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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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8)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3.0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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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지구(천마총)

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발굴의 한 획을 그은 천마총>

황남대총과 함께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은 천마총이다. 경주의 고분공원인 대릉원(大陵苑)에서 관람객이 무덤 내부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무덤이 바로 천마총(天馬塚)으로 천마총은 심야에도 내부를 개봉한다. 1971년 6월 평소 경주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녔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를 직접 둘러보고 신라 천년고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신라고도는 웅대(雄大)·찬란(燦爛)·정교(精巧)·활달(豁達)·진취(進取)·여유(餘裕)·우아(優雅)·유현(幽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개발계획에 포함된 내용 가운데 신라 최고·최대의 무덤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하고자 하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98호분은 높이 25m, 하부 길이가 120여m나 되는 대형 부부묘이다.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신라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98호분과 약 130미터 떨어진 지점에 인접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분(지름 47미터, 높이 12.7미터)을 시험적으로 발굴하여 98호분을 발굴하기 위한 경험을 축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흔히 말하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찬란한 신라금관은 물론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그 장식은 물론 목에 걸었던 경식(頸飾), 천마도 등 무려 11,526점에 달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천마도의 크기는 가로 75센티미터, 세로 56센티미터, 두께 0.6센티미터로 용도는 ‘말다래’이다. 장니(障泥)라고도 불리는 말다래는 말안장에서 늘어뜨려 진흙이 사람에게 튀는 것을 막는 장식이다. 말 안장의 좌우에 매달던 것이므로 처음 발굴될 때는 2장이 겹쳐 있었다. 한 장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같은 그림으로 된 나머지 한 장은 무사하여 이것이 국보 207호이다.

천마도는 신라뿐 아니라 삼국시대 전체를 통틀어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그림이며 신라 회화 작품으로는 유일하다. 천마는 흰 말이 말갈기와 꼬리털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과 비교하여 날카로운 묘사력이나 힘찬 생동감은 뒤떨어지지만 천마도가 공예품의 장식화임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는 공예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붉은색, 흰색, 검은색을 이용하여 단아한 느낌을 주는데 색깔을 내는 칠감의 원료는 흰색이 호분(胡粉, 돌가루)이며 검은색은 먹, 붉은색은 주사(朱砂)와 광명단이라는 일종의 납화합물이다. 천마도에 대한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보존과학실>의 적외선 사진 촬영 결과 정수리 부분에 불룩한 막대기 같은 것이 솟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막대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동물 머리에서 솟아난 뿔인데 뿔이 하나인 일각수(一角獸)이다. 말하자면 유니콘인 셈이다. 또한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으며 뒷다리에서 뻗쳐 나온 갈기의 표현은 기린이나 용 등의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다.

기린은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짐승을 말하는데 몸은 사슴과 같고 꼬리는 소의 꼬리에,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5색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체 윤곽이 말이나 소를 닮아 있다고 생각되며 가장 큰 신체적 특징으로는 외뿔이 특징이다. 고대 중국에 있어서 기린은 우주운행 질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으로 사후세계의 수호자, 천년을 살고 살생을 미워하며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적외선이 쏘아낸 `천마'는 아주 유감스럽게도 ‘불굴 기백’과는 영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입을 턱 하니 벌린 채 이빨을 다 드러내놓고 웃는 듯한 모습은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정수리 부분의 막대기가 뿔이 아니라 불꽃(일종의 신기)라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을 첨언한다. 서라벌대 이진락 교수는 천마의 유래와 관련해 중국에서 발견된 한 유물에 주목한다. 1977년 발굴된 중국 감숙(甘肅)성 주천(酒泉)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 벽화에 ‘천마’가 그려져 있다. 이 천마는 유려한 몸매에 구름을 주위에 두르고 하늘을 날아가는 형상인데 천마총 장니의 천마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 이 교수는 ‘중국 땅에서 오로지 주천시의 고분벽화에만 천마그림이 나왔는데 신라 서라벌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발견된 것은 고대 두 도시 간 문화교류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또한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설화 중 나정우물가에서 하늘로 날아간 백마와 천마총 천마를 볼 때 신라 건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천은 세계를 놀라게 한 ‘마답비연’이라는 청동천마상이 나온 곳으로 북방기마민족의 유적이 산재한 곳이다. 마답비연은 중국의 모택동과 미국의 닉슨대통령의 1972년 정상회담 때 미국측에 선물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마도는 당시 흔히 쓰이는 천이나 비단, 가죽이 아니라 나무껍질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재료가 무슨 나무인지가 관심사였는데 〈중앙임업연구원〉은 목판의 재질은 백화수피(白樺樹皮)라고 발표했다. 백화수피의 백화는 흰자작나무를 뜻하므로 그림은 흰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린 것이다.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말다래는 고신라 시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자작나무껍질 세공은 오늘날에도 시베리아에서 남러시아 지방까지 민간 도구‧민속공예품 제작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소재이자 전통 기술이다. 그러므로 천마를 그린 캔버스로 한반도 남쪽에서 잘 자라지 않는 흰자작나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북방기마민족 계열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주 제시되었다. 남러시아 스텝 루트의 민족들은 자작나무의 물리적 성질과 유연성을 살린 수피세공을 주로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자작나무 껍질이 관모 외에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나 도너츠 모양의 화판(모두 천마총 출토) 등의 중요한 용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북방기마민족과 유대관계가 강했음을 명시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도 유명한데 X선형광분석기(XRF)로 분석한 결과 금관은 평균 97.5%정도의 순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금의 비율을 K(캐럿)로 바꾸면 23.4K로 거의 순금으로 금관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성분은 은이다. 학자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결정적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무덤 주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무덤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어느 시기에 조성 되었는가를 추적했는데 천마총에서 수습된 나무곽의 목질 편을 시료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C14탄소측정장치로 측정한 결과 서기 340년 전후에 무덤이 조성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문제는 이 측정에서 오차 년도가 ±70년이나 됐다는 점이다. 한편 재래적인 방법으로 유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이 무덤이 서기 5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되어 이들 오차가 거의 150년이나 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소지왕(재위 479〜500년) 또는 지증왕(재위 500〜514)으로 추정한다. 앞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경주 고분공원 내의 고 신라 무덤을 보다 새롭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조사할 기회가 마련되면 보다 정확한 조성연대가 밝혀지고 무덤의 주인공도 밝혀질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학자들은 이 고분 축조에 투여된 노동력은 최소한 8,900명이나 되며 축조 기간은 90일로 추정했다.

대릉원에는 금관총 정도의 왕릉급으로 보이는 고분만도 20여기에 달하므로 이들 모두 최고 지배자의 무덤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이들 적석목곽분이 건설될 당시의 마립간은 내물왕(356〜402), 실성왕(402〜417), 눌지왕(417〜458), 자비왕(458〜479),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 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들 대형 무덤은 마립간 시대의 정치사회적 특성상 갈문왕(신라 때 왕의 친척에게 주던 직위로 왕과 비란 호칭을 사용했고 따로 신하를 거느렸음)이나 신라6부 중 당시에 특히 영향력이 있었던 대표적 귀족들의 무덤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릉원에만 한정한다면 황남대총과 천마총 이외에 발굴 조사된 109호분과 110호분도 적석목곽분이다. 110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가진 한사람의 무덤이지만 109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시차를 두고 축조된 여러 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여러 사람의 무덤이다. 109호의 무덤 가운데 가장 일찍 축조된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적석목곽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호분은 매우 특이한 축조법을 갖고 있다. 하나의 봉토 안인데도 남〜북 방향의 적석목곽분과 동〜서 방향의 장방형석실(長方形石室)이 함께 들어 있어 신라묘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83호분은 외덧널식의 적석목곽분, 82호분은 동총(東塚)과 서총(西塚)으로 구성된 고분인데 모두 주부곽식의 적석목곽분이다. 그밖에도 1973년 고분공원 조성 당시 담장부지의 발굴에서는 지상에는 흔적이 없었던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 기가 조사되었다. 이것은 여기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사이 또는 주변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너무 작아 멸실된 소형 고분들이 수도 없이 분포하고 있어 한마디로 이곳 전체가 무덤 지역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소형의 고분들은 대부분 적석목곽분이었으나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와 옹관묘(甕棺墓)도 혼재하고 있어 무덤 조성의 시대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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