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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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21)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5.0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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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 삼층석탑

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선무도의 골굴암>

기림사를 떠나 골굴사(骨窟寺)로 향한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전한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므로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해석도 있다. 골굴암은 한반도에서는 매우 희귀한 형태이다. 한반도에는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굴암의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큰 바위 군데군데에 12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창건 당시 인도의 사원 양식과 비슷한 석굴사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제일 높은 곳의 석굴 벽면에 있는 마애아미타불(보물 581호)이 돋보인다. 이곳을 올라가려면 경사가 급하여 겁을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철 난간 등 안전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 어린아이들도 조심하여 올라가는데 문제가 없다. 높이 4미터, 폭 2.2미터 정도의 마애불상은 얼굴만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위에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며 타원형의 두 눈썹 사이로 백호를 상감했던 자리가 둥글게 파였다. 귀는 어개까지 내려오고 가는 눈에는 잔잔한 웃음이 머물고 굳게 닫힌 입술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있다. 머리 뒤엔 연꽃, 후광에는 가늘게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는데 옷주름은 물결치듯 한 방향으로 조각되었다. 입체감이 뚜렷한 얼굴에 견주어 신체는 다소 평면적이다. 왼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짚어 배 앞에 놓았는데 석회질 암석의 재질이 좋지 않아 우측 손과 무릎 이하 부분은 닳아 없어졌다. 조성 시기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로 보는데 사찰측에서는 9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골굴사는 석굴암의 전면에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논난을 빚을 때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겸재 정선이 「골굴석굴도」를 남겼는데 이 그림에는 목조건물이 덮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숙종 12년(1686)에 나온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에는 ‘여러 채의 목조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묘사했다. 이들 자료가 기초가 되어 석굴암의 전면에 목조건물을 세운 것이다.

골굴사는 불교 무술인 선무도(禪武道)의 본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선무도는 불교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 수행법과 신라 화랑들에게 전수된 심신 수련법으로서 고려, 조선시대 외침에 항거했던 승려들의 무예가 전승된 불가의 전통문화로 알려진다. 선무도를 익히면 각박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신체적 질병을 이겨내고 육체의 불균형을 건강한 신체와 마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설명된다. 즉 몸과 말, 사유가 따라 따로 노는 것을 방지하고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수련법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종교차원이 아니라 심신 단련이라는 차원에서 염두에 둘 만하다고 추천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30분에 ‘선무도와 문화예술’이라는 이름의 공연이 펼쳐진다. 원래 대적광장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데 비나 눈이 올 경우 실내에서 진행한다. 필자가 수많은 무예영화를 보았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이 실제로 나올 수 있는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펼쳐지는 무예를 보니 인간의 능력이 더 없이 신기롭게 보인다. 골굴사는 또 전국 모든 사찰들 중에서도 템플스테이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데 선무도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 외국인만도 연간 3000여 명이 골굴사를 찾는다고 한다. 실제로 신문이나 TV에서 외국인들이 기암 절벽에서 권법 자세를 취하곤 하는데 그 장면들은 바로 이곳 골굴사의 선무도 수련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최대의 쌍탑>

기림사, 골굴암을 거친 다음 문무대왕과 연계되는 감은사터, 대왕암, 이견대 순으로 진행한다. 신라는 후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일본에 건너가 신라의 가야 정복 이후 소원해진 일본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당나라로 건너가 당의 군사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당이 신라와 협약을 맺은 것은 신라와의 협공을 통하여 북방의 골칫거리인 고구려를 격멸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결국 660년에 백제, 668년에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킨다. 문무왕은 부왕인 무열왕의 장자로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이다.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으로서는 삼국 통일의 와중에서 신라를 견제하였던 일본의 침공이 항상 두통거리였다. 그 대응책의 하나로 예부터 왜구의 상륙 지점으로 지목되었던 동해구에 국방의 뜻을 지닌 국찰(國刹), 감은사를 세웠다. 감은사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대왕암과 마주하고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다음과 같이 감은사의 창건에 대해 적혀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지었으나 완공시키지 못하고 죽어서 해룡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완공을 보았고, 금당의 계단 아래를 파고 동족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었다. 용이 절로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1980년까지의 몇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쌍탑 가람인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두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회랑은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의 길이가 길고, 중회랑을 둔 것이 특징이다. 금당의 바닥에는 H자형의 받침돌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위에다 긴 네모꼴의 돌을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돌마루를 얹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금당 바닥에도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비워두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에서 용이 된 문무왕이 금당에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배치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데 원래 감은사 금당 아래에는 동해까지 통하는 물길이 잡혀 있었다고 추정한다.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사찰 앞을 흐르는 대종천을 타고 올라와 그 물길로 절까지 닿을 수 있도록 하려는 설계다. 지금도 절터의 석축 바깥에는 용담이라 부르는 연못이 남아 있다. 용이 된 문무왕이 신라 때에 대종천을 타고 동해에서 감은사까지 오갔다고 하는데 대종천(大鐘川)의 전설은 매우 그럴 듯하다. 1238년 몽골군의 침략 때 몽골군은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을 불태운 후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보다 네 배가 큰 황룡사종을 가져가려고 했다. 에밀레종의 네 배 이상 크기라면 무게가 80톤을 헤아린다. 몽골군들은 대종천을 이용하여 황룡사종을 실어 나르려 했는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이 이를 보고도 가만 놔둘 리 없는 일이다. 몽고군들이 종을 싣고 배를 띄워 동해로 들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배는 뒤집혔고, 대종도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 이후 대종천에는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무서운 날이면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려 나왔다고 한다. 현재 과거에 감은사까지 도달했을 대종천은 지형이 바뀌어 육지로 변했지만 황룡사의 대종이 전설대로 바다에 가라앉았다면 언젠가 우리들의 눈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황룡사 대종 찾는 작업에 도전하기 바란다. 참고적으로 황룡사 종은 고려 숙종 때 녹여서 다시 작은 종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몽골군이 가져가려다 빠트렸다는 것은 이 작은 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감은사 절터에는 동ㆍ서로 떨어진 높이 13m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삼층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두 기의 쌍탑(국보 제112호)이 있다. 두 석탑은 백제와 신라의 양식이 함께 어우러진 석조 미술품의 진수로 잘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 처음에는 탑을 하나만 세웠는데, 통일신라 이후로는 쌍탑을 세우고 그 뒷면 중앙에 금당을 지었는데 감은사의 쌍탑은 이 흐름을 보여주는 최초의 유적이다.

이들 석탑의 큰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매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 있다. 상층 기단 면석 역시 12매, 갑석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2주의 탱주가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 몸돌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했다. 지붕돌의 구성은 각층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각기 따로 조립되었으며 각각 4매석이다. 층급받침은 각층 5단으로 짜여졌고 낙수면의 정상에는 2단의 높은 굄이 있으며 낙수면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탑의 완성도는 안정감과 상승감으로 대표되는데 이들 석탑은 이런 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걸작이다. 3개의 몸돌은 그 폭이 4:3:2로 상승감을 보이며 높이는 4:3:2가 아닌 4:2:2로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것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이다. 감은사지 쌍탑에서 모두 사리함이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1959년 서탑에서 수레모양의 청동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정교한 연화문이 새겨진 얇은 동판 위에 복부를 만들고 4각 모서리에 여덟 개의 감실을 만들어 팔부신장을 안치했다. 또 중심부에는 작은 보주형의 사리탑을 만들어 그 모서리에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좌상을 안치했다.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성과 종교적 감성이 잘 어우러진 이 사리함은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1996년 동탑 수리 때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금동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사리함은 최상의 재료와 고도의 공예술을 발휘하여 만들었다. 사리함은 금제의 뚜껑이 덮인 수정제 사리병과 부처가 타는 청동제 수레인 보련(寶輦) 등을 갖추었다. 사리병을 담았던 외함에는 사천왕상의 부조가 있다. 여덟 신장을 관장하는 사천왕은 식욕, 육욕, 잠 등의 욕계(欲界)까지 함께 다스리는 사왕천의 주신이다. 사천왕 중 하나인 지국천왕은 왼손에 칼을 잡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데 간다라 미술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 윤곽은 사뭇 동양적이다.

그런데 감은사의 건립 설화에 근거해 동탑의 사리는 문무왕의 것일지 모른다는 설명도 있었다. 동탑 사리함에 달린 용 조각은 해룡이 되겠다던 문무왕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여러 논거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불교계 및 학계 일각에서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문무왕의 시신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으며 불탑에 왕의 사리를 넣었다는 추정은 불교 교리상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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