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달 특집-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위대한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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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달 특집-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위대한 군인
  • 행정신문
  • 승인 2014.06.0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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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

 6월은 호국의 달이다.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조국 강토와 형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바친 호국충정을 기리는 달이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세계의 선도국가로 뻗어나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전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절체절명의 국가위기에서 산화한 호국선열들을 기리고 불멸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뜻에서 호국의 달 특집을 연재한다.(편집자주)

 

▲ 6.25 1주년을 맞아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이승만대통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과 함께 생도들로부터 사열을 받고 있다.

 

▲ 6.25의 국난에서 빛나는 공적을 세운 해군의 아버지’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1909~1980)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후 민간인으로서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애국일념으로 해군과 해군사관학교, 해병대를 창설한 창군의 주역. 6.25 전쟁때는 해군참모총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의 선두에 섰으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 등 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고 해군력을 강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전후 국방부장관으로서 국방력 증강, 군 사기 진작과 조직체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손제독은 해군의 제복과 군가에서부터 조직과 편제, 운영 원칙과 간부양성, 전투함 구입 등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손정도 목사의 큰 영향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요즘 국회의장 격)인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1872~1931)의 아들로 태어난 손원일 제독은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애국심과 신앙심을 키웠다. 특히 아버지가 시무하였던 정동교회, 동대문교회 신자였던 유관순열사의 3.1운동 순국과 항일 탄압의 중심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감화를 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 국립중앙대학 항해과 졸업후 중국해운공사를 다니다 1927년 중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3년간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동안 사업에 종사하는 동안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상해 시절 외국 해군들을 보며 “바다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지름길”이라며 ‘해양대국’을 꿈꾸었던 손제독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와 방을 부치고 청년들을 모집, 8월 21일 해사대를 조직한데 이어 11월 11일 70여명의 장정들로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단,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15일 해군을 정식으로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맡았다.

 

전 해군의 모금으로 전투함 구입

▲ 전 해군 장병이 월급을 갹출하고 국민 성금과 대통령하사금으로 마련한 첫 전투함 백두산함이 하와이에서 함포를 장착하고 있다. 6.25 발발 두달 전에 도착한 백두산함은 6월 26일 새벽 부산 침투를 노리던 무장 게릴라 600명을 태운 북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큰 전공을 세웠다.

  창군 초기에 손제독은 일본이 버리고 간 소형 경비선 십여척에 불과한 해군력을 키우기 위해 서둘러 전투함 확보에 나섰다. 전 장병에게 봉급의 10% 갹출을 호소하고 해군 부인들이 삯바느질, 빨래로 돈을 모아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돈을 합쳐 6만달러를 확보, 정비기술자와 항해, 기관사 등으로 해군함정구입사절단을 구성하여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퇴역 전투함을 수리하여 구입해온 일화는 유명하다.

  손제독은 2차대전후 퇴역한 군함의 선주들을 찾아가 “신생 독립국 한국에서 왔다. 이 배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며 통사정을 하면서 가격을 깍고, 배에서 숙식을 하며 기름치고 부속이 없으면 전국의 고물상을 뒤져 수리를 끝냈다. 전투함의 함포까지 장착하기 위해 파나마운하를 거쳐 하와이와 괌의 미해군 기지 등 수만 km를 항해하는 4~5개월의 여정 끝에 진해항에 도착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이 때 구입한 최초의 전투함인 450톤급 백두산함은 개전 첫날 공산군의 동해안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북상하던중 울산 근해에서 무장 북괴군 600여명을 태운 수송선을 발견, 5시간여의 치열한 추적과 전투 끝에 대한해협 부산앞바다에서 격침시키는 큰 전공을 세웠다. 만약 부산 침투를 허용하였더라면 무방비 상태였던 영호남 등 후방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자칫 유엔군의 참전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뒤이어 들여온 3척의 전투함도 6.25전날 막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투에 투입되어 동서남해를 쉴틈없이 순회하며 유엔군과 더불어 바다에서의 완전한 제해권을 확보했다.

 

  귀신잡는 해병, 무적 해병의 신화 창조

▲ 손원일 제독의 진두지휘를 받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선두에 선 한국 해병대가 파죽지세로 진군을 거듭, 유엔 가운데 가장 먼저 서울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해병대 병사들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감격적인 장면.

손제독은 1948년 10월 육군내 좌익분자들의 반란인 ‘여순반란사건’의 진압 작전후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껴 이듬해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 6.25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세계 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 통영, 군산 상륙작전, 동서해안 철수작전, 동서남해 해상봉쇄 및 소해작전, 각종 전투 지원 및 수송 등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때는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선봉에 서서 적정 탐지, 진지 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손제독은 장성급 지휘관으로 유일하게 해병상륙대에서 진두 지휘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서울 진공작전을 앞두고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잠입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수명이 전사하는 위험한 고비도 넘기며 독려한 끝에 한국 해병대가 UN군을 제치고 맨먼저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며 9.28 서울수복의 쾌거를 이루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하고 맥아더장군은 전사에 남을 전쟁영웅이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가장 먼저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에 입성하여 용감히 싸운 한국 해병대를 비롯 많은 이름없는 한국 병사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족상잔의 무차별적 처형과 납치가 되풀이되는 참극 속에서도 손제독의 인간미가 돋보인 것은 한국군 계엄사령관으로서 서울을 다시 탈환하면서 3개월여 적 치하에서 부역을 했던 인사라도 전향의사를 밝히면 함부로 처벌하지 않도록 특별조치를 내린 일이다. 또한 전쟁중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의 첫 대장진급을 권유받았으나 사양하고 중장으로 예편한 것도 손제독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국방장관으로서 전후 국군의 체계 확립

  1953년 6월 30일 휴전을 한달여 앞두고 해군참모총장에서 국방부장관에 발탁, 휴전협정 체결후 전시체제에서 전환하여 국군의 체계를 바로잡고 운영과 편제를 일신하여 방어태세를 튼튼히 하는 중책을 맡았다. 당시는 분단상태로 휴전이 되면 유엔군 철수로 이어져 또다른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전국민이 휴전을 결사반대하던 혼란기였다. 그만큼 제독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신임과 군이나 국민의 신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국방력 증강에 기여하였고 군목제도의 활성화, 국군묘지 창설, 국군의 날 제정,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 개설 등 3년 가까이 장관을 재임하며 오늘날 국군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그의 빛나는 공적은 미국 은성훈장 및 자유훈장, 독일 십자훈장, 프랑스 레종드뇌르 훈장, 국제연합 종군기장, 덴마크 적십자 훈장 등 각국의 훈장을 비롯 금성을지무공훈장, 금성태극무공훈장, 무공훈장 태극장 등 숱한 훈장이 잘 말해주고 있다.

  손원일 제독은 퇴임후 초대 독일대사를 맡아 전후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라인강의 기적’을 체험하며 한국의 전후복구를 위한 외교일선에서 활약하였고 이후 재향군인회 고문, 한국반공연맹, 아시아반공연맹 이사장, 국제문화협회 상임 고문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80년 2월 15일 향년 71세를 일기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했다.

가족으로 누이 손인실, 손진실, 동생 손원태(재미의사. 작고), 아내 홍은혜 여사와의 사이에 큰 아들 손명원(전 현대미포조선 사장), 딸 손정희(사위 홍정욱)가 있다.

 

영원한 ‘해군의 어머니’ 홍은혜 여사

▲ 지난 2012년 11월 11일 계룡대에서 열린 해군 창설 6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의 안내를 받으며 기념식장에 입장하고 있다.(사진=해군본부 김상근 상사)

손제독의 미망인으로 아직 생존해 계신 홍은혜 여사(현재 98세로 서울 영락교회 권사)도 해군 창설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해군의 산 증인으로 해군을 위해 몸과 마음을 쏟아온 영원한 ‘해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창군 초기에 해군 부인회를 만들어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고 헌신적인 내조로 제독을 도왔다. 전투함 구입 모금 때는 삯 바느질 등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아 해군에 전달했다. 전쟁중에는 부인회를 이끌고 해군병원에 상주하다시피하며 매일 후송돼 오는 많은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따뜻하게 보살폈다.

  이화여대인 전신인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온 전공을 살려 직접 해군가를 작곡하였으며 지금도 불리고 있다. 또한 해군음악대와 KBS 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하여 군과 사회에 봉사하는 등 해군의 발전과 단합에 큰 기여를 했다. 100세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예배에 참석하고 찬송가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등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민간단체에서 손원일제독 기념관 건립 추진

손원일 제독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지역과 계층을 넘는 국민화합과 애국심의 함양을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비영리법인인 (사)대한민국 정우회는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을 기리고 호국안보 교육 및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념관 설립에 나서 전 4선 국회의원 이강두 총재와 최동섭 이사장을 중심으로 예비역 장성과 각 계의 인사들이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동섭 이사장은 “바다를 둘러싸고 강대국들의 치열한 해양패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바다를 통해 호연지기를 배양하고 가족과 함께 체험, 휴양과 관광을 겸한 다목적 국민 시설로 활용하도록 하겠다”며 전국민적 후원을 받아서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예상부지로 국제적인 레저관광타운으로 조성되는 영종도 일대를 비롯 인천 송도, 또는 평택 해군기지, 화성 전곡항 인근 등이 후보지로서 조만간 기본설계 및 실시 공모 등을 실시할 예정이며 바다에 인접한 약 5만평 부지에 기념관과 해양해군박물관, 동상 및 기념공원, 실내외 공연장, 해양 테마 파크, 수족관, 마리너 부두 및 체험시설, 연수원, 유스호스텔, 쇼핑센터 등 해양 복합 테마 파크로 조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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