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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경주역사유적지구(26)낭산(II)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5.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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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천왕사터 바로 옆에 망덕사터가 있다. 두 사찰 모두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지만 건축 배경은 전혀 다르다. 즉 사천왕사가 부처의 힘을 빌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려고 지은 것임에 반해 망덕사는 당 황제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공격에 나선 당군의 배들이 번번히 침몰되자 당 고종이 김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는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을 불러 “신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준은 고국을 떠난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하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수명(萬年壽命)을 빌고 있다고 대답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는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찰을 사신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보여주었다. 그런데 작붕귀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이라는 절이라며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신라에서 금 1,000냥을 뇌물로 주었더니 돌아가서 신라에서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신라인들은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불렀다.’이렇게 급조한 망덕사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것은 효소왕 1년(692)이고 효소왕 6년에 낙성식을 치른다. 망덕사에는 13층인 두 개의 목탑(실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층수 상 가장 높은 탑)이 건설되었는데 바람에 의해 쉽게 흔들려 탑이 서로 부딪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망덕사지에는 당탑⋅보랑⋅목조탑 유구 및 보물 제69호인 2.5미터, 65센티미터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있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안쪽 위에 장방형의 구멍을 만들어 당간을 세운 상태로 고정시키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적 182호인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산길이 이어진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이 여자인데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성골(聖骨) 남자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선덕여왕릉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지정한 곳에 쓴 묘소로 유명하다. 선덕여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으면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알려주었다. 과연 선덕여왕은 자신이 예고한 바로 그 날에 죽었다. 신하들은 왕이 예고한 낭산 양지에 그녀를 장사지낸 후 30여 년이 지난 뒤에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帝釋天)이 다스리는 도리천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지만 남다른 내우외환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신라가 삼국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시기라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유명한 연개소문이 등장했고 백제의 의자왕이 시시탐탐 신라를 노렸는데 선덕여왕은 김유신 등을 통하여 신라통일의 기틀을 쌓았다. 내부적으로는 불교 융성에 힘써 분황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선덕여왕 때 유달리 불사가 많은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 만 해도 25개가 된다. 이와 같이 선덕여왕 대에 불사가 많은 것은 여러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원광⋅자장⋅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나타나 불교신자가 크게 증가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당대에 고탄소강의 철물로 만든 철제 농기구 등의 활용으로 농업생산량이 증대하여 백성들 가운데 사찰에 시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찰을 세우면 해당 사찰의 운영과 승려들의 생활이 보장될 만큼 시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승려들이 앞을 다투어 사원을 창건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선덕여왕릉은 둘레 약 73미터, 높이 6.8미터의 평이한 원형봉토분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이 특징이며 십이지상 조각이 있을 위치에 커다란 돌들이 세워져 있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무덤 쪽을 향해 소나무들이 무덤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듣는다. 선덕여왕릉을 뒤로 하고 산길을 조금만 걸으면 중생사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능지탑(능시탑 또는 연화탑)이 있다. 무덤처럼 생겼지만 무덤이 아니라 탑이다. 본래 5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1979년 2층까지만 쌓았다. 인근에서 문무대왕릉비의 파편이 발견되었고 1971년 발굴 조사 때 정상 부근에서 검게 불에 탄 지층과 숯 조각이 나왔기 때문에 문무왕의 유해를 화장한 장소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토단 낙수면 중앙에 토층 옥개부를 여러 매의 석주로 짜 맞추고 상부에 연화석을 놓았다. 상층 옥신의 한 변은 길이 12m, 높이 70cm이며, 그 상부에 하층과는 달리 마감돌을 갑석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능지탑의 기단부에는 12지신상의 조각이 끼워져 있는데 자상(쥐)만이 평복을 하고 나머지는 무복(武服) 차림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오상(말)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능지탑의 탱주석(撐柱石) 표면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능지탑 탱주석의 일부도 12지신상과 함께 능묘에 사용되었던 것이 거칠게 다듬어져 이곳에 배치되었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능지탑에서 약 150미터 떨어진 곳에 중생사가 있는데 이곳 지장전에 보물 665호인 마애삼존불이 있다. ‘마애’라면 흔히 절벽 같은 암석이 연상되지만 이곳은 그저 땅에 놓인 바위일 뿐이다. 안내판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살상과 신장상(神將像)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중략) 왼쪽 신장상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중생사 삼존불은 안내판의 해설을 미리 읽지 않고서는 본존(本尊)과 좌우의 두 신장상 모두 그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본존은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본존은 모자를 쓴 모습인데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식이다. 보발을 두 어깨에 드리우고 띠 줄이 있는 법의를 몸에 걸치고 있어 스님의 복장에 가깝다. 수인은 생략되었으며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두광과 신광도 갖추고 있다. 현재 보호각으로 전체를 덮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특히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은 고려 불화에 보이는 피모지장보살의 모습과 유사하여 이런 양식의 선행 예로 생각한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는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중생사에 있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가장 큰 대불이다. 이 보살상은 목 부분이 동강난 채 얼굴 부분만 발견되었는데 낭산 서쪽의 중생사 부근의 땅에서 반쯤 묻힌 상태의 몸통이 발견되어 1997년 얼굴과 몸체를 결합하는 대수술을 거쳐 제 자리를 찾았다. 오른손은 가슴을 향하고 왼손은 정병을 들고 있는데 몸통은 남자 몸과 여자 몸을 섞어 놓은 듯 유려하고 아름답다. 중생사마애삼존불을 지나면 신문왕이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황복사터가 나온다. 황복사는 의상대사와 인연이 깊어 그의 명성과 더불어 그 지위도 높아져 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성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황복사에 머물면서 동료들과 함께 탑돌이를 할 때 매번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를 밟지 아니하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경명왕(917〜924)을 이곳에서 화장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연혁은 알려지지 않아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곳에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삼층석탑(皇福寺址三層石塔)이 보인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규모가 다소 작다. 앞선 탑들과 기단부의 양식은 같으나 하층 기단 면석의 탱주가 3주에서 2주로 변했다. 그리고 몸돌도 각 면을 판석으로 짜 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도 따로 세우지 않고 각층 몸돌의 양모서리를 조각하여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1942년 일제강점기 때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탑신 윗면에서 신룡(神龍) 2년(706)의 기록이 적혀 있는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사리를 담았던 녹색 유리사리병은 방형의 금합, 은합, 금동외함(金銅外函) 순으로 중첩 봉안되어 있었다. 또한 금동외함 안에서는 사리기 이외에 금제불입상과 좌상, 그리고 금동제고배(金銅製高杯) 2점과 은제고배 2점, 녹색 유리 편, 녹색 유리구슬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706년 불사리,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 금제아미타상(金製阿彌陀像) 1구가 납입되었다는 기록에 의해 704년 중국에서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곧바로 신라에 영향을 주어 경전이 탑에 안치되고 그에 의거해 사리가 안치되었음을 알려준다.

높이 14센티미터로 국보 제 80호인 금제여래입상은 민머리, 고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다. 손은 큰 편이며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을 취하고 왼손은 가사 자락을 쥐고 있다. 얼굴 모습, 가사를 착용하는 방법, 층단식의 옷주름의 표현 방법에서 뿐 아니라 대좌와 광배의 문양까지도 삼국시대의 불상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초기에도 삼국시대 말기의 모습을 띤 불상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불상은 두께가 매우 얇아 1㎜도 채 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주조 기술로 만든 것으로 당시의 주조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처음 신문왕을 기려 탑을 건립하기 시작한 692년에 납입된 불상으로 추정한다. 높이 12.2센티미터의 국보 제79호인 순금제여래좌상은 사리외함 뚜껑의 명문에 성덕왕이 706년 탑 속에 안치했다고 하는 아미타불이 바로 이 불상이다. 본존불뿐 아니라 광배와 대좌까지도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매우 희귀한 불상으로, 비록 소형이지만 대형 불상 못지 않게 완벽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으며 세부 표현도 매우 뛰어나다.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양 무릎과 옷주름, 마치 움직이듯이 표현된 양손의 입체적 조형 등 세부 표현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으로의 이행을 시사해주고 있어 신목왕후와 효소왕을 위하여 납입한 ‘전금미타상(全金彌陀像)’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금은 매우 귀하여 본존 몸체는 순금으로 만들었지만, 광배와 대좌는 청동에 금을 도금한 금동제이다. 이들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성호 기자  alpha286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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