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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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10)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3.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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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지구(들어가기II)

<남산 들어가기>

한 달을 걸려 답사한다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은 남산 답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하지만 적어도 <과학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네스코세계유산은 모두 답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남산을 3구역으로 나누어 도전한다. 제1구역 ‘서남산(1)’과 ‘서남산(2)’, 제2구역 ‘남남산’, 마지막으로 제3구역으로 ‘동남산(1)’과 ‘동남산(2)’ 지역이다.

제1구역 서남산(1)은 남산의 서쪽으로 평상복으로도 충분히 답사할 수 있는 곳이다. 반면에 ‘서남산(2)’는 서남산의 중앙 부분으로 단단한 차림을 하고 산악 등정에 도전해야 한다. 이곳을 주파한 다음 여세를 몰아 제2구역 남남산에 도전하는데 이 일정도 단순하지 않다. 세계유산만 따지면 몇몇 곳에 지나지 않지만 산재해 있는데다 답사지를 찾는 것도 수월하지 않아 단단한 준비를 해야 한다. 다행한 것은 산행 자체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암벽 등반과 같은 등산로가 아니므로 그다지 어렵지 않고 경주의 아름다운 절경들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다음은 동남산 지역인데 이들 지역도 평탄한 곳이라 평상차림으로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하이힐 등은 삼가기 바란다. 아무리 평탄하다고 해도 산길은 산길이기 때문이다. 웬 하이힐이냐고 질문하겠지만 실제로 상당수의 여자들이 경주 답사라고 하여 만만케 생각하고 하이힐을 신고 왔다가 고생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남산의 유네스코세계유산을 완주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월히 답사할 수 있는 곳도 많으므로 정확한 정보를 갖고 도전하기 바란다. 기초체력이 튼튼한 사람만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주 시내에서 35번 도로를 타고 남산을 들어가기 전에 우선 워밍업으로 대릉원지구 말미에 있는 세계유산인 경주 오릉(사적 제172호), 이차돈과 연계되는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지(興輪寺址, 사적 제15호), 김유신과 연계되는 재매정(財買井, 사적 제246호), 월정교(사적 제457호), 천관사지(사적 제340호)를 먼저 방문한다.

오릉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능으로 알려진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왕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지면서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물론 현재 박혁거세의 능으로 알려진 능이 확실하게 혁거세능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으로 뒤로 갈수록 점점 규모가 작아진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특히 경주에 있는 고분 대부분이 정확한 주인공을 알 수 없는데 ‘OO왕릉'으로 알려진 것도 쾌릉(원성왕릉)이나 흥덕왕릉 등 소수를 제외하면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릉 남쪽에 혁거세를 모신 사당인 숭덕전(지방문화재자료 제254호)이 있다. 세조 11년(1429)에 지은 후 재건과 수리를 거듭하다 경종 3년(1723)에 숭덕전으로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기록한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 위에는 알영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알영정이 있다. 알영정 비각에는 1929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라는 비석이 있으며 그 우측에 알영 우물이 있다. 두꺼운 사각석재 3장으로 닫아 놓은 우물 안에는 지금도 우물물이 고여 있다. 알영과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은 직선거리로 8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흥륜사는 오릉의 북쪽에 있는데 1910년경에 우연히 금당터로 보이는 토단(土壇)과 신라 최대의 석조(石槽)·석불 등이 발견되어 흥륜사의 터로 추정된 곳이다. 신라의 불교는 역동적인 역사과정을 보여주는데 바로 흥륜사와 이차돈의 연계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펴고자 했지만 전통적인 샤머니즘적 경향을 고수하려는 귀족 세력이 충돌한다. 이때 법흥왕의 조카인 이차돈이 등장한다(조카가 아니라는 설명도 있음). 법흥왕의 조카인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흥륜사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짓기 시작했는데,『삼국유사』 『해동고승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염촉(이차돈)이 왕명이라 하여 절을 지으라는 뜻을 전해 내렸다.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쟁하므로 법흥왕이 진노하여 이차돈을 꾸짖고 왕명을 거짓 전한(왕명 사칭) 죄로 참형했다.’

이 일화에는 다음과 같은 비사가 전해진다.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려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많으므로 조카인 이차돈이 자신이 왕을 위해 총대를 메겠다고 한다. 즉 자신이 왕명을 빙자하여 불사를 일으키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왕명을 사칭한 사람을 찾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 사찰을 건설해야 함을 주장하면 불사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승복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말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만약에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이차돈은 자신을 참수하면 이변이 일어나므로 오히려 불사를 일으키는데 유리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벌어지는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는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 즉 부처의 감응을 말한다. 조카인 이차돈의 순교를 빌미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사찰을 짓게 하는데 그 사찰이 바로 흥륜사이다. 흥륜사는 진흥왕 5년(544년) 2월에 준공되는데 다음 달부터 일반 사람들도 출가(出家)하여 승려나 비구니가 되어 부처를 모시는 것이 허락되었다. 물론 신라 최초의 사찰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이다. 신라 13대 미추왕 3년(264)에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구려의 고승 아도(阿道·我道)가 고쳐 주었는데, 그 보상으로 왕이 소원을 묻자 아도는 신라의 일곱 가람터 중 천경림에 사찰을 짓기를 원했다. 미추왕이 이를 허락하자 신라 최고의 성지의 청경림에 사찰이 들어섰는데 이 이름도 흥륜사이다. 이 당시 아도는 매우 검소하여 억새를 얽어 움막집을 짓고 이곳에 거처하면서 불도를 강설하니, 마침 하늘에서 꽃이 떨어졌기에 흥륜사라고 하였다고 하므로 연대가 다소 차이나지만 어떻든 흥륜사가 최초의 사찰이라는 데는 동일하다.

사찰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아도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 미추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포교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불교는 영영 신라인의 뇌리에서 잊혀지는데 법흥왕과 이차돈의 연계로 불교가 정식적으로 공인되고 흥륜사가 진실한 신라의 가람으로 세워진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뒤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으며 법흥왕이 편두라는 내용이 지증대사비에 적혀있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왕비 역시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이 되면서 신라의 국찰로 승승장구하는데 4월초파일의 석가탄실일에 맞추어 탑돌이를 하는 풍습은 신라 흥륜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사찰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인 불교의 상징으로 건립된 흥륜사의 주존불은 미륵이었다.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는 사찰의 주존불인 미륵이 화랑으로 출현하기를 기원했다. 그 뒤 실제로 미륵이 화생한 미시랑을 미륵신화로 모셨고 이때부터 미륵은 주로 화랑으로 출현하면서 미륵선화로 불려졌다.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자처하고 미륵의 출현을 화랑으로 설정하면서 화랑도를 만들었으므로 왕실과 귀족은 미륵 신앙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를 수 있었다. 신라 말 반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경명왕 5년(921)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화재로 불타 폐사되었다. 절터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 얼굴 모양의 수막새가 출토된 곳도 이곳이다. 현재 1980년대에 새로 지은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종각과 이차돈 순교비가 세워져 있으며 경내에 흥륜사터가 보존되어 있다. 한편 현 흥륜사 터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하는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위에 설명한 출토물들이 발견된 위치를 영묘사로 적고 있다. 흥륜사를 나와 흥륜사터와 월성 터의 중간에 있는 재매정으로 향한다. 1.5m 가량의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든 사각형 우물인데 학자들은 이 일대가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이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는데 비각 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선덕여왕 13년(644), 김유신은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化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돌아왔으나, 아직 왕을 배알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고, 김유신은 처자도 만나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맞아 2,000명을 베어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 해 3월에 왕이 귀환하라고 했으나 김유신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또다시 백제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고 하자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었다. 이 때에 집사람들은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는데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나니 이를 보는 모든 군사들이 “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야 어찌 골육의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겠느냐.” 하며 김유신을 따라 싸움터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 백제군은 김유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고 한다.

재매정 가는 길목에 기와집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경주 지방의 선비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학문을 토론하던 사마소가 있다. 사마소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들이 수양을 쌓던 곳으로 원래는 300미터 정도 떨어진 월정교터에 있었는데 1984년 유적지를 관리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올렸다. 진사는 가장 낮은 등급의 과거시험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선비로서 존중을 받았고 중앙 정권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칭호이다. 사마소는 이들 생원과 진사들이 학문을 정진하며 지방관아의 수장인 수령의 자문역할을 했던 장소를 말하며 16세기 무렵부터 우리나라의 각 요충지마다 세워졌다.

인근에 유명한 월정교(사적 제457호)가 있다. 월정교는 경주최씨 가옥 옆에 있는데 통일신라 최고 전성기의 화려한 궁성교량으로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두 다리는 교대 및 교각을 모두 대규모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돌다리로 모양과 크기, 돌못(동틀돌) 사용법, 퇴물림식(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월정교는 21세기의 첨단기술이 동원된 가운데 역사적 고증과정을 거쳐 한창 복원 중인데 길이 66m, 폭과 높이가 각각 9m 규모다. 사업비가 무려 235억원이나 투입될 정도로 야심찬 작품이다.

다음으로 김유신 일화 중에서 잘 알려진 천관사지로 향한다. 천관사지는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天官)의 집을 사찰로 바꾼 곳으로 전해진다. 김유신은 어머니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는데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했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사찰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라 천관사라 하였다. 천관사는 고려 중기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와 같은 전설은 전라남도 강진군 관산읍의 천관사에도 전해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이 말을 타고 이곳까지 천관을 쫓아왔고 추후에 천관이란 여인이 천관보살의 화신이었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는 김경신(원성왕)이 천관사의 우물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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