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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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28)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6.1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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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II)

이종호박사(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황룡사>

진평왕릉, 효공왕릉,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호) 등을 만나본 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황룡사지구는 경주박물관, 안압지와 지척의 거리 소위 말해 코 닫는 거리에 있는데 공터만 남아 있는 사적 6호의 황룡사지와 국보 30호로 지정된 분황사탑만 포함된다. 이 두 사찰은 흥륜사와 함께 신라 초기 사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특히 황룡사는 신라의 사찰 가운데 가장 큰 절로 대지가 약 2만여 평, 동서가 288미터, 남북이 281미터에 달한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원래 사찰을 지으려고 한 장소가 아니라 궁궐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우물 속에서 황룡이 나오는 바람에 신라 변방 아홉 개 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궁궐 짓기를 포기하고 황룡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황룡사는 자비마립간 12년(469)에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인 방리제(坊里制)가 실시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 왕경에서 하나의 방(坊)의 크기는 대략 동서 160미터, 남북 140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결과 황룡사의 경계는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로 이것은 대체로 4개의 방리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면적이다. 황룡사터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이때 원래 늪지였던 땅을 매립해 대지를 만들었다. 황룡사지는 발굴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 있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서회랑을 놓아 백제의 1탑1금당 형식이었다. 황룡사라면 645년에 완성된 9층 목탑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탑은 높이가 80미터에 이르는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에 목탑을 세우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대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자장은 신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큰 우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자장이 귀국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신인은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자신의 큰아들이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주변 9나라가 복종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9층탑 세울 것을 건의하자 신하들이 백제에서 기술자를 데려와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는데 처음 목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아비지가 불안하여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탑을 완성시켰다.’ 『삼국유사』의 글만 보더라도 황룡사탑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80미터나 되는 목조탑은 나무의 결구에서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없으면 건설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탑 기술이 부족하여 신라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던 백제의 탑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탑을 완성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소위 외국에서 기술자를 초청하여 완성한 것인데 백제는 640년에 이미 익산 미륵사에 구층 목탑을 건설했으므로 충분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유사』에 9층탑을 세우면 아홉 나라가 복종한다고 했는데 아홉 나라를 보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으로 이 중에는 백제와 고구려는 빠져 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이질적인 국가가 아니라 당연히 합쳐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추정도 있다. 여하튼 중건된 2차 가람은 9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공했는데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을 제거했다. 중문을 창건 가람의 남쪽에 새로 설치하고 그 북쪽에 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금당의 동․서쪽에 동․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1탑3금당의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후 통일신라시대에 종루와 경루를 정방형으로 개조하고 동․서회랑을 개조하여 남북자오선을 중심축으로 중앙에 금당, 그 좌우에 또 다른 전각, 그 남방에 탑, 북방에 강당, 탑 전방좌우에 또 다른 건물, 그리고 중문과 강당 좌우로 장방형으로 회랑을 두른 1탑3금당의 변형된 가람형식을 하고 있다. 특히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회가 자주 열렸고 자장이나 원광과 같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실제로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설명도 있다. 황룡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벽화 속의 노송이 실물과 꼭같이 그려져서 자주 새들이 앉으려다 미끄러졌으나 황룡사의 스님이 새로 색칠을 한 이후로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금동장륙상이라 불리는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쇼카 왕이 쇠와 금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뒤 최후로 배에 구리 57,000근, 황금 40,000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어 보내면서 인연 있는 곳에서 조성되기를 빌었더니 이 배가 신라에 닿았다. 이들 재료로 진흥왕 35년(574)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 불상의 기원을 불교의 고향인 인도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추측한다. 여하튼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황룡사탑을 건설된 지 20여년이 지나 곧바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현재 금당 주위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이 바로 이 금동장륙상을 안치하였던 대좌다. 이 대좌만 보아도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좌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런 모양은 좌우협시불의 대좌도 마찬가지이다. 황룡사의 자랑거리는 이뿐이 아니다. 황룡사에는 754년에 주조된 황룡사 대종이 있었는데 종은 에밀레종의 네 배나 된다고 알려진다. 발굴 결과 발견된 유물이 4만여 점에 이르렀는데 목탑지 심초석 밑에 있는 넓은 판석 중앙에는 사리를 봉안하였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패어 있었고, 그 위에 석재의 덮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심초석 아래의 거대한 판석 밑에서는 금동태환이식(金銅太環耳飾)․동경(銅鏡)․백자호(白磁壺)․수정옥(水晶玉) 등 2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리를 봉안하고 심주를 세우기 전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 장엄구였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황룡사 강당 자리 북동쪽에서 출토된 높이 18.2센티미터, 최대 폭 105센티미터의 대형치미다. 이와 같은 크기의 치미는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이 큰 것이다. 치미는 길상과 벽사의 의미로 궁궐이나 사찰의 용마루 끝에 사용되던 장식기와인데 이렇듯 거대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다.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룡사 탑은 워낙 높은 관계로 몇 번이나 벼락을 맞고 보수를 거듭했는데 1238년 몽골의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만 남아 있다. 9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 높이 183척, 상륜뷰 42척, 합해서 225척(80미터)로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며 요즈음 건물로 치면 약 20층이 된다. 그동안 한국 고고학자들의 염원은 1300년 전에 건설된 황룡사 9층탑을 복원하여 그 위용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목탑을 복원한다면 세계의 건축가들은 물론 관광객만도 수없이 순례하는 명품으로 세계에 군림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황룡사 9층 목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고유섭 선생은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목탑은 중국식 누각의 받아들여 조영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 엄격한 의미의 목탑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원 지방, 황하 유역은 세기 초엽에 갑작스런 사막화 현상으로 원시림이 사라지면서 목재가 귀한 지역으로 돌변했다. 북경만 해도 거대한 목탑을 건설할 만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 후대인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금성을 축조하면서 수양제가 판 운하를 이용하여 남방의 목재를 운송하여 조달했다. 그러나 통나무로 운반하기 어려우므로 나무를 각재로 켜서 차곡차곡 포장하여 운반한 후 그것을 다시 복원하여 둥근 기둥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인 천단(天壇)의 경우도 이런 방식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조로 만든 형태의 목탑 모양이 희귀하나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비족이 세운 영령사탑(英寧寺塔)은 중국 건축사상 가장 대표적인 초기 건축물인데 흙으로 쌓은 토심(土心)에 의지하고 목조로 외곽 구조를 만들었다. 소주(蘇州) 시내의 북사탑(北寺塔)은 중국에서 유명한 현존하는 탑파이지만 표면의 목조를 제거하고 보면 전축(塼築)구조로 항주(杭州)의 육화탑, 상해의 용화사탑도 동일한 구조다. 응현(應縣)의 불궁사 석가탑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한 목조탑인데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 기반을 전승한 요나라 시대의 북방 민족(중국 한족이 아님)이 조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백제 건축양식이 전해진 일본의 법륭사(法隆寺)·약사사(藥師寺), 중국의 9층 목탑인 육화탑(六和塔), 뇌봉탑(雷峰塔) 등 해외 건축물을 참고하면서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목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67미터의 불궁사 석가탑과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불궁사의 석가탑이 목조이기는 하지만 건립연대가 1056년이므로 이것을 놓고 약 400년 전에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이라고 볼 수는 없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학자들의 고민은 바로 황룡사 옛 터가 보이는 탑골의 부처바위(보물 제201호)’에서 9층 탑 암각화 모습이 나타나 그동안의 의문점을 해소시켰다. 정부는 이들을 근거로 황룡사목탑을 복원하는데 학자들과 힘을 모아 2011년 8월 최종 복원안을 확정했고 2016년부터 2025년까지 79.2m 실제 높이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공방에서 10분의 1 축소 모형 즉 8미터 높이를 완성했는데 1/10 크기이지만 엄청나다. 가로·세로 3.4m 길이의 바닥면 가운데 심주(心柱, 중심기둥)를 포함해 65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4면 7칸 구조로 내부를 꾸몄다. 층마다 마루를 깔고, 층과 층 사이엔 암층(暗層,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구조를 튼튼하게 했다. 예산은 무려 1,500억 원으로 황룡사 전체 복원사업의 예산(2900억 원) 중 절반이 넘는다. 2025년이 되면 한국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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