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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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4)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2.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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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형산강 좌측 유산(III)

이종호박사(한국저술인협회 회장)

                                          (이 기사는 총 49회로 연재됩니다.)

<경주 들어가기 : 형산강 좌측 유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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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삼층석탑의 좌측으로 선도산의 주능선 말단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 25대 진지왕(576∼579), 46대 문성왕(839∼857), 47대 헌안왕(857∼861)의 무덤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36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재위 기간은 길지만 일곱 살에 즉위를 한 탓에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에 지나지 않았다.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쌓았다고 알려지는 등 한국의 왕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법흥왕이 불교 공인 이래 처음 창건 공사에 들어갔던 흥륜사를 완공했고 일반인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더구나 진흥왕의 신라군은 옥천 관산성 인근 구진벼루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당시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이었다.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 『국사』를 편찬한 진흥왕은 비석에 ‘태왕’이라 썼는데 그 이전의 신라 왕들은 누구도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진흥왕도 ‘광개토태왕’처럼 ‘진흥태왕’을 자부했던 것이다. 만년에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은 채 생활하였으며, 스스로 법운이라는 법명을 지어 불렀으며 왕비도 왕을 본받아 스님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고 알려진다. 안내판에는 추사 김정희가 『신라진흥왕고』에서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릉의 무덤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고 적혀있다. 다른 왕릉에서는 이런 표현이 없는 것을 볼 때 이 무덤이 진흥왕릉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했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재위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 밑둘레 53미터, 높이 3미터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과 함께 있는 문성왕릉은 이들보다 30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문성왕은 신무왕의 태자로 신무왕은 원성왕 증손자들의 왕위쟁탈전 때 최후 승자였던 우징이다. 역사적으로는 장보고의 권력이 막강했던 시기의 왕이며 초창기에는 아버지 우징을 도운 장보고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장보고의 딸과 혼인하는 문제가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되면서 장보고의 반란을 맛본다. 공작지(孔雀址)에 있었다는 그의 능침은 공작지의 위치를 알지 못했는데 헌안왕릉이 공작지에 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헌안왕릉 옆에 있는 릉이 문성왕릉임이 알려졌다. 문성왕릉 바로 옆에 있는 왕릉이 헌안왕(재위 857〜860)의 릉이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문성왕이 죽자 즉위했는데 즉위 초부터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걸리자 왕위를 맏사위에세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경문왕이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라 알려진다. 경문왕이 헌안왕의 사위임에도 신라 왕에 오른 내력은 매우 흥미있으므로 일화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헌안왕 4년(860년) 왕은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왕족 응렴도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응렴이 어린 나이치고는 견문이 넓다하여 헌난왕이 그에게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있었냐고 질문했다. 그는 지금까지 세 사람을 만났는데 첫째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인데도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둘째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마지막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응렴의 대답에 왕은 왕비에게 귓속말로 응렴이야 말로 정말로 자질이 있며 사위로 삼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에게 두 딸이 있는데 장녀는 20살, 동생은 19살인데 마음에 드는 아이와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응렴은 결정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모는 장녀가 박색이라고 하니 둘째에게 장가가라고 말했다. 부모의 말에 결정하지 못한 응렴은 흥륜사 스님에게 찾아가자 그는 장녀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지만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 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응렴은 자신이 감히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왕이 결정해달라고 했고 왕은 맏딸을 시집 보냈다.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자신에게 아들이 없으니 사위 응렴이 왕위를 잇길 원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가 경문왕이다. 헌안왕은 유언을 내리기 전에 신라에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으므로 사위를 추천한다고 했다. 여하튼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왕비의 동생을 둘째 왕비로 삼았다. 이때 갑자기 흥륜사 스님이 생각나 결혼하기 전 자신에게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색인 큰 딸에게 장가를 가면 그것이 당시에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첫째 이익이고 그로 인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둘째 이익이며 결국은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세 번째 이득이라고 말했다.’인생사가 족집게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헌안왕과 경문왕 이야기를 들으면 현대인에게도 생각나게 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을 본 후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를 답사하기 위해 약 한 시간 정도의 선도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등산로를 이용해야 한다. 마애여래삼존입상은 정상 턱밑에 있는 성모사(聖母祀)라는 사당 옆에 있다. 신라 사람들은 선도산을 영산(靈山)으로 섬겨 선도산에 사당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의 건물은 새로 세워진 것이다. 마애여래삼존입상은 성모사 왼쪽의 거대한 암벽에 높이 6.85미터에 달하는 본존을 조각하고, 왼쪽에 높이 4.55미터의 협시보살(脇侍菩薩), 우측에 높이 4.62미터의 협시보살을 의미한다. 본존불은 경주 주변의 석불로는 가장 큰 불상이지만 파손이 심해 조각의 세부는 물론 옷무늬조차 판별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눈의 윗부분이 떨어져나갔고 몸의 정면에도 상하로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본존불의 얼굴에 아직도 고졸(古拙)한 미소가 남아 있고, 어깨는 넓고 크나 움츠린 것 같아, 군위(軍威)의 삼존석굴 본존불과 같은 형태로 인식한다. 본존불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방치되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머리에 삼산(三山) 보관을 쓰고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윤곽선이 부드럽다. 왼손은 내려서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부분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어 관음보살로 추정한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5개 조각을 이어붙인 것으로 왼쪽 협시보살보다 훨씬 파괴가 심하다. 얼굴은 왼쪽 보살과 비슷하지만 얼굴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대세지보살로 추정한다. 세 불상 모두 발 아래에 복련 연화문대좌가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선도산에서 내려다보는 경주 남산,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데 이곳은 김유신의 누이 문희의 자취가 서려 있는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언니 보희가 꿈 속에서 서악(西岳, 선도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이 오줌에 잠겼다. 보희는 경주 시내를 자신의 오줌으로 채운 것이 걱정이 되어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보희의 걱정과는 달리 대뜸 그 꿈을 샀다. 보희의 꿈은 문희의 비단치마(錦裙)와 교환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무열왕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명왕후가 되며 그녀의 아들은 뒷날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문무왕이 된다. 보희는 흉몽으로 여기고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팔았는데 문희는 길몽으로 해석하여 비단치마 하나로 꿈을 서서 결국 왕비가 된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비단치마 하나로 왕비가 되었다니 비단치마 하나를 들고 오줌누는 꿈을 꾼 사람은 꿈을 팔지 말기 바란다. 김유신묘로 향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큰 인물은 아무래도 김유신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김유신을 온 나라 사람들이 칭송한다고 적었다. 그동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한 치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혈투를 벌였는데 이를 종결시켰으니 신라 사람으로 그를 칭송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사실 삼국시대 전쟁회수는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보아도 약 460회이며 삼국간의 직접 전쟁도 275회나 되어 거의 1년에 한 번 정도로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 없는 세상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의 조상은 금관가야 김수로왕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우지만 금관가야는 법흥왕 19년(532)에 의해 멸망했다. 이런 배경을 업고 김유신은 정통 신라인이 아님에도 수많은 전쟁을 통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다. 경주에 남아 있는 김유신과 연계되는 유적은 재매정, 천관사 터 등이 있는데 이들은 오릉을 설명할 때 다룬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자락 금산원에 있는 김유신묘(사적 제21호)는 흥무대왕릉으로 불리므로 정문도 흥무문이라 적혀있다. 신라 어느 왕의 무덤보다도 잘 정비되어 있는데 흥덕왕이 김유신에게 흥무대왕이라는 칭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크기와 높이는 무열왕릉과 비슷하지만 위치가 처음부터 훨씬 높은데다 호석, 돌난간, 십이지신상 등 김춘추의 무덤에는 없는 것들이 웅장하여 오히려 더 왕릉답다. 특히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은 갑옷을 입지 않고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머리 모습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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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은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이 잘 꾸며져 있는 것을 볼 때 상당히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유신묘에 12지신상이 있는 이유로 그가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을 때 새로 꾸몄거나 혜공왕 15년(779)에 김유신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새로 만들어 배치하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여하튼 신라에서 왕이 아님에도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고금에 걸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무대왕 13년(673) 향년 79세로 사망하자 문무대왕은 매우 애통해하며 비단 1천 필, 벼 2천 석을 부의로 내리고 100명의 군악대를 보내어 지극히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토록 했다. 김유신 장군묘의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우측으로 전각들이 보이는데 그중 가장 큰 건물이 숭무전으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김유신을 제향한 곳은 금산재(金山齋)이지만 숭무전이 세워진 후 그 기능을 상실했다. 김유신묘에서 하천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경주의 선인들을 만나볼 수 있는 석장동 금장대 바위그림이 있다. 이곳은 경주 시가지의 북서쪽으로 서천과 북천이 합쳐져 형산강을 이루는 곳으로 ‘애기청소’라고 불린다. 물 좋은 곳에 바위절벽이 있어 그 위쪽에는 조선시대에 금장대(金丈臺)라는 정자가 있던 곳인데 날아가던 기러기도 반드시 앉았다 간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 절벽 중턱의 바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풍우에 시달려 동쪽 면의 그림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지만 남쪽 면에는 방패모양이라고 불리는 검파형(劍把形) 이외에도 사람 얼굴⋅돌칼⋅돌화살촉⋅꽃무늬⋅사람발자국⋅짐승⋅배⋅여성 성기 모양 등 30여 점의 다양한 그림이 등장한다. 청동기 시대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신앙의례의 장소로 보이는데 경주 안심리와 포항 칠포리, 세계를 놀라게 한 대곡리와 천전리 바위그림도 인근에 있으므로 바위그림과 고인돌 등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별도로 이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애기청소는 수많은 전설과 사건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의 무대가 된 장소로 과거에 1년에 한 명씩은 빠져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 여인을 쫓아다니던 청년이 술에 취해 우물에 빠져 살아나지 못하자 다른 남자와 약혼 중인 황남동의 그 여인은 다음날 서천 냇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계모에게 꾸중들은 어린 남매가 외삼촌 집에 가려고 서천을 건너다가 그중 한 명이 죽었다고 할 정도로 애환을 갖고 있는 곳이다. 경주가 자랑하는 절경 중의 하나인데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으므로 과학유산 답사에서 빠뜨리지 말기 바란다. 석장동금장대바위그림에서 좀 더 직진하면 제28대 진덕여왕의 ‘경주진덕여왕릉(재위 647∼654, 사적 제24호)’이 나타난다. 선덕여왕이 재위하던 647년에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켜 김춘추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하였으나,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한국 왕실사에서 유일하게 2명의 여성 왕이 연이어 나타났다. 즉위한 뒤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 도발하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토록 했고 대외적으로는 진덕여왕 2년(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면서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다. 당나라를 본떠 복제(服制)를 개편하였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는 등 당나라와 친교를 돈독하게 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진덕여왕은 키가 7척이나 될 정도로 매우 큰 키에다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지는데 무덤은 키에 비해서는 큰 편은 아니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4.4m, 높이 4m인데 사망하기 2년 전인 재위 중에 축조한 것이다. 봉토 밑에 판석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을 돌리고 판석과 판석 사이의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다. 판석과 둘레돌 위에는 장대석으로 된 갑석(甲石)이 덮여 있으나, 원래의 돌이 아닌 것도 있다. 둘레돌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석을 깔고 난간을 세웠으나, 현재는 사라진 부재가 상당수다. 무덤 앞에 별다른 석물이 없으며 후대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무덤 조성에 대한 기록이 현 위치와는 다소 다른 것은 물론 십이지신상의 조각 수법이 경주에 남아 있는 8기의 능묘 가운데서 가장 빈약하고 십이지신상의 평면화 된 양식은 9세기 후반의 능묘 양식과 일치하므로 진덕여왕의 능묘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진덕왕릉은 1997년 왕릉 동북쪽 윗부분이 훼손된 채 발견돼 전문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이 유물이 실제로 도굴됐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인 결과 유물은 도난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 도굴꾼들이 왕릉의 석실벽 동쪽의 돌 일부를 드러내고 4.5m정도 파고들어가 석실에 닿았으나 석실 안에 있던 흙을 모두 파낼 엄두를 못내 도굴을 중단한 것이다. 왕릉이 도굴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했으나 아직도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도굴하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자체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진덕여왕릉에서 나와 높이 9.76미터의 경주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으로 향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주 8괴 중 하나로 들어가는 이유다.

경주 8괴란 8개의 괴이한 경치를 뜻한다. 첫 번째는 ‘남산부석으로 경주 남산에 있는 허공에 떠있는 바위를 말하며 ‘문천도사’는 남천을 흐르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데 모래는 위로 거술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계림황엽’은 계림의 나무가 여름에도 단풍처럼 누렇게 변하는 현상을 말하고 ‘금장낙안’은 왕이 놀던 금장대에 기러기가 반드시 쉬어가는 것을 발한다. ‘백률송순’은 소나무를 베면 순이 생기지 않는데 백률사 소나무는 가지를 베면 순이 자란다는 것을 말하고 ‘압지부평’은 안압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라는 풀이 있다는 것이다. ‘불국영지’는 불국사의 탑이 영지에 비친다는 것이며 ‘나원백탑’은 탑에 이끼가 끼지 않아 영원히 하얗다는 것이다.

2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형성한 신라석탑의 전형적 양식으로, 경주지역에서는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 다음가는 큰 석탑이다.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였고, 하층기단 면석은 4석으로 짜여지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隅柱, 탑신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 모양)와 3주의 탱주(撑柱, 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가 정연히 조각되었다.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여 덮었는데, 상면에는 원과 각형의 2단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경쾌함을 실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 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순백의 화강암과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걸작품이다.

경주 8괴 중의 하나인 나원리5층석탑이 소속되었던 사찰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인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대형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학자들은 이 탑은 금당 자리 뒤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나원리5층석탑과 연접하여 새로 만든 작은 사찰인 나원사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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