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17세기 조선시대 역사속 한 여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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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17세기 조선시대 역사속 한 여인 이야기
  • 행정신문
  • 승인 2015.05.0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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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유일한 정명공주가 남긴 ‘화정’의 의미는

 

광해군과 정명공주, 그리고 인조에 관한 역사내용을 그린 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과 배우들의 명품 연기, 탄탄한 스토리 구성으로 단숨에 시청자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드라마는 첫방에서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조(박영규 분)에게 인정받지 못해 16년간 세자로 지낸 광해(차승원 분)의 아픔과 광해를 폐하려다 독살당하는 선조의 모습이 강렬하게 그려진다.
사극 ‘화정’은 혼돈의 시대였던 17세기 조선시대 가장 고귀한 신분인 공주로 태어났으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죽은 자로 위장한 채 삶을 이어가야 했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여인 정명공주(貞明公主/1603~1687)와 그녀의 이복오빠인 광해군에 대한 히스토리다. ‘화정’은 역사에 기반을 두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져 화정ㆍ광해군ㆍ정명공주ㆍ차승원 등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당파 싸움으로 점철된 피의 투쟁사
 
조선 13대 왕 명종이 34세 일기(一期)로 후사없이 승하하자 일찍이 명종의 눈에 들었던 11대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선조가 명종비 인순왕후의 추대로 14대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선조는 직계가 아닌 방계가 왕위에 오른 최초의 임금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등극하자 대비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몰락하고 신진 사림세력이 득세했다. 신진사림은 김효원과 신의겸 대립으로 선배와 후배 사림으로 분열하면서 동인 서인으로 나눴다. 동인은 서울 동쪽에 살았던 이황 조식의 문인인 김효원ㆍ김성일ㆍ이발ㆍ이산해 등이고, 서인은 서울 서쪽에 살았던 이이ㆍ성혼의 문인인 신의겸ㆍ정철ㆍ송익필ㆍ윤두수 등이 대표적이다.
서인의 대부 이이가 사망한 후 동인천하가 됐지만 정여립 반역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로 1천여명이 처단당하고 정철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서인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처단당한 세력들은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인 1591년(선조 24년) 동인은 정철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면서 세력을 회복하게 되나, 정철 처벌문제를 놓고 동인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는 4월 30일 도성을 떠났고 이후 한양과 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의주로 향하기 전 선조는 광해군에게 종묘와 사직을 받들도록 했고, 이후 광해군 분조(두개로 나뉘진 조정)는 16개월 동안 지속됐다. 해전에서 계속되는 이순신의 승전보와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군의 참전 등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결국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몰아냈다. 광해군의 분조활동 또한 임란을 극복하는 주요 요인이 됐다. 광해군은 전쟁기간 동안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선조가 55세 되던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직계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임란 후 강경책을 취했던 북인이 득세하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을 내세운 대북과 영창대군을 내세운 소북으로 분열됐다.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하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할 정도로 세자 광해군을 밀어내고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선조는 뜻을 이루지 못한채 1608년 승하했다.
한편,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을 제거했다. 1613년 유명가문의 서자 7인이 연루된 ‘칠서지옥’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체포된 박응서 등을 취조하던 중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했다는 발언이 나왔다.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계축옥사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오성과 한음
1614년에는 대북파 수장 이이첨 등의 폐모론으로 영창대군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됐다. 이때 정명공주도 함께 폐서인되어 감금당했다. 아들을 잃은 폐비는 딸까지 잃을까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죽었다고 답했다. 이같은 정치행위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해군과 배다른 형제 정원군은 아들인 능창군이 모반죄로 17세에 죽임을 당하자 몸과 마음이 상해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인조)은 자신의 외척과 소외된 서인세력을 규합해 반정을 일으켰다. 순전히 광해군이 마음에 들지않아 일으킨 쿠데타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정명공주는 북권되고,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조반정으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렸던 북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됐다.
 
서궁 유폐시절 남긴 ‘화정’에 얽힌 비밀은
 
그렇다면 '화정'이라는 글씨에 얽힌 비밀은 무엇일까. 화(華)는 ‘꽃, 꽃이 피다 혹은 빛’을 의미하고 정(政)은 나라를 다스림을 의미한다. 즉, 꽃처럼 피어난 다스림 혹은 빛나는 다스림을 뜻하는데, 이는 정명공주가 서궁 유폐 시절 남긴 이 글씨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그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로 선조의 유일한 공주다. 효종ㆍ현종 시대를 거쳐 숙종 시대까지 조선시대의 5분의 1을 경험하며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조선시대 공주 중 가장 오래 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선조 사망 직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후궁의 딸인 옹주가 아니라 서인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 인조반정이 있기 전까지 서궁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정명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주가 죽었다’라는 소문 아래 죽은 듯 살아야 했다.
독특한 점은 이 시기가 바로 정명공주가 재능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정명공주는 뛰어난 서예가로 유명했던 아버지 선조와 어머니 인목왕후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필체를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조의 필법은 한석봉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필획이 굵고 유창호방(流暢豪放)한 달필(達筆)이었다. 평소 선조는 여러 사람에게 글씨를 하사했으며, 중국 사진들도 선조의 필적을 얻기 위해 애를 썼을 정도로 왕 중에 최고의 명필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의 어필과 비슷한 인목왕후의 칠언절구 시는 근대에 족자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재능을 타고 났던 정명공주이지만 그녀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예술적 혼을 뽐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 <화정>의 전면에 드러난 창덕궁과는 달리 현재까지는 포스터 속에 남아 있는 정명공주의 글씨에는 과연 어떠한 의미가 담겨질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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