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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23)서역인의 고향 신라(I)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5.1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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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서역인의 등장>

문무대왕릉, 감은사를 거쳐 경주로 들어가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관문성(사적 48호), 원원사(遠願寺, 사적 제46호), 숭복사, 괘릉(사적 26호), 영지와 석불좌상(유형문화재 204호) 등이다. 이 답사로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남산지구를 주파한 후 영지, 괘릉, 숭복사, 원원사를 거쳐 대왕암, 감은사를 거치는 일정인데 이 중간에 불국사, 석굴암이 있으므로 각자의 일정 편의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기 바란다. 왜구들은 박혁거세 때도 침입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으므로 신라는 이들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현재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문성으로 성덕왕 21년(722)에 쌓았다. 관문성은 신라의 왕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므로 신라인들이 매우 중요시한 곳이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길게 뻗은 성이기 때문에 만리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성벽의 길이가 무려 12킬로미터나 되지만 찾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동차 여행의 필수품인 내비게이션으로도 나타나지 않고 지도에는 단지 모화역 인근 태화고등학교 옆에 있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주민들에게 일일이 확인해도 정확하게 답변해주는 사람이 없다. 결국 인근에서 제일 가까운 울산중부경찰서 중산치안센터를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이야기를 듣더니 이용수 경사가 흔쾌하게 자신이 현장을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이용수 경사가 안내한 곳은 치안센터에서 100여 미터도 못되는 곳에 있는데 경주와 울산 사이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이므로 차량이 많아 알아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관문성은 경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1킬로미터 떨어진 외통읍 부근의 산에 축조되어 있다. 한 개의 성이 아니라 치술령과 모화리 동편의 산 사이에 길이 12킬로미터 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킬로미터 정도의 두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관문성을 모벌군성, 모벌관문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은 만리성이라고 한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 병사터 등이 여러군데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남산성과 관문성의 석벽을 비교해 볼 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서 관문성을 쌓은 기술이 훨씬 발달된 것으로 여겨진다.’이용수 경사에게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에 이름을 적어도 되냐고 하니 우리나라의 유산의 현장을 알려주는 것인데 문제가 될 것이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이 경사가 아니었으면 몇 시간을 더 헤매었을지 모르므로 적는다. 관문성의 현장을 찾아 신라 국방의 요소를 이해하는 선에서 발길을 돌려 『삼국유사』에 자주나오는 원원사(遠願寺, 사적 제46호)터로 방향을 잡는다. 모화역 부근의 ‘모화불고기단지’를 거쳐 다소 불편한 산길로 들어가면 호국불교 차원에서 김유신 등이 발원하여 세운 원원사에 닿는다. 안혜 등 4명의 고승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과 더불어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 나아가 삼국통일을 기원하여 세운 원원사는 장대한 석축을 이용한 산지가람으로 비탈진 산 지형을 잘 이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구원원사터를 찾아가려면 근래에 새로 지은 원원사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겁먹을 필요없다. 신원원사의 종루를 우측으로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구원원사터로 현재의 대웅전보다 높은 곳이다. 금당터 앞의 높이 7미터인 두 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은 1933년에 복원한 것으로 구조와 양식이 같은데 기단부와 탑신부에 새겨진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의 조각이 빼어나다. 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 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괴임이 있다. 상층 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에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다. 이들은 머리는 동물의 모습인데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다. 또한 1층 탑신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각 면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사천왕상은 옷깃이 펄럭이는 모습으로 보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이 이들 탑에 큰 점수를 주는 것은 탑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드문 예임은 물론 12지신상들이 무복(武服)이 아니라 평복을 입고 자세 또한 앉아 있다는 점이다. 능묘에 둘러진 12지신상은 모두 서 있는 자세를 취한다. 다른 탑들에 비하여 한층 두드러지게 표현된 서탑의 사천왕상은 남면의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만이 깨어져 있고, 동·서·북방의 상들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동방의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은 정면향으로서, 두 손으로는 칼을 받쳐잡고 있으며, 왼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어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과 왼쪽 가슴 부분이 모두 깨어진 서방의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은 일고저(一鈷杵)로 생각되는 무기를 들고 있는데, 정면향으로 똑바로 서 있어 경직되어 보이며,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틀어 변화를 주고 있는 북방의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은 특이하게도 두 마리의 악귀를 밟고 있다. 들어 올린 두 손 중 오른손에는 보주를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방형의 보탑을 받쳐 들고 있다.

학자들의 눈썰미는 예리하다. 이들 탑의 조성 연대로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동서로 마주한 2기의 쌍탑에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이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원래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고, 십이지신상은 열두 방위를 수호하는 형세인데다 탑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일은 드물다는 것 등을 고려하면 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김유신 후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 중기가 되는 8세기에는 석탑 표면에 여러 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일이 시작되고 9세기 이후에는 더 크게 유행한다. 이 시기부터는 탑 자체의 존엄성보다는 장식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원원사터의 삼층석탑과 경주남산동 삼층쌍탑 중 서쪽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원원사에서 나와 경주 쪽을 향해 조금 북향하면 우측에 숭복사지3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4호)이 나온다. 숭복사는 신라 원성왕을 위해 곡사(鵠寺)를 옮겨 지은 것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가 있었던 곳인데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사본만 전해온다. 최치원이 숭복사비문을 지은 것은 아버지 최견일이 곡사를 옮겨 숭복사를 만들 때 종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강왕이 이 일을 상기시키며 숭복사비문을 짓도록 하자 그는 ‘비록 벼슬을 했다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헛된 영화릴 뿐 명령을 받고 깜짝 놀라 스스로를 어루만지며 슬퍼 목이 메었다’고 적었다. 그는 왕명을 받은 지 한참 뒤인 진성여왕 때 숭복사 비문을 완성했다. 거북보양의 받침돌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있다. 탑은 동서에 2기가 있는데 현재의 높이는 동탑 약 4.3미터, 서탑 약 3.2미터다.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은 두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몸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동탑은 2층 몸돌, 서탑은 2층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이 사라지고 두 탑 모두 윗부분은 없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했고 2층 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1개의 안기둥을 조각했다. 2층 기단에는 각면이 안기둥에 의해 2개로 구획되어 4면에 8개의 구획이 있다. 4면의 이 구획 안에 각각 2구씩의 팔부신중상을 조각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숭복사에서 나와 사적 26호인 괘릉으로 향한다. 경주 시내에서 12km 떨어진 괘릉(掛陵)은 원성왕(785∼798년 재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괘릉이란 이름은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유해를 연못 위에 줄로 걸어서 장사지냈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이다. 입구에 1쌍의 석주가 마주 서있고 그 뒤에 무인상 1쌍, 문인상 1쌍, 돌사자 2쌍이 약 25미터 간격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이들은 보물 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능묘 주위에 석물이 배치되기 시작하는 것은 8세기 무렵부터인데 이는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수용한 결과다. 돌사자는 힘이 넘쳐 한 발은 땅을 집고 한 발로는 땅을 파헤치고 있으며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봉분의 밑둘레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護石)을 둘렀고 그 주위로 수십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안상을 새긴 석상을 놓았다.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특히 십이지신상의 힘찬 조각 수법은 당시 신라인들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십이지신상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대상이므로 보다 설명한다. 십이지(十二支)는 십간(十干)과 함께 중국 역법에서 많이 사용하는 수 체계로 하늘의 기상인 천기에 대비되는 대지의 정기인 지기에 속하며 음양오행과도 결부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역월(曆月), 방위, 시각 등 다방면에 이용되고 있다. 십이지신상이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대부분 사람과 매우 친한 동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이한 것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매우 가까이 지내는 고양이가 빠지고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쥐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쥐가 부지런하고 한 번에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 다산의 습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12지신의 배열에 관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12지신의 배열은 매우 심오한 우주 생성원리와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12는 1년이 열두 달로 나뉘는 것, 그리고 공간 개념과 시(時)와 같은 근원과 숫자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십이지의 시간적 개념은 불교에서 12지연기와 관련이 있다. 불교의 근본 교리에는 행(行)⋅식(識)⋅애(愛)⋅유(有)⋅생(生) 등 12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윤회하며 존재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흐르는 규칙성 즉 생명의 존재 양식이 12지연기와 관련된다. 한 가지 예로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이르기까지 12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대문을 통과할 때마다 갖가지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이승에서 덕을 베풀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12라는 숫자는 매우 신성하게 받아들였으며 인간의 염원을 기원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은 이들의 순서가 달리기를 통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하늘을 날 수 있는 용이 네 번째로 들어오고 몸집이 가장 작은 쥐나 동작이 느린 소가 1, 2등을 차지했으니 다소 헷갈리기 마련이다. 설화로 알려진 이들의 달리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데 대체로 대동소이하므로 그 중 한 가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석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혹은 새해 인사를 받기 위해) 세상의 뭇짐승들을 소집했다. 부처는 이들 동물이 도착한 순서에 따라 천국으로 통하는 12대문의 수문장으로 삼아 해마다 1년씩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 임무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소는 걸음걸이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느리므로 특별히 간청하여 하루 전날 저녁에 출발케 해 달라고 했다. 부처는 소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소는 덕분에 석가의 궁궐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약삭빠른 쥐는 소의 동태를 살피다가 잽싸게 소 등에 올라타 소가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재빨리 뛰어 내려 소보다 먼저 문안에 들어와서 1등이 되었다. 쥐, 소를 이어 호랑이는 3등, 달리기에 자신이 있는 토끼는 도중에 낮잠을 자는 바람에 4등이 되고 속도라면 자신있는 용은 날아오다가 하늘 나라에 열려 있는 과일을 발견하고 이것을 따먹느라 지체해 5등으로 도착했다. 뱀, 양, 원숭이 등의 순으로 도착했는데 닭은 사람들에게 날이 밝은 것을 알리고 출발했기 때문에 늦게 도착했고 이어서 개, 돼지 차례로 들어왔다.’ 이같은 십이지의 순서가 단순히 달리기에 의해서 선정되었다는 것이 참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십이지에 나타나는 동물을 보면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요인들이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린, 봉황은 물론 신성하다고 여겼던 십장생의 사슴, 거북, 학 등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십이지신이 각별히 특별한 상징성을 보여주는 동물들을 선택하지 않았음은 알 수 있다. 반면에 십이지신은 인간의 일상 생활과 밀착된 동물들로 이들은 모두 농사와 관련된다. 용도 상상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쥐를 제외하면 모두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동물들로(프랑스와 같이 쥐를 먹는 나라도 있음) 이들 동물이 가족의 건강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설명된다.

12지 동물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사실은 순서에 일정한 규칙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발가락 수이다. 즉 쥐의 발가락은 9개, 소 4개, 호랑이 5개, 토끼 2개, 용 5개, 뱀 0개, 말 1개, 양 4개, 원숭이 5개, 닭 4개, 개 5개, 돼지 4개로 12동물의 발가락 수는 홀수, 짝수, 홀수, 짝수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런 규칙성을 발가락 우기설(偶奇設)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깊이 박힌 음양오행사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12지가 홀⋅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음⋅양의 순화적 조합을 포함하고도 있는 인간의 물질과 정신 세계를 모두 적합시킨 고도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내용을 감안하면 무덤이나 사찰에서 중요한 소재로 12지신을 사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조성호 기자  alpha286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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