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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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고성민 기자
  • 승인 2019.02.0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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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 지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종호박사(한국저술인협회 회장)

(이 기사는 경주역사지구를 중심으로 총 39회에 걸쳐 연재된다.)

생각지도 않은 거금이 생길 때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여행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그동안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야할까. 나름대로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지를 택하기 마련이지만 근래 매우 신뢰성이 있는 지침이 등장했다.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유산(World Heritage)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을 지정하게 된 동기는 1960년 이집트 정부가 나일 강에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부심벨 신전

등 이집트의 고대 유적들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상징하는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79~BC 1213)는 ‘건축 대왕’이란 이름으로 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가 건설한 기념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스완에서 320킬로미터 남쪽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벨 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은 정면이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닮은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크기를 자랑한다. 정면 조각 뒤에는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이 있는데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의 신과 람세스 2세의 조상을 환하게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1950년대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는 국토 최남단의 아스완에 있는 기존의 댐을 새로운 아스완하이댐으로 대체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는데 이집트의 전력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아스완댐이 예정대로 완성되면 세계적인 유산인 아부심벨 신전 등 많은 고대 이집트 유적들이 수몰된다는 것이다. 이에 전 세계의 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부심벨 신전을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물속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부심벨 신전을 구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신전 주위에 제방을 구축하자는 안과 신전을 콘크리트 상자로 싸서 수압 잭(jack, 작은 기중기)으로 들어 올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결정된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아부심벨 자체를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는 65미터 상류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Less is more)는 설명처럼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지역 또한 원래 유적이 있던 곳과 비슷하게 조성하기로 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963년부터 아부심벨 신전 이전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팀은 제일 먼저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신전에 모두 17,000개의 구멍을 뚫고, 그 안에 33톤에 달하는 송진덩어리를 밀어 넣어 신전의 바위 돌들을 단단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거대한 쇠줄 톱을 동원해 신전을 모두 1,036개의 블록으로 잘랐다. 블록 하나의 무게가 30톤에 달했으며 신전 주변의 바위들도 1,112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다. 계획대로 모든 돌이 상부로 옮겨진 후 재조립 작업이 시작되었고 공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런데 이집트가 담수 수면을 더 올리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이미 재건해 놓았던 소신전을 다시 해체하여 약 2미터 더 높은 곳으로 앉혀야 했다. 공사의 마지막 작업은 신전을 토막으로 자를 때 생긴 자국을 위장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1969년 2월 마침내 3200년 전에 탄생된 신전이 다시 완벽한 제 모습을 갖춘 채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69년 3월 춘분에 정확히 람세스 2세가 설계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났다. 3200여 년 전처럼 햇빛이 성역에 있는 동상들을 비춘 것이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200만 달러의 공사비가 들어간 세계적인 문화유적 보존사업이었는데 한국도 50여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가 인류 문화재를 공동으로 지킬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되었는데 1972년 11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유산의 파괴를 막고 보호하는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The 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을 만든 후 인류문명과 자연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어난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세계유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이를 구분하여 선정한다. 큰 틀에서 인류가 태어난 이후 즉 인간의 손길이 배어있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분류하고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을 자연유산으로 분류하며 이들이 연계되어 있는 것을 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문화유산은 유적(역사와 예술, 과학적인 관점에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비명(碑銘), 동굴생활의 흔적, 고고학적 특징을 지닌 건축물, 조각, 그림이나 이들의 복합물), 건축물(건축술이나 그 동질성, 주변 경관으로 역사, 과학, 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 건물이나 연속된 걸물), 장소(인간 작업의 소산물이나 인간과 자연의 공동 노력의 소산물, 역사적, 심미적, 민족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적 장소를 포함한 지역)를 말한다. 자연유산은 무기적 또는 생물학적 생성물로 이루어진 자연의 형태이거나 그러한 생성물의 일군으로 이루어진 미적 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 것, 과학적 보존의 관점에서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지질학적, 지문학(地文學)적 생성물과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 서식지 그리고 과학, 보존 또는 자연미의 관점에서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지점이나 구체적으로 지어진 자연지역을 말한다. 복합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을 의미한다.

<자격 박탈도 가능>

한국의 경우 문화유산 11건, 자연유산 1건으로 문화유산은 불국사․석굴암(1995), 종묘(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양동마을(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가 등재되었다. 자연유산으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이 있으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고구려 고분군(2004)이 등재되었다.

각국에서 총력을 기울여 자국의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코자 노력하는 것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문화올림픽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세계유산 등재로 인한 이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우선 국내·외로부터의 관광객이 크게 증가되며 이에 따른 고용 기회와 수입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정부의 추가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지역의 계획과 관리를 향상시킬 수도 있고, 또한 지역 및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보호를 위한 책임감을 형성한다.

베트남의 하롱베이는 베트남의 경제 규모와 흐름을 바꿔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롱베이는 등재 2년 뒤인 1996년 23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는데 2000년에는 85만 명, 2005년에는 150만 명이 다녀갔으며 2010년 관광객 수는 250만 명이나 되는 등 세계유산으로의 등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의 경우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방문객이 거의 10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각국이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관광추세가 역사문화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등재를 둘러싼 외교전도 치열하고 등재 심사도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전 단계인 자국 내 지방자치단체 경쟁률만 해도 10대1로 높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는 것이 간단하지 않는 것은 세계유산협약에 가입된 전 세계 188개 나라에는 해마다 2점씩 유산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세계유산위원회가 검토하는 전체 유산의 수는 45점으로 제한된다. 또한 특정한 유산(Heritage)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기회는 오직 한 번밖에 없다. 유네스코가 한 유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두 번 이상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장점은 설사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여 소유권이나 통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유권은 지정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국내법도 여전히 적용된다. 더불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세계유산기금(World Heritage Fund)으로 부터 기술적, 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세계유산으로 역사성이 있는 고대 유산만 선정되는 것이 아니다.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건축가 우드손이 설계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선정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세계유산위원회측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위대한 예술적 기념비이자 아이콘인 동시에 20세기 후반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기친 과감하고도 예언자적인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더욱 돋보인다. 현재까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생존해 있음에도 세계유산으로 지명된 것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설계한 오스카니마이어(Oscar Neimeyer)에 이어 우드손이 두 번째이다. 호주의 랜드 마크가 된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20세기 10대 건축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유산이 처한 당면한 문제점은 대부분의 유산들이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있으므로 각종 여건에 의해 파괴와 훼손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간 유산 중 파괴 위험에 처한 문화 및 자연유산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분류하여 특별히 관리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11곳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2000년에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를 답사라는 틀에서 전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경주역사유적지구 내에 있으며 1995년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석굴암’은 별도로 다룬다.

 

경주역사유적지구(1)

들어가기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인 경주는 다소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 경주에 있는 불국사․석굴암이 1차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2000년 보다 큰 영역의 경주시 전체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유산 속의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경주 일원이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다른 유산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종묘나 창덕궁들은 단일 품목으로 등재되었지만 경주는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와 같은 예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우선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세계사 전체에서도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신라가 있을 뿐인데, 경주는 그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1천 년 내내 ‘서울’이었다. 로마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여 1,000년을 넘긴 나라이기는 하나 동⋅서로 분리되어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는 1453년에 멸망했다. 경주와 동일한 선상에서 로마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는 토함산과 남산, 선도산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분지와 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5세기가 되면서 경주는 점차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5세기 중반에 중국의 서안을 본떠 방리제(方里制)라고 불리는 도시계획법을 도입한다. 방리제란 시가지를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방’과 ‘리’로 나누어 구획한 것을 말한다. 최준식 박사는 하나의 방리는 동서가 160미터, 남북이 140미터의 크기로 경주에 약 360개의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었다. 경주는 방대한 지역에 산재한 유적의 다양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적이 만들어진 시대가 매우 길다는 점도 특징이다. 가령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나정이라는 신라 초기 유적 인근의 남산에서는 신라 전성기의 유적은 물론 신라의 말기 유적까지 포함된다. 근 천 년에 걸친 역사가 고스란히 세계유산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경주는 불교 유적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왕릉은 물론 왕성이나 산성도 있고 첨성대나 포석정 등 과학유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주 지역의 유산을 개개로 등록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등재했다. 궁궐터인 월성지구, 불교 미술이 대다수인 남산지구, 적석목곽분으로 대별되는 신라 초창기 왕들의 릉이 모여 있는 대릉원지구,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황룡사지구, 그리고 고대 신라의 방위 시설이라 볼 수 있는 명활산성이다.

경주역사지구 조감도

하루가 바쁜 세상이므로 경주도 방문하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막상 답사 여행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유명 유적지를 꼼꼼히 챙기면서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답사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는 천년 고도이므로 시내에 많은 유산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반월성과 안압지, 계림과 첨성대, 대릉원 등이 한 걸음 거리이므로 도보로 산책을 겸해 천 년의 역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덕목이다. 또한 시내 한가운데 노동동과 노서동에 적석고분들이 줄이어 있는데 이곳에서 봉황대와 같은 거대한 고분과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둥그런 빈자리만 남아있는 서봉총, 금령총터가 있으며 유명한 호우총도 보인다. 더구나 황남대총, 천마총 등은 밤에도 개장하여 경주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데 이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은 물론이다.

문제는 신라 천년의 모든 유산들이 ‘경주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지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네스코 지정 유산들만 감안한다면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형산강을 기준으로 우측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지정되고 좌측에 있는 많은 유산들이 배제되었다. 형산강 좌측에 있는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무열왕릉(사적 제20호),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경주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 등 경주의 간판급 중요 유적지들이 지정되지 않은 이유다. 또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기에 충분함에도 단독이거나 위치나 접근로 등이 불리하여 지정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경주 일원을 답사할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되지 않은 것들도 함께 보아야 신라 천년 유산의 진수를 보다 충실하게 맛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든 아니든 경주 일원에 있는 유산은 거의 모두 답사 여정에 넣어 신라 1000년의 참맛을 느끼도록 하는 데 기본 목적을 둔다. 경주 지역에 있는 유산을 전체적으로 연계하여 답사한다는 말을 좀 더 발품을 판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유산 숫자가 무려 100여 곳이 넘는데다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있음이 걸림돌임은 틀림없다. 경주 유산을 다룬 자료들은 많이 있으나 이곳처럼 경주 속의 거의 모든 유산을 철저하게 답사하여 정리하는 것은 매우 번거러운 일이지만 이 때문에 답사의 초보자라도 쉽게 경주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를 자주 방문하거나 답사 자료를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들은 남산에 대해 남다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남산의 경이로움은 어느 정도 신비화되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남산지구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장소만 해도 37곳이나 되는데다 4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자칫 길을 잃기 쉬운 것은 물론 남산 지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루에 한 곳을 답사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산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며 지도 등 간략한 정보만 갖고 초행길을 떠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이들을 한 곳도 제외함이 없이 모두 현장 답사하여 그 진면목을 담았다. 일반적으로 경주 남산을 대략적으로 훑어보려 해도 일주일에서 10일 정도는 걸리지만 답사 요령만 있으면 3〜5일 정도로도 70퍼센트는 정복할 수 있는데 그 방법도 이곳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위해 경주지역 답사를 세밀하게 정리한 경주남산연구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국민대학교역사학과, 정만진, 정선중, 하일식 등이 분류한 답사로를 많이 참조했다. 경주를 맛보기 위해서 한 달도 부족하다는 말은 경주는 ‘살아서 꼭 가봐야 할 곳’이란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유산 중에서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경주를 단숨에 모든 곳을 주파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자신의 일정에 따라 두고두고 한 두 곳씩 방문해도 좋고 이미 방문한 곳을 재차 방문하면서 경주의 진면목과 정취를 느끼는 것도 방안이다. 그러므로 경주를 찾으면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보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 것을 권유한다. 더불어 가까운 거리는 되도록 걸어 다닐 것을 권한다. 신라 천 년 고도를 ‘빨리 빨리’라는 한국 특유의 습성으로만 지나치기보다 경주 전체의 면면을 일일이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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