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29)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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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29)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6.2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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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III)

<모전석탑 분황사>

신라인들은 ‘석가모니 이전 세상에 서라벌에 있던 7군데 사찰터의 하나’로 꼽던 중요한 사찰이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이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왕’이란 뜻으로 선덕여왕 대인 634년에 세워졌는데 이때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분황사는 부처의 힘을 빌어 국가의 어려움과 여왕 통치의 허약성을 극복하려는 호국적 염원을 담고 지은 것이다. 분황사에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들이 머물렀다. 643년 당나라에서 공부한 자장이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모시고 분황사에 머물게 했다. 자장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신라 불교의 교단조직과 승려들에 대한 일체의 규정을 정비했다. 분황사는 신라의 명필 혜강을 비롯하여 원효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편찬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입적했다. 그의 ‘십문화쟁사상’은 여러 교파의 차이를 화쟁하여 통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삼국통일을 이룬 무열왕과 문무왕의 정ㅊl 성향과 부합되는 측면도 있으므로 크게 모셔졌다. 아들 설총이 그의 유골을 부수어 소상(塑像, 진흙을 빚어 만든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예를 올릴 때면 소상도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 소상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활동하던 13세기 후반까지도 얼굴을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에는 경덕왕 14년(755)에 구리 36만6000근으로 주조한 약사상과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에 모셔진 장육존상이 4만 7000근이었다니 얼마나 큰 불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찰의 전각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 눈 먼 여자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당대에 신라의 거찰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남아있다.

분황사탑은 전탑양식을 채택했으나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의 재료는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신라에서 석재로 불탑을 축조한 백제와는 달리 모전석탑으로 불탑을 축조한 이유로 강우방 박사는 당대에 신라에서는 벽돌을 구울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벽돌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없으므로 결이 일정한 안산암을 이용하여 벽돌 모양으로 다듬고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탑의 전문가인 박홍국 박사는 이와 견해를 달리한다. 신라의 모전석탑이 중국의 전탑을 곧바로 모방했다기보다는 한국에 이미 전탑이 건설되어 있었으며 그 모델을 보고 벽돌이 아닌 석재로 탑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황사모전석탑보다 이른 시기에 전탑이 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의 모전석탑인 분황사모전석탑이 건설되기 이전에 많은 숫자의 전탑이 적어도 경주지역에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모전석탑은 벽돌과 같이 작은 규모의 석재로 만들었으므로 일반형 석탑과는 두드러진 상이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벽돌을 쌓아올리듯 지붕의 아랫부분은 내어쌓기로, 반대로 윗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단식 지붕은 목조 건축에서는 볼 수 없다. 둘째는 1층탑신의 문이 4면에 보이는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 안에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이러한 사방불(四方佛) 제도는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시원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방불 제도는 후대에도 지속되었는데 현재는 감실 안에 사방불이 없다. 분황사의 또 다른 특징은 기단이 아주 넓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네 귀퉁이의 사자가 탑에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를 두고 신영훈은 지금의 모습이 원형이 아닐지 모른다고 적었다. 현재 분황사탑은 사방불에 공양하려면 노천에서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우로를 가려줄 시설이 없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탑은 사방으로 퇴를 덧달아 참예하는 이들이 비 맞지 않고 예불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중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응현의 불궁사 석가탑 1층에도 퇴를 덧달았고 소주의ㅜ 북사탑, 인도 히마찰의 부라마우르나 디야르의 목탑 1층도 퇴를 달아 예불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분황사탑에도 그런 퇴를 사방에 설치했을 있는데 그 유형을 추정할 수 있는 탑이 있다.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13층석탑으로 1층은 넓고 큰 규모인데 2층부터는 갑자기 줄어들었다. 이 탑을 보면 1층에 퇴를 둔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감실로 들어가는 문 좌우에는 불국토를 수호하는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이후 감실을 생락하고 1층 사방 벽면에 약간 부조하여 조상(彫像)하는 구조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3층석탑이며 이후 문이 사라진 일반형 석탑에서는 부조상이 사천왕상으로 바뀐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분황사 석탑은 비례 면에서 7층, 경내에 남아 있는 모전석의 양을 감안하면 9층이 된다고 발표했다. 7층일 경우 높이는 41.6미터, 9층일 경우에는 48.5미터에 이르는 매우 큰 탑으로 과거에 ‘백탑’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탑을 하얗게 회칠했다는 추정도 있다. 기단은 한 변 약 13미터, 높이 약 1.06미터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하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구씩 네 모퉁이에 배치했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는데 조각 솜씨가 수준급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부셨는데 그 뒤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다.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1965년 분황사 후면 30미터쯤 떨어진 우물에서 많은 석불이 발견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경주박물관 뜰에 진열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가 떨어진 것들이다. 조선시대에 척불(斥佛)이 한창일 때 지방의 유생들이 분황사를 비롯한 근처에 있던 석불들을 부수어 우물에 던져 넣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화쟁국사비는 원효를 기리는 비로 고려 숙종(1101) 때 세운 것이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그후 방치되어 있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가 사찰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은 매우 흥미로운 전설을 갖고 있다. 이 우물에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 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인데 우물(샘)로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곳 우물과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효감천(孝感泉, 전북기념물 제43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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