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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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6)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2.2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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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지구(적석목곽분)

대릉원지구(적석목곽분)

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탈해왕릉에서 경주로 직진하면 곧바로 유네스코세계유산인 대릉원지구를 비롯하여 역사의 도시 경주 도달한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경주역사지구는 5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큰 틀에서 모두 인근이므로 일정을 어떻게 잡든 큰 차이가 없다. 각자의 편의에 따라 답사에 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곳에서는 대릉원지구를 먼저 방문한 후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천년 고도 신라를 외국인과 함께 답사해보면 한마디로 놀랍다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경주 시내 곳곳에 동산만한 무덤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경주 중앙에 있어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있다며 더욱 신기하게 생각한다. 생자와 사자가 함께 있는 도시는 많이 있지만 경주와 같이 평지에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부여 능산리(陵山里)의 백제 고분군이나 경북 고령 주산(主山)의 대가야 고분군 등도 있지만, 그곳 무덤들은 지명 그대로 ‘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경주의 고분군들은 온통 평지에 널려 있다. ‘과연 세계의 신라다’라는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대릉원지구의 고분들은 경주 시내의 서남부 반월성의 북쪽부터 노서동에 이르는 동서 약 1킬로미터, 남북 약 1.5킬로미터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대릉’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의 ‘미추왕이 죽은 뒤 대릉에서 장사 지냈다’는 구절에서 연유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지구에 등록된 고분은 경주 전체의 고분에 비해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또한 대릉원지구라 해서 현재 대릉원이라 불리는 공원에 있는 고분만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는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신라오릉(사적 제172호), 재매정(사적 제246호)등이 포함된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현재 약 56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중 왕의 이름이 확인된 능은 38기뿐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것은 고분이 거대해진 시기 이후의 것들로 대체로 신라 왕의 호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무렵과 일치한다. 국왕의 호칭이 가장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에서 흉노의 왕들을 의미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들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손으로 왕위를 인계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할 경우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어 935년에 멸망할 때까지 무려 천년을 이어 온 한국 역사상 최장수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신라지역은 고분의 형태도 다양하다. 청동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토착적인 토광묘(土壙墓, 특별한 시설이 없이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 무덤으로 움무덤 또는 널무덤이라고도 함)와 석곽묘(石槨墓,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네 벽의 덧널을 쌓은 돌덧널무덤)가 발견된다. 기원전 1세기에 박혁거세에 의해서 건국된 이래 약 3백 년 동안의 적석목곽분에 선행하는 고분도 발견된다. 이들 고분에서는 신라고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경질의 고배, 장경호(長頸壺) 등 신라 토기가 발견되지 않는 대신 전대에 성행한 와질토기와 고대의 철제품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또한 5세기부터 횡혈식 석실분도 출현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적석목곽분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는데 창령, 삼척, 경산 등지에서도 약간씩 발견된다.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조성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중국(동이족의 터전 제외),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다. 또한 적석목곽분은 4~6세기 6대에 걸친 마립간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비-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데 이를 만든 신라 김(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이라는 기록을 증빙한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지하로 6~7미터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대형 목곽을 설치한 쿠르간도 있음)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된다. 신라에서는 신라 김씨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나타나는데 그들도 북방기마민족의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반구형(半球形) 봉분을 했다. 그러므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어 낙타등(쌍봉)처럼 된다. 봉토는 거의 대부분 원형인데, 적석시설이 상당히 큰 규모이고 그것을 둘러싼 봉토 또한 대규모여서 신라의 고분이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고분에 비해 상당히 대형인데다 무덤 구조의 특성상 도굴하는 것이 간단치 않으므로 부장품들이 매장 당시 그대로 출토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릉원에서 발굴된 대형고분의 경우 한 고분에서만 1만 점에서 2만 수천 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신라무덤의 고구려 유물 매장>

경주 시내에 있는 거대한 고분들은 대체로 노동동⋅노서동⋅황남동⋅황오동⋅인왕동 지역 등에 밀집되어 있다. 이들을 일일이 답사한다는 것은 답사의 스피드와 힘을 빼므로 노동동⋅노서동고분군, 황남동의 대릉원 등을 중점으로 설명한다. 이들 고분군 지역은 본래 대릉원과 연결된 넓은 무덤 구역으로 도로만 제외하면 동일한 구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동고분군(사적 제38호)에는 4기의 고분이 남아 있는데 봉황대⋅금령총⋅식리총 등 3기는 발굴⋅조사되었고 1기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봉황대는 밑둘레 250미터, 직경 82미터, 높이 22미터로 노서동의 서봉황대와 함께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 중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봉황대가 남다른 것은 덩치도 크지만 고분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더 더욱 무덤처럼 여겨지지 않고 마냥 동산처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봉황대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당시 왕건은 풍수지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도선으로부터 신라를 빨리 망하게 하는 비법을 들었다. 도선은 경주 땅이 풍수지리상 매우 좋은 배 모양이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다. 왕건의 조종을 받은 풍수가들은 신라 조정에 경주는 봉황 모양의 땅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 하니 봉황의 알을 만들어놓아 날아갈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신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퍼뜨렸다. 신라 조정에서는 커다란 알을 만들어 경주 가운데에 놓았다. 무거운 흙덩어리를 실었으니 배가 빨리 가라앉는 형국이다. 신라가 멸망한 뒤 봉황의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소문이 퍼져 봉황대의 이름은 그야말로 유명해졌다.

봉황대 남쪽에 있는 금령총은 금방울이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처음으로 밝힌 발굴로 의의가 큰 데 분구의 직경은 18미터, 높이 4.5미터로 그다지 크지 않은 고분이다. 그림을 그려 넣은 자작나무로 만든 관모, 금팔찌, 배 모양 토기, 로마유리 등이 함께 출토되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말을 타고 있는 기마인물상토기(국보 제91호)가 출토되어 남다른 명성을 얻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신구들은 모두 성인용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작아 무덤의 주인이 어린 나이에 죽은 왕자일 것으로 추정한다. 금령총과 동서로 마주한 곳에 ‘금동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발’이 출토되어 이름이 붙여진 식리총(飾履塚r)이 있다. 금령총과 식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 때 마구잡이로 발굴되어 유적이 크게 훼손되었다.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은 표형분(瓢形墳) 1기를 포함하여 14기의 고분이 있다. 이 중에 서봉황대⋅금관총⋅서봉총⋅호우총과 부부합장묘로 추정되는 쌍상총, 말 뼈가 발견된 마총 등 8기가 발굴⋅조사되었다.

금관총은 1921년 집을 증축하던 중 우연히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원래 분구의 직경은 약 46미터, 높이 12미터로 추정되는 큰 고분이다. 이때 국보 87호인 금관이 처음 발견되어 경주고분의 등록상표처럼 되어 있는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외에도 금제 혀리띠 장식 등 금제품이 무려 2관(7.5킬로그램)에 달하며 수만 개의 구슬과 토기류 등 엄청난 유물이 나와 동양의 투탕카멘묘라고도 불렸다. 또한 철정으로 불리는 덩이쇠도 3〜4백 개나 출토되었고 고구려 또는 중국제로 생각되는 청동항아리, 로마 유리 등도 발견되어 당시의 활발한 국제적 문화 교류를 보여주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의 쌍봉(낙타등) 모양의 고분으로 1926년에 발굴되었는데 마침 신혼여행차 일본을 방문 중이던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였던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관한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瑞典)의 ‘서(瑞)’자와 금관에 있는 봉황 장식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했다.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은 두 개의 좁은 띠를 안쪽 머리 위의 중앙에서 직교시켜 내모(內帽) 모양으로 만들고, 꼭대기에는 금판을 오려 만든 봉황형 장식을 붙인 특이한 모양이다. 특히 서봉총 금관의 꼭대기에는 나무에 다소곳이 앉은 3마리의 새가 있다. 금관에 새가 표현되어 있는 예는 아로시 등 유적의 흉노 금관에서도 발견된다. 신라인들이 금관에 새를 표현한 것은 단순한 장식적 의미를 넘어서서 나뭇가지나 사슴뿔에서처럼 새가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로 여겼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은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그릇에 ‘연수원년신묘3월(延壽元年辛卯三月)’라는 명문이 나왔는데 연수는 고구려의 연호이므로 이 그릇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분구의 지름 35미터, 높이 10여미터로 목곽 밑에 많은 양의 산화된 붉은 철가루가 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 주인공의 영생을 빈 고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신묘라는 간지에 의거하여 무덤의 연대는 391년 또는 451년 등이며 출토된 유물을 볼 때 서봉총의 주인은 여자로 본다. 호우총은 1946년 5월 우리 손에 의해 최초로 학술 발굴 조사된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지름 16미터 높이 5미터로 같이 붙어 있는 은령총이라는 고분과 표형분을 이루고 있다. 금동제의 관, 신발, 금제의 허리띠장식 등이 출토되었는데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서 만든 명문이 있는 호우(일종의 그릇)가 발견되어 호우총으로 불린다. 호우 밑바닥에 써 있는 ‘을묘년’이란 간지는 항아리의 제작 연대가 415년임을 알려주는데 명문의 뜻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을 제사지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구려 물건으로 추정한다. 호우총에서는 잡귀를 쫓기 위해 만들어진 방상씨(方相氏)의 탈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유물보존처리 결과 도깨비 모양의 화살통 장식으로 밝혀졌다. 신라 무덤에서 고구려 물건이 나오는 까닭은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엽까지 신라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내물마립간 44년(399) 백제와 결탁한 왜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도움을 청하자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400년에 5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 준 직후 신라의 내물마립간이 고구려에 직접 조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8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한 사실이 나타난다. 고구려는 신라의 종주국 행세를 하면서 고구려군이 신라 왕경에 주둔한 적도 있다. 실제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은 5세기 후반 이후다. 따라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신라 무덤들에서 광개토태왕의 호우를 비롯한 고구려 물건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의 월성로 고분에서도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참고적으로 총(塚)으로 불리는 무덤은 발굴 작업이 완료된 왕릉 또는 지배층의 능을 말한다. 앞에서 설명한 서봉총,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등이 그 예이다. 발굴 작업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봉분이 남아있지 않고 봉분 흔적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천마도가 발견된 천마총처럼 봉분 형태를 그대로 놔둔 채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일대는 동서로는 안압지에서부터 교동, 남북으로는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현재 고분공원 앞 첨성로에 이르는 광대한 사적지대다. 신라왕경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월성⋅안압지⋅첨성대⋅계림 등 중요한 사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내물왕릉을 비롯한 수십 기의 고신라 고분이 완전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 지하에는 봉토가 없어진 많은 고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경주에서도 신라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들 지역은 근래에도 많은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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