철기, 금 및 금동제품 제작소 등 공방(工房)시설과 함께 나무와 돌로 구축한 지하곳간이 밀접한 저장시설단지 등도 확인되었다.

이처럼 공방시설이나 창고시설이 폐기되고 정연한 배치의 도로, 기와기단건물, 연못 등으로 대체된 시기는 성토층 속에 포함된 중국 자기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사비도성의 점진적 확대에 따른 궁성 중심 권역의 확장과 관련될 개연성이 높다.

그 동안 관북리 유적에서는 금동광배, 도가니, 다양한 목제품과 목간, 수부(首府)명 기와, 각종 인장와(印章瓦), 연화문 수막새, 사람얼굴이 그려지거나 찍힌 토기, 중국제 자기, 과일씨앗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왕궁의 존재와 관련하여 7칸×4칸으로 동서 길이 35m, 남북 길이 18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터가 주목된다. 이 건물은 기와 파편을 다량 섞어 흙을 다지며 터를 돋은 후에 초석이 놓일 자리에 흙을 겹겹이 다져 쌓은 한 변 2.4m 안팎인 방형의 적심 시설을 총 36개나 만들었다. 이와 거의 똑 같은 규모와 형태의 건물이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확인되었는데, 4단으로 구획된 전각구역(殿閣區域) 중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중심 건물이다.

이 외에 수부명 기와도 부여 관북리 유적과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서로 성격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만 발굴 조사된 부여 관북리 유적의 구조는 이미 조사가 거의 완료된 익산 왕궁리 유적의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건물과 유물을 통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부소산 기슭이 왕궁의 일부였음은 분명하지만 정전(正殿) 등이 위치한 중심구역과 왕궁의 전체적인 범위는 추정에 머물고 있다.

(2) 부소산성

백제도성의 중심 성으로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이었으며, 전쟁 시에는 최후 방어성으로 이용 되었다. 

산성 안에는 군창지·낙화암·고란사·영일루·사자루 등이 있으며, 고대 중국·일본과 교역로 역할을 하였던 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흐른다.

군창지는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군수물자 창고 유적지로서,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에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도 이 군창지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쌀·보리·콩 등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비성이 함락될 때의 비극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무너지던 날(660년) 백제의 여인들이 충절과 굳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따라서 망국의 회한을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하는 장소이다.

고란사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 절벽에 위치한 규모가 작은 사찰로 법당 뒤에는 고란초와 고란약수가 있다. 약효가 뛰어난 고란약수를 즐겨 마신 백제 임금은 항상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를 띄워오게 하여 고란약수임을 확인하였다 한다.

영일루는 부여읍 쌍봉리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조선시대 홍산현(鴻山縣) 관아 입구에 있던 것을 1964년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도성(泗沘都城)의 비원이던 부소산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 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으며, 서쪽 산정에는 임금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送月臺, 일명 迎月臺)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정동리 일대의 광활한 평야와 청산성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사자루는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백마강은 비단결 강물이 흐른다 하여 이름 지어진 금강은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 이르러 비로서 백마강으로 불리 운다.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란 뜻이다. 

  

2) '능산리 고분군'는 어떤 곳인가? 

백제의 왕릉으로, 부여읍 능산리 산15번지에 위치한 해발 121mdml 능산리 산의 중턱에 있는 돌무덤들로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부여 나성과 인접한 곳으로 공주 구읍지에 보면 ‘관아동십리허유왕릉(官衙東十里許有王陵), 부여 관아에서 동으로 10리쯤에 왕릉이 있다.)’이라 하였다.

백제왕릉원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무리를 이루어 모두 3군 16기로 분포되어 있는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은 중앙의 전(傳) 왕릉군 7기이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 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어 백제 후기 사비시대의 묘제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위치와 규모롤 보아 왕과 왕족, 그리고 상류층의 분묘로 추정된다.

봉긋한 원형의 봉토분 모양의 7기 고분 중 동하총(東下塚)인 1호분에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마찬가지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교류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또한 백제 왕실의 원찰로 추정되는 능산리 절터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발견되었다.

  

3) ‘정림사지’는 어떤 곳인가?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절터로서, 세련된 멋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 유적으로 백제 사비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져 왕실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곳이다.

(정림사지)

백제 때 창건하였으며,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어, 그 자세한 유래 등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곳에서 1942년 발견된 고려시대 암기와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라고 씌어 있어 정림사임을 알게 되었다.

백제문화권 정비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가람터를 정비하여 오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역사를 정리하면, 6C 창건, 660년 7월 백제 멸망으로 소실, 660년 8월 오층석탑 탑신부에 당 소정방의 승전기 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김, 1028년 정림사 중건, 1942년 1차 발굴조사 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기와 출토, 1962년 정림사지 5층 석탑 국보 제9호 지정, 1963년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108호 지정, 1979~1984년 4차에 걸쳐 발굴조사 실시, 1983년 구가사적 제301호 지정, 2008년 8차 발굴조사, 2010년 9차 발굴조사, 2011년 10차 발굴조사 등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제 9호)은 정림사 절터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높이가 8.33미터의 결코 작지 않은 탑으로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민흘림 기법을 적용하여 상승감을 보여주는 등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육중하면서 단아한 세련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계 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 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어올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인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다.

신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대당평백제국비명)‘이란 글씨를 새겨놓아 한동안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정림사지 박물관은 백제 사비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하고자 건립되었다.

백제시대의 불교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불교문화관과 정림사가 갖는 의의와 가치를 역사적, 미술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정림사지관 등 전시관이 있으며, 석제문양 퍼즐 맞추기, 유물조각 맞추기, 문양 찍어보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4) ‘부여나성’ 어떤 곳인가? 

둘레 약 84㎞. 사적 제58호. 면적 63만4056㎡.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다. 

 

(부여나성)

이 나성은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이며, 축성 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벽은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동문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청산성 동쪽으로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동쪽으로 논산으로 왕래하는 동문지와 공주로 통하는 동북문지가 있다. 동문지 부근의 나성 단면을 조사한 결과 저변 13m, 상변 4m, 높이 5.2m이며 황토질흙으로 토축되어 있다. 

이곳에서 서쪽 약 300m 지점에 1978년 상수도사업으로 나성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저변 13m, 상변 2m, 높이 5.2m의 토축이었으며, 진흙으로 다져서 만든 판축(版築)의 흔적이 있다. 표고 121m의 가장 높은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린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나성의 끝부분은 적심석(積心石)을 넣고 축조한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현재 유스호스텔을 거쳐 관북리·구교리·유수지(遊水池)·동남리·군수리·성말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나성문지는 구아리로 통하는 서북문지와 장승배기 남쪽에서 규암으로 통하는 서문지가 있다. 

남쪽 나성은 동리·중리·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주초석과 문초석이 남아 있다.

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수비를 위한 방위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중부·전부·하부·후부의 오부제도(五部制度)를 두고 다스렸다. 전체적인 구조상 남쪽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또 수로도 파 놓아서, 이 나성은 자연적인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서 周書’에 따르면, 도성 안에는 민가가 있었으며, 방(方)마다 500인씩 총 2,500인의 군대로 방위에 임하였다 한다. 나성이 완성되고 오부제가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 때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왕도의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5) 기타 

부여군에 가면 궁남지, 무량사, 대조사, 국립부여박물관, 송국리 유적, 서동요 테마파크, 관련 축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공정원으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정원으로 '삼국유사'에 “무왕 35년(서기 634년),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의 노자공은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정원 조경기술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연꽃이 만발한 7월 말이면 형형색색의 천만송이 연꽃을 주제로 한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

무량사는 천년고찰 무량사는 셀 수 없는 무량의 도를 닦는 곳으로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극락전은 외관은 2층 구조이나 내부는 위아래가 트여 있는 이른바 통층 구조이며, 사찰 내에는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미륵불괘불탱(보물 제 1265호)과 김시습초상(보물 제1497호)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대조사는 황금새가 내려와 미륵보살로 화현한 미륵도량으로,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성흥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사비시기 수도 부여에 위치하며 당시의 문화재를 연구, 조사하고 전시 교육하는 백제전문박물관이다. 

백제금동대향로 등 국보 3점, 보물 5점 등 총 32,0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약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매년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는 특별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청동기시대 특징은 쌀농사와 마을 형성인 바, 그것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곳이 송국리 유적이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네모꼴인 것이 있는데, ‘송국리 형집자리’에서는 무문토기와 홍도, 흑도 등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송국리형 토기’와 ‘비파형 청동검·돌칼·돌화살촉 등 의 유물은 기원전 7세기~6세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서동요 테마파크는 백제무왕(서동)과 선화공주와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극화한 SBS 드라마 ‘서동요’ 와 계백 장군을 새롭게 조명한 MBC특별기획드라마 「계백」등 역사 드라마의 촬영지였으며, 인근 천혜의 자연생태 저수지와 어우러진 테마공원 관광지이다.

부여축제는 백제문화제와 부여서동 연꽃 축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축제는 백제 제26대 성왕이 서기 538년 봄 백제중흥의 웅지를 펼치기 위하여 문무백관과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공주 웅진성에서 부여사비성으로 천도하는 과정과 모습을 주민, 학생 등 2천여명이 참여하여 재현하는 사비성 천도행렬, 천도 사실을 역대 왕과 천지신명께 알리는 제례의식인 정도고유제 등 전국에서 유일하게 부여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역사문화 축제이다.

부여서동 연꽃 축제는 2012년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유망축제로 지정되었으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전국제일의 생태관광지로서 최고(最高)의 인공정원인 궁남지 일원 38만여m²의 면적에 오가하스연, 가시연, 빅토리아연, 홍련, 백련, 황금련, 수련, 왜개연 등 50여종의 연이 피는 서동공원 연꽃 단지에서 개최한다.

  

5. 익산시의 유적 지구를 찾아가 본다

익산시는 마한 백제 역사유적의 도시이며, 백제왕궁터, 미륵사지 등 사적 유물이 많다. 1344년 익주, 1413녀 익산군,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의 통합으로 익산시로 출범하였다.

사비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시는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과 미륵사지(彌勒寺址)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더불어 익산 쌍릉(사적 제57호), 입점리 고분 전시관, 숭림사 등도 찾아가 보고, 관련 축제도 알아보았다.

  

1)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이란 어떤 곳인가?

왕궁리 유적은 백제시대 궁성유적 이었으며, 이후 사찰로 변화되어 현재는 왕궁리 5층 석탑이 있다. 왕궁리 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 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2)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란 어떤 곳인가?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익산토성과 쌍릉이 위치한 곳)에 홀어머니와 마를 캐며 살던 마동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이 젊은이는 후에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을 하고 백제의 왕이 된다. 바로 백제 30대왕인 무왕(AD. 600~641)이다. 

왕이 된 무왕은 왕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 가던 중 신기한 일을 경험한다. 연못 속에서 세 명의 미륵부처가 나타난 것이다. 

미륵부처의 출현에 놀란 왕비는 무왕에게 세 명의 미륵부처를 위한 절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이 청에 의해 만들어진 절이 전·탑·낭무를 갖춘 미륵사다.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과 공예 등 최고의 기술이 발휘되었으며 신라 진평왕 까지도 기술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보물 제236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753호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문화재 자료 제143호 익산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이 있다.

 

(1)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석탑(14.24m)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석탑이다.

미륵사지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에 한국석탑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또한 우리는 이 석탑을 통해 당시 백제인의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운 탑신을 쌓았으며 기둥은 밑이 넓고 위가 좁아 안정감이 있다. 1층에는 사방으로 출입구를 내었고 내부의 중앙에는 중심기둥이 탑신 전체를 받치고 있다. 탑의 기둥, 벽면, 처마, 지붕 등의 전체적인 형식과 외형적인 모습은 목조건축물과 비슷하여 지붕은 평탄하고 끝에서는 곡선을 이루면서 살짝 위로 들려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원래는 사각형태의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 되지만 현재는 6층까지 남아있으며 1999년 해체 보수 정비가 결정되었으며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2)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 장엄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석탑을 해체하여 조사하던 중 내부의 중심기둥(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에서 사리 내호와 외호, 사리 봉안기 등 19종 4,9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원형합(6점)에서는 금제고리, 진주, 곡옷 등 4,800여점의 유물이 추가로 발견되어 사리장엄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9,700여점에 이르고 있다.

금으로 만들어진 사리봉안기(가로 15.5m, 세로 10.5cm)에는 백제의 왕비가 재물을 바쳐 이곳에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를 봉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미륵사지의 창건배경과 목적 등을 이해하고 백제 무왕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3)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은 1997년 개관이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 보관하고 있으며 학술적 연구를 통해 지역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현재 전시관에 소장된 유물은 19,363여점에 이르며 각 시대별로 전시, 보관하고 있다.

또한 사회교육의 장으로서 전시관 역할을 다하고자 도내 초 · 중학생을 대상으로 여름 문화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역사문화강좌, 일반인을 대상으로 토요전통문화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특별기획전과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관람객이 문화적 즐거움을 누리는 문화공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미륵사지 출토 유물

2000년 10월 2일 미륵사지 중원 금당지 북편 회랑지 남쪽에서 출토된 금동향로는 결손 부위가 거의 없이 완벽하며, 금도금 상태도 양호하다.

지금까지 발굴 유물로 전해오는 향로 가운데 이처럼 완전한 형태와 양호한 상태를 가지고 발견된 사례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유일하다.

미륵사지출토 금동향로의 일부분에서는 중국 唐의 외래적인 요소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동향로의 뚜껑에 새겨진 8엽 연화문이 우리나라 수막새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세련된 연화문을 그대로 살려낸 듯하며, 전체적으로 우리의 독창적인 금속공예의 특징이 보이는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큰 보물이다.

 

3) 기타 

익산시에 가면 익산 쌍릉(사적 제57호), 입점리 고분 전시관, 숭림사, 관련 축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익산 쌍릉(사적 제57호)은 동서로 약 200m 사이를 두고 있는 두 무덤은 백제말 무왕(600-641)과 그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점리 고분 전시관은 함라산 능선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남동측에 총 21기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숭림사는 고려 충목왕(1345년)때 창건, 보광전(보물 제825호), 청동은입인동문향로 (지방유형 문화재 제67호)등 많은 유물이 있다.

관련 축제는 익산서동축제로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배경으로 하는 축제마당으로 매년 5월에 개최된다.

 

마무리하면서 

이 글은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가 전문가의 발굴조사 및 감수를 거쳐 발간한 각종 문건을 중심으로 정리한 가장 최근의 정보다.

강의는 관련 PPT와 사진은 물론 애니메이션 및 동영상으로 유익하고 흥미롭게 진행된다.(*)

 

참고자료

*공주시 발간 각종 역사유적 안내 

*부여군 발간 각종 역사유적 안내 

*익산시 발간 각종 역사유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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