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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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2)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2.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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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형산강 좌측 유산(I)

<경주 들어가기 : 형산강 좌측 유산(1)>

천 년 고도 경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인데 이곳에서는 서울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는 경우를 기본으로 한다. 그럴 경우 경주IC가 아닌 건천IC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고속도로로 주행하면서 경주IC에서 내리지만 건천IC를 시발점으로 잡으면 형산강 좌측인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금척고분군(사적 제43호), 법흥왕릉(사적 제176호), 효현동삼층석탑(보물 제67호), 무열왕릉(사적 제20호), 서악리고분군(사적 제142호), 경주서악리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서악동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진덕왕릉(사적 제24호), 경주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 등 중요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다시 경주를 벗어나는 등 별도의 일정을 잡지 않아도 된다. 위의 이름만 보면 경주의 간판스타급이지만 이들 모두 형산강 좌측에 위치하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경주역사유적지구’ 안에 있었다면 동반하여 지정되었을 것이지만 위치나 접근성 등이 고려되어 제외된 것이다. 금천IC로 나와 좌우로 나뉘는데 우측은 단석산(827미터)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금척고분군을 거쳐 법흥왕릉, 김춘추 묘, 서악 고분군으로 간다. 경주의 진수를 맛보기 위한 답사를 기본으로 하므로 우선 우측으로 방향을 정한다.

곧바로 송선리가 나오며 우측에 부산성(사적 제25호)이 있다. 높이 729.5미터의 부산(富山)은 주사산, 오봉산, 오로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산을 근간으로 부산성은 문무왕 3년(663)에 축성을 시작하여 666년에 완성된 것으로 청도 방면에서 신라 왕경을 향해 들어오는 길목을 방비할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주사산성(朱砂山城)으로도 불리며 성벽 길이는 7.5킬로미터 성안의 면적이 100여만 평이나 되는 대규모 산성이다.

 

부산성

의 바깥쪽은 경사가 심하여 적의 공격을 막기 좋은 요새지인 반면 안쪽은 평탄한 땅과 수량이 풍부한 3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남문, 창고, 샘못 등의 터가 남아있다. 어 농사짓기에 적당하여 현재도 농사를 짓고 있다. 한마디로 장기간 수비가 가능한 곳인데 비교적 입구 부근에도 부산성의 유적이 있다. 부산성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상단부까지 올라가야하는데 자동차 길이 있기는 하지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므로 일반 승용차로는 다소 어려운 길이다. 산행을 기본으로 하는 경우 약 두 시간 정도 올라가면 농사를 짓고 있는 북쪽의 부산성에 이른다. 부산성은 신라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적한 곳에 계곡물도 맑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인데 이곳에 축사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에 주민들이 똘똘 뭉쳐 결사반대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천막 등을 치고 시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부산성 지킴이 정기진 씨는 마을 사람들이 부산성 입구에 초소를 지어 놓고 교대로 문화유산인 부산성도 관리하고 외부인들의 축사 건설 등 자연 훼손을 미연에 방지한다고 한다. 부산성을 지나치지 않았다면 우측에서 빠지지 말고 보아야 할 곳이 있다. 부산성 아래에 위치하는데 멀리서 바라 본 모양이 마치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여근곡이다. 이곳은 선덕여왕의 선견지명과 관련된 설화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예견한 일이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여왕이 되기 전 공주로 있을 때 당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일이다. 두 번째가 여근곡에 대한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알아맞힌 것이다. 여근곡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선덕여왕에서 물으니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을 찾아보면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의 여근곡에 백제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또한 남쪽 고개 바위 위에 백제의 장군 우소도 활로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신하가 적군의 침입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선덕여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은 여근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위의 내용을 보면 선덕여왕이 총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예견 중에서 모란 꼿에 관한 한 현대 과학은 선덕여왕의 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적어도 선덕여왕의 모란에 관한 말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비가 향기로 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찾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마사 바이스(Martha Weiss) 박사는 란타나(Lantana Camara Linn)라는 열대 식물의 꽃 색깔은 맨 처음 노란색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렌지색을 거쳐 빨간색으로 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꿀의 양은 노란색일 때 가장 많고 빨간색일 때에는 거의 없다. 바이스는 여러 색의 꽃이 섞여 있는 숲에 남방공작나비(Precis Almana)와 큰표범나비(Fabriciana Nerippe)를 풀어 놓고 관찰했다. 맨 처음 나비들은 색을 구분하지 않고 찾아 다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나비들은 빨간색 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꿀이 풍부한 노란색 꽃만 찾아 다녔다. 꽃은 신호등처럼 색깔을 바꿈으로써 언제 신선한 꿀이 충만한지를 나비에게 알린 셈이며, 나비는 꽃의 신호를 인지하여 자신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비들의 학습능력이 한 가지 색을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이스에 따르면 나비들에게 색을 바꾸어가며 꿀을 주는 실험을 했더니, 10회 이내의 시행착오 끝에 좋아하는 색을 바꾸는 능력도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의 연구결과는 화접도의 나비는 향기가 아닌 색깔과 모양을 보고 꽃을 찾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선덕여왕은 코로 모란꽃의 비밀을 찾았지만 나비는 눈으로 꽃을 찾은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낙양은 모란꽃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그려진 모란꽃 그림들에는 나비들이 그려져 있다. 부산성, 여근곡을 맛 본 후 단석산 등정을 준비한다. 건천읍 산내면에 우뚝 솟은 단석산은 높이 827미터로 경주 주변의 산 중에서 가장 높다. 옛 신라에서는 중악이라 불렸는데,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 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난승이라는 도사로부터 체득한 신술로 큰 바위를 단칼에 자른 뒤부터 단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단석산 마을 입구 공영주차장에서 도보로 올라가려면 한 시간 정도 올라가야하지만 비포장 도로를 조심해서 몰면 중간 정도까지는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데 ‘급경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 주차한 뒤 약 10〜15분 정도 오르면 신선사 경내인데 건강을 감안하여 등산을 고집하는 경우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올라가는 것도 일환이다.

신선사가 유명한 것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겨져 석굴암의 모태로 알려진 국보 199호 마애불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암자인 신선사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마애불상은 사람 키의 여러 길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절벽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한복판에 있다. 높이 8m, 입구 폭 3m, 깊이 10m의 거대한 ‘ㄷ’자형 암벽 틈으로 들어가면 삼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북쪽 바위 2개 중 구석 바위에는 거대한 여래상을 주존으로 하였고 동쪽 바위에는 보살상, 남쪽 바위에는 보살상과 명문을 조각하여 삼존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합하여 1구의 부처상과 9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서쪽으로 트인 곳이 입구인데 북쪽 바위 중앙에 새겨진 삼존불은 왼손으로 미륵장륙상을 가르키고 있다. 맨 왼쪽의 불상은 약 60센티미터이며 오른쪽 2구는 각각 120센티미터와 90센티미터 정도다. 그 안쪽에 신라유일의 바위에 새겨진 반가사유상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반가사유상 아래쪽에는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바치는 자세의 공양자상 두 구와 스님 한 분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들 높이는 90센티미터에서 120센티미터 정도로 당대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마애불상

여기서 바위가 단절되어 쪽문처럼 트였고 다시 바위가 솟았는데 이곳에 거대한 미륵장륙상이 있다. 이 불상은 8미터 정도의 크기로 딱딱하고 서툰 솜씨로 조각되어는 있지만 중후한 체구에 둥글고 동안인 얼굴이 반긴다. ‘U'자 모양을 이루는 법의 안에 내의를 묶은 때 매듭 등이 보인다. 동쪽 바위 암벽에는 높이 6미터 정도의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지만 ‘경주상인암조상명기’ 등 400자에 가까운 명문이 음각되었는데 이 중 ‘신선사작미륵석상’이란 내용이 발견되어 이 석굴사원이 신선사임이 밝혀졌다. 남쪽 바위 면에도 역시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입상이 있는데.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이 암벽의 이름은 상인암(上人巖)이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므로 신라 불교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석굴암 건립연대만 본다면 신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과거에는 상인암 상부를 기와지붕으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선사의 용담스님은 석불의 보호를 위해 보호막을 씌워 놓아 자연스러운 맛이 사라졌지만 마애불상의 위용을 보면 툴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소를 짓는다. 우리나라에는 이외에도 잘 알려진 석굴이 두 곳이 있다. 경주 석굴암과 군위삼존석굴이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에 위치한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은 1927년 11월 군위에 살고 있던 최두한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절벽에 틀림없이 부처가 계실 것이라고 여겨 밧줄을 매고 절벽을 내려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직으로 뻗은 절벽 50미터 아래, 지상에서 6~7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는 석굴 속에서 부처 삼존을 발견했다. 석굴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는 감로병을 들고 보관에 화불이 있는 관음보살상, 우측으로는 보관에 수병(水甁)을 새긴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 셋을 합해 ‘아미타 삼존(三尊)’이라 한다. 군위 석조삼존불좌상은 경주 석굴암보다 앞서 만들어진 석굴사원으로, 이후 전개되는 신라 석불 및 석굴사원의 계보 연구에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와 내부 벽면을 약간 확장·가공한 뒤, 그 안에 삼존불을 안치하였다.

신라 불상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체구에 비하여 머리를 크게 조각하는 것인데, 이 본존불도 그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눈에 띄게 머리가 큰 반면 무릎 이하의 하체는 빈약하게 조각되었다. 얼굴에 비하여 작은 입술은 양 끝을 쏙 들어가게 하여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굴 내부까지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잘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 방식으로 착용하였으나, 자세히 보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하고, 이로 인해 노출된 오른쪽 어깨를 다른 천으로 다시 감싼 이중 착의(着衣) 방식을 하고 있다.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아주 독특하다. 즉 좌상인 경우 통상적으로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가슴까지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단전 위에 올려놓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는 데 반하여, 군위의 본존불은 왼손은 활짝 편 채로 왼쪽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은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은 오른 무릎 위에 얹어놓은 독특한 수인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오른 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모양)과 흡사하나 항마촉지인과는 다른데 한반도에서 쓰인 예는 이 석굴이 처음이다.

일반적으로 여래의 존명은 손갖춤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군위의 본존불과 같이 손갖춤이 불명확한 경우에는 판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좌우 협시보살의 존명으로 본존상의 존명을 추정할 수도 있는데,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둘 경우 본존은 아미타여래이다. 군위 석조삼존불상은 신라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크게 유행하는 아미타 신앙을 바탕으로 군위에 석굴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석불들은 석굴과 재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곳에서 제작되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석굴이 소지왕 15년(493) 극달(極達)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신라통일 후인 700년 전후에 조영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석굴암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제2석굴암이라고도 부르지만 실제로는 불국사보다 앞선다. 그러므로 석굴암 년대만 본다면 첫째가 단석산 상인암마애석불이고 둘째가 군위삼존석불이며 셋째가 경주토암산석굴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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