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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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15)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4.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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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지구(서남산(V))

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이 기사는 39회로 연재됩니다.

<문화재보고 삼릉골>

바둑바위 하부를 구성하는 자연 암반에 6미터 높이에 새겨진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는데 깎아내리다가 그만 둔 듯 거칠다. 이같이 신체의 대부분을 선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신라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지만 두툼한 두 뺨과 입언저리에는 조용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다. 가슴 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이며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한데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동쪽에 높이 약13미터, 길이 25미터가 넘는 상사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바위 위에 올라가면 효험을 볼 수 있다 하여 ‘상사바위’라 불린다. 바위 뒤쪽에는 가로 1.44미터, 높이 56센티미터, 깊이 30.3센티미터의 작은 감실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흔적이 보인다. 바위 중간쯤 가로 파인 틈에 많은 돌이 쌓여 있는데 기도한 사람들이 소원 성취를 점쳐 본 흔적을 볼 수 있다. 돌을 던져 그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증거이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 주지 않았다는 증거라 한다. 그 아래에 어깨까지 높이가 불과 0.8미터에 달하는 목이 없는 석불입상 1구가 놓여 있다. 남산에서 가장 작은 불상으로 추정하는데 시무외인과 시여원인의 수인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추정한다. 이는 바위 신앙과 불교 신앙이 합쳐진 신라 민중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삼릉계곡 정상 밑에 있는 소박한 암자인 상선암은 답사로의 이정표가 되는 곳이므로 반듯이 지나쳐야 하는 곳이다. 삼릉계곡에서 올라갈 때 다소 가파른 길로 옛날부터 스님들이 수련을 하거나 참선을 하던 장소이지만 상선암의 위치 때문에 방문객들이 식수를 얻어가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수가 콸콸 샘솟는 여름철과는 달리 겨울에는 암자에서조차 식수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우므로 사전에 식수는 준비해가는 것이 바른 예의다.

상선암에서 약간 휴식한 다음 이어서 내려가는 길이 즐겁다. 보물 666호인 삼릉계곡석불좌상,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삼릉계곡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이 연이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릉계곡석불좌상(보물 666호)은 삼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했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을 보이는데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우측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으며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을 드러나도록 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의 조각이 수준급이며 연화좌는 상대(上臺)에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긴 연잎을 3단으로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조각의 수법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불상의 파손이 심했으므로 근래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했다.

삼릉계곡석불좌상에서 약 300미터 정도 내려오면 남산에서는 드물게 바위에 윤곽을 파서 만든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이 나타난다. 높이 10미터 가량 되는 바위 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몸체는 상단부에 조각되었고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있다. 얼굴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득한 조각 수법이다. 얼굴은 매우 크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민머리는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틀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특히 다리 부분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하여 미완성작품으로 여기기도 한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한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에서 약 500미터 되는 지점에 또 하나의 선각예술품이 있는데 삼릉계곡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이다. 앞뒤의 바위에 윤곽을 파서 여섯 분의 불보살상을 새긴 것인데 최준식 박사는 이 육존불상이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최 박사가 이것을 그림이라고 한 이유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선을 따라 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뒤쪽 바위는 높이 4미터 폭 7미터 정도로 바위면 가운데 본존은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으로 높이는 2.4미터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2.6미터의 협시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는 높이와 폭이 4미터 정도이며 중앙의 본존의 높이는 약 2.65미터이며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1.8미터 정도로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으로 손에는 꽃 또는 다기(茶器) 쟁반을 받쳐 든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했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 한다. 아미타여래는 서있고 좌우 협시불이 무릎을 구부린 자세의 삼존불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매우 성스러운 포즈인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아미타내용도(阿彌陀來迎圖)이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중생들이 서방 극락세계로 올 때 아미타여래가 직접 나와 환영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신라인들은 이 삼존불 앞에 서서 자신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를 만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바위에 이만한 소묘를 하려면 수많은 사전 탱화를 그려본 솜씨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이런 훌륭한 조각을 하면서도 바위 면을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바위에 새겼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자연존중사상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자연 암석 위로는 인공으로 홈을 파 놓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빗물이 마애불 위로 직접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배수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측 암벽 위에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에서 얼마되지 않아 돌 위에 조각한 1.55미터 정도의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이 나타난다. 돌기둥 같은 암벽에 머리와 상체부분은 선명하게 돋을새김을 한 반면 하체 부분은 그냥 흐지부지 처리했다. 이런 조각법은 남산의 마애불상들에서 많이 보이는 수법이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움직이는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목 없는 석불좌상’은 서남산의 마무리로 적격이다. 높이 1.6미터 너비 1.56미터 정도의 크기로 계곡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현재 위치보다 30미터 남쪽의 땅 속에서 머리가 없는 채로 발견되었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여래 옷을 동여 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어 용장사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조각 형태를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이들 불상을 감상하면서 삼릉으로 내려오면 어렵게만 생각되던 남산 남쪽을 성공리에 답사한 셈이 되지만 지나치지 않아야 할 또 한 장소가 있다. 삼릉 입구의 경애왕릉에서 오른쪽 샛길(일명 삿갈골)을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경주남산 입곡석불두(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가 있는데 위치가 애매하여 답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도 지도만 보고는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보성할매비빔밥 좌측의 성불사 팻말이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면 100미터도 채 지나지 않아 경주남산연구소가 설치한 문화유적탐방로라는 작은 안내판에 ‘삿갓골석조여래입상’이라고 적혀있다. 이곳에서 약 100미터 정도 들어가면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그래도 단 번에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하튼 목적지를 찾는데 약간 고생을 했더라도 머리와 가슴 부분, 허리 밑 부분, 대좌의 세 부분으로 남아 있는 석불입상을 보면 툴툴하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원래는 머리와 가슴 부분 그리고 상체에 붙어 있는 광배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무릎까지 남아 있는 하반신을 발견하였다. 표면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남아 있는 부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는 높은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와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으로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 표현되었다.

눈썹 밑이 깊게 파여진 조각 수법이나 눈초리가 길게 추켜올려진 긴 눈과 굳게 다문 입, 도드라진 인중(人中)의 모습은 모두 입체적인 조각수법을 보여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큰 귀는 길게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이며, 도드라진 옷단이 가슴 아래로 늘어져 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신체는 몸에 꼭 달라붙게 입은 법의와 최소한의 옷주름 선을 통하여 풍만하고 탄력 있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른쪽 가슴 밑에 붙이고 있는 오른손이 손목까지 남아 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는 도드라진 윤곽선 안에 화불(化佛)과 꽃무늬가 배치되었다. 특히 화불의 연화대좌가 구름 모양의 줄기 끝에 올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작 시기는 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서남산에 있는 약수계곡마애입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을 답사하는 것은 상당히 껄끄럽다. 약수골은 안질에 효과 있는 약수가 나온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약수골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다소 가파른 길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단 하나의 마애불이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도중에 정리되지 않은 목 없는 불상이 나타난다. 석가여래상으로 결가부좌며 항마촉지인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부근 어디엔가 묻혀 있을 머리를 찾을 수 있다면 9세기 초의 걸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목없는 불상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며 이곳에서 마애입불상까지는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무난하게 목적지인 약수계곡마애입불상에 도착할 수 있다.

단 하나라 하지만 남산의 많은 마애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몸체는 높이 8.6미터, 폭 4미터나 된다. 머리와 몸체가 지름 9센티미터 되는 철봉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으며 머리의 크기를 1.8미터 정도로 계산하면 이 불상은 10.4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다. 몸의 오른쪽 바깥을 거칠게 다듬기만 하고 광배를 조각했던 흔적은 없다. 머리는 다른 돌을 조각해서 얹은 구조로 아쉽게도 사라져 목 부분만 부근에 남아 있다. 부처의 발은 만들어 붙인 것이고 오른쪽 발이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을 따로 불상 앞에 옮긴 것이다.

엄지와 장지를 마주 잡은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 앞에 들어 설법하는 형상이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흘러내린 비스듬히 옷주름이 양쪽 팔에 걸쳐져 수직으로 내려오는 옷주름이 직선과 곡선의 대조를 이룬다. 부처 몸체 이외의 바깥쪽 바위 면을 깎아내 부처의 몸체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 것도 남다른 재주이지만 옷주름을 3센티미터 정도로 파내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겨 옷주름이 뚜렷이 보이도록 한 것은 솜씨 좋은 장인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걸작품이다.

서남산(2)을 일괄적으로 답사할 때 이곳을 답사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용장골에서 올라가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보물 187호),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 186호)을 답사한 후 금오봉 정상에서 약수골 표지판을 보고 내려가 약수계곡마애입불상을 본 후 다시 금오봉으로 되돌아가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답사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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