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정부, 지도자 혼연일체로 경제기적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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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정부, 지도자 혼연일체로 경제기적 이뤄”
  • 최진호
  • 승인 2014.05.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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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고속 경제성장의 주역...양윤세 전 동력자원부 장관
▲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제3경제수석비서관으로서 관광산업 중흥과 조경분야 국책사업을 추진하며 고속 경제성장시대를 주도했던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 장관.

세월호 사건 이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과 부정부패가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 본연의 자세가 어떤지 잊어버린 것인가. 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되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경제개발시대를 이끈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 장관과의 만남을 통해 오늘의 공직자들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편집자주>

  서울 방배동 까페골목 어귀의 커피솝에서 만난 양 전 장관. 세월은 비켜가지 못했는지 그도 어느덧 80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오래전 당뇨병으로 인해 발의 일부를 절단하고 줄곧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왔다. 자연히 사회활동도 멀어져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양 전 장관은 1979년 박대통령 서거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의 첫 조각인 신현확 총리 내각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신군부가 들어서 내각 총사퇴때 짧은 장관직을 마쳤다. 그래서인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 수행의 두뇌 역할을 하던 청와대 제3경제비서관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당시 박대통령께서 60년대 사회간접자본(SOC)을 중심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다진후 70년대 와서는 외화가득률이 높은 관광산업을 집중 육성할 것을 지시하며 3차산업 담당 제3경제비서관실을 신설하고 제가 책임을 맡았죠.”

  1972년이었다. 직전까지 농림부 농정차관보로 있으면서 당시 급증하는 인구 증가를 못따라 가는 식량부족현상을 획기적으로 해결한 ‘통일벼’ 개발, 보급을 성공시키고 차관급으로 승진하여 중책을 맡은 것이다. 한국이 50년대 전쟁 복구 시기를 거쳐 60년대 국가 기반시설과, 농업 등 1차 산업과 2차 산업중 경공업 중흥기에 이어 70년대 중공업과 3차 산업의 중흥기를 연 주역이 되었다.

  “제주도 중문단지와 경주 보문단지, 설악동, 용인민속촌 건립, 비인반도 개발 등 관광산업의 핵심사업을 그때부터 시작했죠. 관광외에 조경도 역점 분야였는데 당시만 해도 산이 헐벗은 곳이 많아 곳곳이 민둥산이었고 여름 장마만 지면 토사가 쏟아져 강이 흙탕물로 범람하기가 일쑤였지요. 당시 막 시작한 새마을운동과 함께 주요 관광지는 물론 시골, 도심 할 것 없이 조경의 관점에서 전국토를 녹화하는 국토개조작업이 시작된 것이죠.”

  그렇게 시작한 한국의 관광산업. 60년대 ‘기생관광’의 오명을 쓰고도 외국관광객이 백수십만에 불과했고, 기껏 내놓을만한 구경거리가 서울의 고궁이나 경주, 설악산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은 천만명이 훨씬 넘는다. 일본보다 더 많다. 유럽 못지않는 관광대국을 넘보는 오늘을 보는 그의 모습에서 무한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이젠 전국 어디를 가도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발길 가는 곳곳이 관광지가 되었다.

  “한번 지시가 떨어지면 밤잠 안자고 계획을 수립하고 다음날 부리나케 현장을 돌아보고, 미흡한 것은 또 고치고 정말 정신없이 뛰던 시절이었죠.”

  지도자와 공무원,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야 국가발전이 가능하고 복지도 증진된다. 지도자가 확고한 비전과 통찰력,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끌고 사명감 넘치는 참모들이 전력을 다해 임무를 수행할 때 국민들도 허리띠를 졸라 매고 땀흘려 일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양윤세 전 장관은 황해도 곡산 출신의 실향민이다. 해주사범학교에 재학중에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하여 서울 동성중(당시 6년제)에 편입해서 다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정일권 전 총리가 2군단장과 육군참모총장을 맡을 때 수행하기도 했다.

1953년 휴전이 되어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청년 양윤세는 정식 고교졸업장도 못받은 상태에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소위 ‘아이비 리그’ 명문인 코넬대학에 진학했다.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경제학과를 선택하여 학사, 석사까지 5년에 단숨에 마쳤다.

  박사과정 1년을 마친뒤 고국에서 4.19가 터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해외망명길에 오르는 고국의 불안한 현실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공산주의 체제에 항거하여 고향을 등진채 전쟁을 치르고, 세계 첨단 미국의 선진문명에 눈뜬 지금, 자신과 국가의 진로와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 끝에 더 넓은 세상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배낭 하나만 메고 불과 몇 백불을 가지고 무전여행을 떠났다. 8개월의 여정 240일간 유럽 일대를 여기저기 누볐다. 돈이 떨어지면 현지 대학을 찾아가 강연과 기고 등으로 체재 비용을 충당했다. 귀국때는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인 ‘퀸 메리’호 배편을 이용, 지중해에서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20여개국 항구를 거쳐 47일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기계 하나라도 더 들여오기 위해 1달러도 아끼고, 한가하게 해외여행 하던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 ‘240일간 세계일주 무전여행’을 해낸 그는 훗날 유명세를 탔던 김찬삼 교수보다 한발 앞서 ‘무전여행’의 선구자였고, 그 열정과 도전의식이 오늘날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데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양 전 장관은 제3공화국 초기 경제기획원 서기관급 고위직 공모에 응시해 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국장, 차관보, 차관, 주미공사를 거쳐 장관에 까지 올랐다. 퇴직후엔 기업의 해외담당 사장 등을 맡아 한국기업의 해외진출에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만년에는 공직 시절 과도한 업무수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건강을 해쳐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금은 조용히 은둔하며 틈틈이 글을 쓰거나 마음의 수양을 하며 만년을 보내고 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진지한 표정과 눈빛에는 한때 젊음을 다해 한 나라 경제를 일으켰던 열정과 사명감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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