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12)
상태바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12)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3.19 16: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산지구(서남산(II))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유상곡수의 포석정>

포석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石構)로서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사적 1호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왕이 보고 따라 추었던 데서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 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이 일화를 매우 색다른 각도로 보았다.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리려고 춤을 추어 경계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났다면서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겼으니 나라가 마침내 망했다는 것이다.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더 잘 알려진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 소위 노천파티를 열었는데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로부터 습격을 당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한다. 이후 효종 이찬의 아들 부(傅)가 왕위에 올라 신라 최후의 경순왕이 되지만 그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견훤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패망한다.

신라의 최후를 목격한 포석정이 설치된 포석정지는 경주 서쪽 후궁(後宮) 또는 이궁원(離宮苑)으로 면적이 약 1만 제곱미터이며, 약 2.3킬로미터 상류에 최대 저수용량 약 1만8천 세제곱미터 내외의 안골샘못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이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構)로 흐르면 물 위에 띄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이다.

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로 부르는데 중국 동진(東晉) 때의 절강성의 작은 도시 소흥(紹興)에서 명필 왕희지(王羲之, 321~379)로부터 비롯되었다. 왕희지는 난정(蘭亭)에서 가까운 문인 41명을 초대해 시회를 즐겼다. 난정이 포석정과 다른 것은 자연석을 이용해 물길을 만들었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명대에 편찬된 난정수회도(蘭亭修會圖)는 그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연꽃 속에 술잔을 넣어 물 위에 띄워 놓고 유상곡수를 즐기는데 시를 짓지 못한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고 적혀있다,

포석정은 동서의 긴축 10.3미터, 가운데 회측 길이 4.9미터이며 수로의 폭은 일정치 않으나 평균 30센티미터 정도며 깊이도 일정치 않지만 평균 22센티미터다. 측벽을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높이는 20cm 정도인데도 폭은 15cm 정도로 매우 안정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로의 입구와 출구에서의 낙차는 40센티미터 정도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의 포석정은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渦流, 회돌이)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한다. 포석정의 수로에서 물이 흘러 나가는데 1~2분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시를 한 수 지으려면 최소한 7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다.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아 수로를 따라 흐르지 않는 것이다.

유동훈 교수의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포석정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으로 확실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난다. 포석정에서 물이 흘러가는 도중에 10여 개 군데에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며 그중 2군데에서 매우 큰 회돌이가 일어난다. 포석정은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꾸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이 전복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매우 특이한 예이다. 보통 수로를 설계할 때 공학적으로 소용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한다. 소용돌이 현상이 일어나면 물이 돌아 흘러가는 부분에서 벽에 충돌하여 에너지가 분산되어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우유의 살균법으로 설명하자면, 우유 속에 있는 유해균이 온도 A에서 시간 T분 동안 노출되면 전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원형 용기 전 표면을 통해 온도 A+α 이상의 열기를 골고루 주었을 때 어느 지점에 있는 우유가 가장 늦게 온도 A에 이르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지점에 있는 우유의 온도가 T0분 만에 온도 A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면 T+T0분 동안 열기를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한 유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필자의 논문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1>은 열기가 투입된 직후의 유체 흐름으로 정상 상태의 회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용기 안의 유체는 자연 대류 현상을 일으켜 <그림 2>와 같은 흐름으로 변형된다. 즉, 우측 하단부에 주 흐름과는 반대되는 작은 흐름이 나타나고 <그림 3>과 같이 몇 개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회전 현상이 생긴 후에도 계속 열을 공급하면 회돌이 현상이 변해 <그림 1>과 같은 정상 상태로 바뀌며 에너지 공급은 중단되고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

우주선을 발사하기 직전 액체연료 탱크 안에 있는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에도 이와 같은 회돌이 현상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우유를 포함한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인 용도를 위해서는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한다. 회돌이 현상은 유체의 주 흐름과의 충돌 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뜻하므로 유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하는 곤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배를 유선형으로 설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포석정에 이런 고차원적인 과학기술이 접목되었다고 설명해도 비판적인 사람들은 신라인들이 그런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여 포석정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석정에서 회돌이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연히 시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대학교 유동훈 교수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포석정에서 초반 회돌이가 형성되는 단면은 내측 함몰이 19mm에 이를 정도로 유난히 심하다. 이는 흐름이 굴곡부에서 원심력을 받아 바깥쪽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원심력을 감소시켜 회돌이 형성을 뚜렷하게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내측의 수로 벽면이 약간의 역경사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것도 단순한 미적 감각 때문이 아니라 수리학적인 이유, 즉 회돌이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후반부 회돌이는 급한 횡굴곡이 있는 곳에서 생기는데 이는 초반 회돌이가 생기는 지점과 다른 요인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초반 회돌이 지점에서는 횡단면이 내측으로 상당히 함몰된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만, 두 번째 회돌이 지점을 포함하여 후반 회돌이 구간 거의 모든 단면은 내측의 함몰 없이 평평한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다시 부가된 관성력이 초반 인입 구간에서 형성된 관성력에 비하여 약하기 때문에 내측 함몰 없이 사전 횡굴곡만으로도 회돌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포석정의 경우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신라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구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이 전복되지 않도록 설계했다.

이론물리학에서 포석정의 물길에서 나타나는 난류는 골머리 아픈 문제로 유서가 깊다. 순조로운 유체의 흐름이 갑자기 나선형 흐름과 소용돌이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에너지가 급격하게 대규모 운동에서 빠져나와 소규모 운동으로 흩어지는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문제였는가 하면 양자역학을 수립한 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말로도 알 수 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두 가지 문제를 하느님께 물어보겠다는 말을 꺼냈다. 하나는 상대성이 생기는 이유, 다른 하나는 난류가 생기는 이유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은 첫 번째 문제에는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난류는 카오스 영역에 속한다. 카오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자연의 본질이다. 카오스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모습에도 질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 질서는 비선형적이어서 안타깝게도 어떤 현상의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게다가 초기조건에 대단히 민감해서 약간만 다른 조건에서 시작해도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카오스의 기본 원리다.

포석정의 난류도 카오스의 산물이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자연의 본질인 카오스를 포석정 물길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해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회돌이 형성 부분에 따라 포석정 수로의 구조를 다르게 만든 것은 신라인들이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고도의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신라의 선조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포석정을 만드는 현장을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고대의 과학적인 진실에 대해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과거 유럽에서 유체역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포석정에서 사용되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어떻게 연구했나를 알아보면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다.

과거에는 유체 이동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가지의 서로 다른 샘플을 만들어 샘플마다 최소한 1천 번 이상의 반복 실험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므로 한 샘플 당 실험하는 데 하루가 소요된다면 최소한 15년이 지나야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필자는 신라인들이 포석정의 회돌이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적어도 수천 번 이상의 실험을 거쳤다고 확신한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 속도, 수로의 형태⋅폭⋅깊이, 측면의 만곡률, 표면장력, 술잔의 형상⋅크기⋅중량⋅초기 위치 등을 치밀하게 고려해가며 수많은 반복 실험을 했을 것이다.

<신전으로서의 포석정>

포석정의 과학을 보면 서양과학은 논리적이며 동양과학은 비논리적이라는 구태의연한 고정관념을 깨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남문현 박사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조선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뿌리가 바로 포석정에 깃든 공학기술의 지혜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포석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라기보다는 신탁이 행해지는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원래 중국에서는 포석정이 건물 안에 설치되는 것이 정설인데, 우리의 포석정도 건물 안에 세워져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이다. 이런 장소를 두고 규모도 크지 않은 포석정에서 노천 파티를 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된 날짜는 음력 11월 양력으로는 12월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추울 때이다. 이런 날 노천의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왕비 등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포석정을 방문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경애왕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을 방문한 것은 쓰러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해 제사 혹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여겨진다.

포석정이 단순한 노천 파티장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삼국사기』 문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기되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며 놀았다(遊鮑石亭宴娛)’에서 ‘유(遊)’를 ‘놀았다’가 아니라 ‘갔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에 작성되었음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저자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과 새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부각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의 정종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애왕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즉 팔관회(八關會)를 열기 위해서 포석정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라는 진흥왕 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 때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팔관회를 열었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도 몽고가 침입했을 때 강화에서 팔관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아 팔관회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치러진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팔관회가 열렸던 시절은 모두 음력 11월이었다. 정종목은 견훤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던 때,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아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이종욱 교수도 포석정을 시조묘와 연관시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같은 인물을 모신 사당 즉 신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박씨로 왕위에 오른 경애왕도 조상들을 찾아가 나라를 수호하고 박씨 왕의 지위를 유지시켜 달라고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석정에서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고 1999년에는 ‘포석(鮑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기와조각이 나온 곳은 포석정 모형전시관을 건립하려는 포석정 남쪽의 4,300제곱미터의 부지로 시굴 조사과정에서 가로 12센티미터, 가로 16센티미터의 기와에 나뭇가지 무늬와 함께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 6점이 출토된 것이다. 기와에 새겨진 포자는 포석정을 뜻하는 포(鮑)자가 아니라 포(砲)자 인데 학자들은 포(鮑)자를 약자화해 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적으로 포석정은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덕궁 후원의 깊숙한 옥류천 개울가에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