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은혜로 어려운 곳임에도 700명 부흥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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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은혜로 어려운 곳임에도 700명 부흥의 기적
  • 행정신문
  • 승인 2015.05.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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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일산 신도시 중산마을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는 상가지역에 5층 건물로 아름답게 세워진 은혜로운 교회가 있다. 그 이름 자체가 ‘은혜로운 교회‘ 5층 목양 실에서 만난 옥수영 목사. 첫 인상에서 누구나 호감이 가는 학구적인 이미지 겸손하고 밝고 환한 얼굴로 다정히 맞이하는 모습에서 느낌이 온다. 1997년도 이곳에 개척하고 18년간 목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룬 옥수영 목사와 대담을 나눴다.
옥 목사는 사업을 하던 장로와 권사인 부모님 아래 모태신앙으로 서울에서 어려움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주일학교 때부터 착실히 신앙생활도 하고 부모님 또한 당연히 목회자로서 서원을 하는 가운데 3번의 중요한 계기를 맞았다. 
첫째는 반포중 3학년 때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중 라이벌과 싸움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친구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중 죽음을 맞아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희생당한 친구가 싸우기 이전부터 자신의 노트에 “수영아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보았다. 다음날 꿈에 예수님과 친구가 나타나 ‘목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슴에 뜨거움이 용솟음치면서 전국 CCC 단체에 참여하며 고등부까지 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을 보였다. 이후 빌리그레함 여의도 목사집회에 참여해 성령의 불을 받아 친구들과 방언을 하며 은혜 충만한 뜨겁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했다. 대학 입학후에는 목회자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평신도에서 장로가 되겠다는 마음자세를 가졌다.
부친의 사업실패로 학교도 중단하고 일산에 가서 살때였다. 허허벌판 일산에서는 닥치는대로 돈을
   
 
 벌기 위해 막일을 하면서 800여만원을 모았다. 어려운 환경이 한스러워 돈을 융자받아 구입한 작은 빌라 한 채가 신도시 붐을 타고 열배나 상승했다. 드디어 유학의 꿈을 이룰 기회가 왔고, 부친도 신도시 바람을 타고 싸게 사둔 자투리 땅이 엄청난 액수로 급등해 경제적으로 회복했다. 또한 유학을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 생각지도 못했던 폐결핵을 진단받아 유학이 좌절됐다. 이후 부친의 강력한 권고로 수많은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매달렸다. 결국 한얼산 기도원에서 소나무를 뽑는 간절
   
 
 한 기도로 병을 치료받았으며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의 말씀이 옥 목사가 목회를 하게 된 신앙관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목사가 되라는 음성을 듣고 총신대학에 가게 됐다고 한다. 
“이제 주의 길로 마음을 바꾸고 턴하니 일이 순조롭게 풀렸고 결혼도 하게 됐지요.”
옥 목사는 뜻한바 있어 주의 길로 마음을 바꾸고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맞지 않아 가족과 함께 영국 유학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영국 BBC Greenwich 신학대학에서 학사. Bristol University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정말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재정상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특히 학비가 비싸 장학금을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여호와 이레 체험을 많이 했다. 일간지 특파원으로 독일에서 파견근무하던 손위 처남이 귀국길에 갑자기 노선이 바뀌어 옥 목사가 살던 버밍엄에 찾아와 생활비를 주고 갔다. 생활비를 염원하던 기도의 응답이 온 것이다. 그리고 베니피시라는 유학생 자녀 장학제도의 수혜도 입었다. 옥 목사는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여러 모양으로 위로하시며 인도해주셨다”며 은총의 말을 전했다. 
 
대부분 유학 가시면 박사학위를 마치고 오시는데, 석사까지 하시고 목회를 위해 귀국 하셨군요. 그럼 첫 개척을 어떻게 하셨는지 듣겠습니다.
 
옥 목사: 막상 귀국 후 아버님 계시는 일산에 개척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유학 가기 전만해도 일산에 개척을 하면 교회들이 막 부흥 할 때라서 아버님께서도 제가 신학을 할 때 일산에서 개척을 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하나님이 그릇을 준비 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더 배워야겠다고 유학을 택한 것이었죠. 1997년 귀국해서 일산에 와보니 기존의 교회들은 안정이 되어있고 그 사이에서 출발 하자니 힘이 더 들었고 당시 아버님도 사업이 다시 힘들어 지신 상황이시라 가진 돈이 없어서 장소 좀 동 떨어진 건물 7층에 대출 받아서 월세로 열정 하나만으로 40일 금식 기도 후 첫 개척을 했습니다. 
건물 7층 교회 한쪽을 막아서 손수 방을 만들고 아이들 둘을 데리고 전형적인 개척교회 생활을 3년간 하면서 고생을 좀 했는데, 무엇보다 샤워 할 시설도 없고 큰 아이한테 미안 했고, 특히 어려운 것이 성도라고는 아버님을 비롯해 가족들이 전부 이었는데, 그 가족들 앞에서만 설교 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하하!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4:24) 말씀이 생각나네요 하하하!
 
옥 목사: 그때부터 여러 신학교에 출강 하면서 교수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막내 동생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20대에 크게 사업을 했어요, 제가 개척할 때 방송 시스템도 비싼 것으로 시설 해주고, 막내가 아버님 닮아서 통이 컸어요. 그런데 동생이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마침 아버님이 제 명의만 된 집이 있어서 보증을 서줬는데, 동생이 무리하게 사채까지 쓰면서 확장 하다가 사업이 잘못되어 크게 부도를 내며 감당 할 수 없으니 달아나고(지금은 선교사로 활동 하고 있다) 사채업자들이 가만있나요? 아버님을 비롯해 온 집안이 연쇄적으로 엉망이 되었지요. 참 날벼락을 맞았죠. 집도 날아가고 심지어 세 들어 있는 저희 집 가제도구며 교회에 모든 물건에 딱지가 붙여지고, 한 3년을 참 고생이 심했어요.
 
웬수는 집안에 있더라고요! 하하하
 
옥 목사: 설상가상, 또 그 건물이 문제가 생긴 거예요. 새로 건물을 구입한 건물주가 대출을 받아 사면서 사기를 치고 도망한 상태로 전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계약을 했던 거예요. 소송이 일어나고 건물에 나중에 입주자 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난리가 났죠. 다른 입주자는 받지 못했는데, 다행히 저희만 보증금을 돌려주는 거예요. 전 주인이 권사 이었는데, 개척교회 돈이라서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으로 그 권사가 생각 했나봐요. 보증금도 은행에서 대출 받았던 거였는데 순전히 주님의 은혜죠. 또한 한 달에 월세를 200만원씩 몇 개월을 냈었는데, 경매소송으로 인해 월세를 내지 않게 된 거예요. 그 어려운 때에 3년 가까이를 월세 없이 지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죠. 그런 상황에서 겨를이 없는데 여 동생이 열심히 전도를 해서 교인이 100여명이 모이기 시작해서 부흥하게 되었어요. 성도들이 대부분 초신자 들이고, 교인들이 거의 외국 생활 하다가 온 수준 있는 인텔리 들이고 집세 부담도 없고 해서 헌금에 대한 부담도 없고 친교 위주로 끈끈한 인맥을 맺으며 자유롭고 재미있게 3년간 신앙생활들을 했었어요. 건물이 새 주인에게 경매가 넘어가고 그 건물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라 더 작은 곳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 헌금 문제로 시험 들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데 처음으로 목회에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죠. 거의 초신자 들을 양육하여 집사로 양육 했는데 큰 충격을 받았죠. 제자훈련과 영적으로 이끌면서도 끈끈한 친목으로 언니 동생하며 다져진 성도들이라 주축 멤버가 이끄니까 다 떠나고 약 30명 정도 남더라고요. 
 
첫 시련을 맞이하셨네요.
 
옥 목사: 지금 생각 해 보면 목회 경험이 없다보니 열정적이나 어린 목회 이었고 순수 했던 것 같아요.. 제 스타일에 맞는 사람을 의지 했던 것이 큰 상처로 남게 되었죠.
새로 옮기는 건물이 50평으로 약 1억 5천짜리를 5층에 분양을 받았는데 약 4천여만 원이 필요했어요, 그것을 맞추느라 힘이 들었지요. 20일 금식 기도하며 제일 처음 전도한 개척 멤버인 부부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하자고 권면을 했는데 거절 하드라고요. 그 때가 제일 맘이 아팠습니다. 19일째 되던 날 기도원에서 쓰러지며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환상으로, 인산인해를 보여 주시면서 다시 시작 했는데 1년 안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입지적 여건이 안 좋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100 명으로 부흥 시켜 주셨습니다, 
 
목사님의 금식 기도가 히스기야의 능력이 있으신가 봐요?
 
옥 목사: 하하하! 뭐 워낙 간절하니 금식 기도 외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때에 제 2기 성도들은 처음에 오신 성도들과는 다른 성격의 다양한 분들로 저를 인텔리적인 교만에서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셨던 거예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기존의 자리 잡은 교회들 속에서 빠른 속도로 모든 일들이 다 순조롭게 해주셨고 또, 다시 190 평으로 옮기게 되었고 10 여 년 동안 성도 수가 300명으로 성장 하면서 열심히 목양을 했지요.
 
기존의 성장한 주변의 교회들 사이에서 부흥의 역사가 특별 했네요.
 
옥 목사: 네 정말 하나님의 역사였지요. 제 3기는 지금의 교회로 옮기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시련이 오더라고요. 이 교회 건물을 먼저 계시던 목사님이 건축 하시면서 재정이 부족하니까 5층 건물을 주차장 용도의 땅을 사시고 허가를 받으셔서 지으셨던 거예요. 그리고는 그 목사님이 완공을 못하시고 간암으로 소천 하셨던 겁니다. 와중에 목사님 없이 그 성도들은 1년을 지내며 노회를 통해서 저희와 합병을 제의 해 왔습니다.
 
네 그럼 목사님이 본 교회를 건축 하신 게 아닌가요?
 
옥 목사: 네 다른 목사님이 건축하셨던 교회를 저희가 들어가게 되었지요. 교인들과 회의 끝에 합치기로 결론을 짓고, 막상 약속한 부채들을 저희가 해결하며 약 26억 정도를 있는 모든 힘을 쏟았죠. 제가 살던 집도 다 팔고, 동생들 힘도 다 모으고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들어갔는데, 막상 입주하고 보니 먼저 계시던 80여 교인들과의 이질감과 갈등들이 표출되고 또한 인수 때 없던 빚들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건축 시 하도급 업체들의 공사 대금을 전에 목사님이 결재를 안하신거죠 그 교인들도 모르는 상황 이드라고요. 그 목사님도 투병 중에 사기도 당하셨고 고생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좌우지간 소송을 당하고 엘레베타도 묶여있고 수없는 빚에 시달리는데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어려움의 연속인데, 설상가상으로 주차 건물이니 구청에서 불법이라고 벌금이 1억8 천만 원이 부과되고 당장 예배는 드려야하고 용도 변경 하기전이니 조사 나온다 하면 안에 있는 집기들을 밖이나 옥상으로 옮겨야 하는데 과정 속에 피아노다리가 부서진 것을 들고 옮기 시더라고요. 여자 집사님들의 힘이 강하다는 걸 재삼 느꼈어요. 남자 성도들은 대부분 출근 해있고 여 집사님들과 고생을 한 2년 동안 (용도 변경까지) 수없이 집기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저도 허리를 다쳐서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대피훈련을 통해서 우리 여 집사님들 용사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이니 교인들도 떠나가고 저도 몸이 피폐 해지는데, 주님의 은혜 아니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더라고요. 결국 단단히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신 과정이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사실 개척보다도 더 힘이 들었고 다시 하라면 못할 겁니다. 
 
맞습니다. 어머니는 강하다! 특히 주님의 사역 위에서는 결국 (욥23:10) 정금 같이 쓰시려고 예정 하신 것 같습니다.
 
옥 목사: 그래도 개척 때부터 어렵지만 선교에 힘을 쏟았지요. 2기 때 까지 어려워도 87교회를 선교를 했는데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장로님이신 아버님께서 중풍으로 쓸어 지셨는데 50여 교회를 하시고 계셨어요. 제가 힘을 얻고 지낸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고, 성도들의 기도와 처음부터 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청량제 역할을 했던 것이 견디는 힘을 얻었던 같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나누셨군요. 그랬더니 채워주시고요. 목사님은 어느 신학교 출강 하시고, 방송사역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옥 목사: 점차 안정이 되고 나서 방송 선교 위원회도 만들어 극동방송, CBS 방송도 하면서 칼럼니스트로 활동 하면서 신학교는 그동안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현재는 총회 신학교, 연세대 코칭, 심리 상담을 하고 있지요.
 
기독인재 양성위한 교육사역
 
옥 목사 어머니가 노숙자 케어를 시작했고, 그 뒤로 1부 예배 때에 10년 동안 30명 정도 노숙인들이 출석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50여명이 출석하는 주일학교와 100여명이 출석하는 중고등ㆍ청년대학부 학생들 또한 사역에 열심이다. 이에 더하여 교사들도 교육자 수준으로 열강하고 있다고 한다. 은혜로운 교회는 다음세대 양육을 위한 비전을 장학사역에 중점을 두고 기독교 인재양성으로 비전센터를 세워 신학생 후원과 전문인력 양성 및 소극장ㆍ영상ㆍ토탈 기독문화 컨텐츠 개발 등을 후기사역으로 삼고 있다.
다양한 문화교실 또한 교회 개척당시부터 실시하고 있다. 옥 목사가 영어를 했기에 영어교실을 열고, 사모는 피아노로 시작해 지금은 개인 상담코칭, 피부관리, 워십교실, 가족치유 상담학교, 영어성경대학, 오카리나 교실, POP/넵킨아트, 아침강좌, 노래교실, 기타 드럼교실, 발혈치유교실, 어머니교실, 탁구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해 조울증 암 같은 난치병 환우들의 힐링을 위한 교실을 마련한다면 기자가 운영하는 ‘좋은 건강 국민운동 진흥회’의 웃음치료와 융합컨텐츠를 지원할 용의를 비쳤더니 옥 목사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이 교회의 차별화된 전도방식으로 새벽전도를 들 수 있다. 새벽기도는 흔하지만 새벽전도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노숙자가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전도다. 새벽에 공원이나 정류장 등지서 하고 있으며 조를 편성해 낮ㆍ오후ㆍ밤 팀으로 나눠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선교는 향후 통일을 대비해 계획을 세우며 유관단체를 지원하고 있고, 다문화 가정 선교나 교인들을 위한 납골묘지 등을 구상하고 있다. 
“저희 장로님이 훌륭하셔서 한 번 목표를 세우면 응집력이 강하셔서 솔선수범으로 헌신하고 제자훈련 또한 잘돼 있습니다. 특히 셀 리더들이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멘토제도가 정착돼 잘 섬기고 있습니다.”
많은 시련과 고비로 연단의 과정을 지나온 700여 성도들은 일산의 성시화ㆍ민족복음화ㆍ세계 선교라는 교회 3대 슬로건을 캐치프레이즈로 가정회복과 다음세대의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COMMENT
함용일 안수집사(성가대와 차량봉사)
“성도님들은 가족같은 관계로 사랑 친교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 교회에 와서 신앙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과 인자하신 사모님이 너무 좋습니다.”
 
최인영 집사(찬양대와 셀리더 및 전도위원)
“새벽기도제단을 쌓을 수 있어 스스로 영적 충만한 은혜를 받아요. 다양한 분들과 소통을 통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목사님은 어려움을 많이 겪은 만큼 성도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으로 사랑과 위로를 하며, 일일이 심방을 하며 인도해주심 감사드려요. 좋은 교회와 귀한 목사님 만나 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대담: 미션타임즈 이범주 취재본부장
 

 

담임목사 프로필
옥수영 목사( 영국 BCC. Greenwich 신학대학, Bristor University 대학원
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대학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미국 Regent University 대학원(D. Min)
출강: 전 장신신학교, 웨슬레신학교, 순복음신학교.
현 은혜로운교회 담임, 총회신학교 교수, 심리상담사, 연세대 코치.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탄중로 311-20
전화: 031) 975-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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