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위대한 한국 해군의 전통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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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위대한 한국 해군의 전통을 계승하자
  • 행정신문
  • 승인 2014.06.0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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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고 대사, 충무공 이순신, 손원일 제독의 웅지 본받아야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한 세월호 사건이 점입가경이다. 이번 사건의 주역인 청해진의 선주 유병언 일가에 대해 매스컴은 연일 시시콜콜 보도하고 있다. 소위 ‘구원파’ 교단을 통해 그가 축적한 재산 규모를 보니 인간 탐욕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름하기 어렵다. 이같은 불법적인 재산축적은 인허가나 관리감독을 맡고 있는 공무원 등이 눈감아 주지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일로 장보고의 해상거점인 청해진, 충무공 이순신의 기개가 서려있는 진도, 한국 해양인의 명예에 큰 상처가 나고 말았다.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혼이 서린 역사적인 명소다. 사고해역인 진도 팽목항 앞바다는 남해와 서해 조류가 하루 네차례 조수간만 차로 거칠게 교류하여 예부터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선단이 조심스레 지나던 곳. 육지쪽 진도 반대편에는 울돌목(명량)이라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유명한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좁은 수로가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충무공이 옥에 갖힌 사이 왜적에게 연전 연패, 불과 12 척의 작은 판옥선만 남은 상태. 1차 침략 때 충무공에게 발이 묶여 육로 북상에 한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원균의 조선 수군을 모두 격파하고 마침내 서해안 쪽으로 진군했다. 이에 충무공은 최후의 일전을 대비한다. 하지만 물 흐름을 안고 있던 조선 수군은 반대쪽에서 330척의 대형 전투선단이 몰려오자 한치도 못나가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육지와 섬 사이 좁은 울돌목의 양 안에서 지켜보는 인근 주민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고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충무공은 추상같은 위엄으로 군사를 독려하였고 하늘도 무심치 않았다. 서서히 물길은 반대 방향으로 바뀌고 바람까지 불어 용기백배한 아군의 불화살이 불을 뿜자 수백척의 왜적선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수장되거나 36계를 놓았다. 어떤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충무공의 호국충정의 신심에 의해 조선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세월은 흘러 무대는 1950년 6월 25일 부산 앞바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세기의 대결이 대한민국 땅에서 첫 공이 울린 이날 저녁, 한국 해군의 1호 전투함인 백두산함 최용남 함장이하 60명의 승조원은 북한공산군의 동해안 침투 소식에 휴일 외박자 전원 소집이 완료되고 완전무장을 하고 닻을 올린뒤 한컵 냉수잔을 부딪히며 필승 격퇴의 전의를 다졌다. 컴컴한 밤바다를 헤치며 북상을 계속하던중 울산 근해에 이르러 600명의 무장 게릴라를 태운 북한 수송함이 남하중인 것을 발견, 5시간의 숨막히는 추격전에 이어 함포전이 벌어졌다.

백두산함은 해군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 전 해군 장병과 함께 월급에서 갹출하고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하며 모은 돈에 국민 성금, 대통령 하사금 모두 6만달러로 미국으로 건너가 구입해온 중고 퇴역함. 하지만 공산침략자를 향해 정의의 불을 뿜었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해 새벽 1시쯤 마침내 적의 기관실을 명중, 침몰시켜 첫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자칫 부산 침투를 허용해 남한 전체가 혼란에 빠질 뻔 했던 위기를 벗어났다.

역사적인 이 전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나 다름없다. 충무공 같은 살신성인으로 무장한 손원일 제독같은 훌륭한 지휘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손제독은 맨손으로 해군을 조직하고 철저한 준비로 위기를 극복, 오늘의 세계적 강군의 터전을 닦은 선각자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바다 밑바닥까지 실추된 한국 해양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와 충무공 그리고 손원일을 잇는 위대한 해군의 전통을 길이 빛내고 선양하는 일이 중요하고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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