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현실을 잊게 하는 영화
상태바
우울한 현실을 잊게 하는 영화
  • 행정신문
  • 승인 2015.05.15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0만 관객 돌파한 ‘어벤져스 2’

 

요즘 정치판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영화 또한 정치가 잘 되어야 번성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많은 국민들은 TV를 켜는 순간 뇌물 수수나 돈이 어디로 가서 어디로 흘러가는 이야기만 계속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영화 볼 때인가’라는 생각이 팽배하면서 영화관련 정보는 자꾸만 뒤로 밀리곤 한다. 이처럼 문화부 기사가 뒤로 밀리거나 없어지기에 정치가 잘 되어야 나라가 잘 작동돼고 영화 또한 관심도가 높아질 것이다.
 
좀 시원한 영화 없나
 
 
상당히 기대되는 액션 카레이싱 영화인 ‘분노의 질주’가 있다. 그리고 대결구도가 명확한 ‘더 맨 건’이란 영화도 있다. 여기서 주름살이 더 멋지게 보이는 숀펜이 첩보액션 영화 주인공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테이콘 1’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어서 액션감이 남다르기에 이렇게 답답하고 짜증이 날 때에는 ‘정의의 사도’까지는 아니지만 울분을 가지고 자신을 못살게 굴거나 국가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을 향해 응징하려는 관심도가 높은 40대 중년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싶다. 한 두 시간 관람하는 동안 시원함을 느끼기에 족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조용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좋지 않은 뉴스에 접하곤 한다. 정국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갔으면 한다.
 
한편 대작 외화인 ‘어벤져스2’는 개봉 일주일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외화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 영화 속에는 마포대교, 상암동이 나온다. 한국에서 최고 흥행률을 기록하지 않나 싶다. ‘어벤져스2’는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흥행지수가 높은 곳은 한국이다. 일본ㆍ영국보다 한국이 ‘어벤져스’를 가장 사랑한 나라였기에 한국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이 영화는 히어로에 굶주린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히어로가 만화적이고 황당한 것 같지만 얼마나 이같은 캐릭터를 동경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세월호 등 우울한 마음 달래는 영화
 
바다에 수장되는 ‘해무’같은 영화는 세월호 참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서 개봉이 조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담담하게 봤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 중 하나가 ‘안녕 헤이즐’이란 영화였다. 이는 16세 세일린 우들린이 등장하는데 갑상선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죽어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죽어가는 소녀가 불행한 것이 아니고 1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지켜보는 부모가 불행하다 것이었다. 이 영화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그렸다. 최근 극장에 걸려있는 ‘엘리노어 릭비’라는 영화도 있는데 제시카 체스틴과 제임스 멕어보어가 주연을 맡았다. 이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편 ‘엘리노이 릭비, 그 여자’편, ‘엘리노어릭비, 그들’편 등 세편의 버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남자와 여자의 시각으로 보는 멜로드라마로 잘못 마케팅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상실과 상처의 극복에 관한 이야기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잃었을 때에 엄마의 고통은 얼마나 심각할까. 그리고 이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자의 상심의 깊이는 얼마나 깊고 클까. 이런 점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엘리노어 릭비’는 젊은이와 40~50대 관객이 느끼는 점이 다를 수 있다. 기자는 굉장히 깊은 우물을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자기 아이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고통을 자꾸만 전수하는 사회가 되는 것 같다. 보다 더 개선된 사회를 물려줘야 함에도 그렇다. 지난 80년대 겪었던 고통이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이 산재된 듯한 느낌이다. 이는 사회가 그만큼 아픔과 문제가 많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아이는 절대 보호되어야 한다. ‘엘리노어 릭비’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데 한 번 볼 것을 권한다.
 
‘모스트 바이어런트 이어스(A Most Violent Year)’
 
 
‘모스트 바이어런트 이어스(Most Violent Years)’는 가장 폭력적인 한해라는 뜻으로 마피아 이야기다. 하지만 총성 한방 울리지 않는다. 말톤 브랜돈이 주연한 ‘대부’의 분위기도 전혀 아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실제로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조직이 산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건 시대로 넘어서면서 미국의 자본이 어떻게 폭력을 이어받고 폭력 조직이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들어갔는가. 그 열쇠가 바로 석유(기름사업)이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직들이 합법적인 자본주의의 중추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스토리가 다소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어 관객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점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때로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담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자꾸만 사라지는 것은 한국 관객들에게 굉장한 손실임에 틀림없다.
 
플란트 감독의 ‘양철북’
 
 
얼마 전에 타계한 독일의 대문화 퀸터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북이 폴란드 감독에 의해 연출됐다. 퀸터 그라스가 폴란드계 독일인이라면, 감독인 풀코 셀린도르프는 독일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그다니스크는 1차 대전 때에는 독일땅이었다가 2차 대전 후에는 폴란드 땅이 된 묘한 접경지다. 이곳은 조선소가 있어 정치적으로 가장 뜨거운 자유노조운동이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독일이 동구를 침범할 때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평야지대여서 나치의 핍박을 가장 많이 받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핍박지역을 배경으로 한 것이 영화 ‘양철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오스카는 세 살에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서른살에 되어서는 정신병원 요양소에 들어가 자신의 30년 인생을 회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애가 소리를 지르는 등 굉장히 그로테스크(기이)한 부분을 보여준다. 정말 어린아이가 작은 북을 두드리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장면을 보면서 독특한 감각의 소설이자 영화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否定)에서 출발한다. 오스카는 사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 즉 나치시대에 독일이란 국가를 한 번 부정하고 새로운 독일을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퀸터 그라스는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이야기의 축이 굉장히 크로테스크한 전개를 통해 마지막에 만난다. 이런 점들이 전후 독일문호나 전후 독일영화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퀸터 그라스는 이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 영화계도 이처럼 잘되기 위해서는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청중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제가 있다고 자꾸 입에 오르내린다면 결코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 영화계는 5년 내에 붕괴할 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국영화계가 극소수 재벌에 의해 독점화ㆍ수직계열화 되면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개선이 없다면 한국사회 미래가 없는 것처럼 영화계도 미래가 없을 것이다. ‘모스트 바이오런트’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소수의 작품만 잔존한다면 다른 영화는 더 이상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