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평전] 천부경과 민족사상 연구에 몸바친 박동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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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평전] 천부경과 민족사상 연구에 몸바친 박동호 선생
  • 최진호
  • 승인 2014.06.0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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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및 장기기증 붐 일으킨 진정한 휴머니스트
▲ 평생을 천부경과 인술, 홍익인간 탐구에 바친 박동호 선생(1897~1991)의 생전 모습

 

숱한 애환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의 근현대사. 잔학한 일본군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민족이 대동단결한 3.1운동은 세계민주운동사의 큰 획을 긋었고, 동족상잔의 6.25는 또한번 한민족의 시련을 주었으나 이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화해와 평화의 시대로, 한민족 번영의 시대로 나가고 있다. 지난 역사의 뒷 켠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 선각자들을 오늘날 기리며 새역사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편집자주)

  민족통일과 홍익인간 실현에 한평생 보낸 한의사이자 천부경연구가 박동호 선생(1897~1991).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맞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 동족상잔의 참화속에서 큰아들이 좌익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한을 안고 살다간 실향민이다. 북에 4남2녀와 아내를 두고와 혼자가 된 선생은 40여년 남은 생을 오로지 남북통일 염원과 인간을 살리는 한의술 보급, 민족경전 천부경의 홍익인간 정신을 펴는데 바쳤으며,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 1991년 9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면 퇴계원고교 뒤 야산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민족경전 천부경과 국조 단군 제단이 세워져 있다. 인류의 역사시대를 연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단군조선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정신을 담긴 천부경은 신라때 대학자 최치원에 의해 발견되어 기록에만 남아 후세에 전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에 의해 다시 기록되어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된 천부경은 불과 81자의 글자 속에 우주원리와 하늘과 땅, 자연, 인간, 생명의 이치가 마치 암호처럼 녹아져 있다.

 

▲ 북에 두고온 아내와 시신을 기증한 뒤 조성한 두 개의 가묘와 좌익간첩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아들 창건씨의 묘

분단의 아픔 딛고 인간애 실천과 민족문화 창달

박동호 선생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한말의 거유 간재 전우 선생의 문인이 되어 26세부터 한의학과 한학을 공부하였고, 35세때 이상규선생의 ‘천부경 주해’ 책을 접하면서 민족 고유문화의 위대성을 깨달아 천부경과 단군조선 역사연구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1948년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 묘향산 석굴을 몇일 산속을 헤매던 끝에 찾아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종중일로 대전에 왔다가 북에 처와 4남2녀를 둔 채 6.25 전쟁을 맞았고 유엔군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큰 아들마저 고향사람을 도우다가 간첩으로 몰려 경찰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되는 아픔을 겪었다.

홀로 남겨진 선생은 한의사로 살면서 1975년 동서의학의 결합을 통한 민족의학 발전을 주창한 ‘동서의학요의’를 간행해 전통 인술을 펴고자 했다. 또한 천부경 연구를 통해 민족사상의 연구와 계승만이 우리 겨레가 사는 길이라는 신념을 단군사상과 수운 최제우의 동학 연구를 목적으로 한 학술단체 ‘단수일도학회’를 설립하려고 자신의 전재산(현 싯가 50억 상당)을 희사하기도 했다.

선생은 단군조선이 삼한으로 분열된 이래 오래동안 잊혀졌던 천부경의 진정한 가치를 새롭게 밝혀내고 이를 세상에 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홀몸으로 살아가며 평생을 모은 전 재산을 오로지 민족문화 연구와 홍익인간 정신의 보급에 바친 진정한 민족주의자요, 한의사로서 사망후 자신의 신체를 장기기증과 해부용 시신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제1호로 기부하는 인간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선생은 1990년 작성한 유언에 따라 실명환자 2인에게 각막을 이식하여 광명을 찾게 하였고, 해부후 골격은 유리관에 안치되어 지금도 의대 실습실에 골격표본이 되어 보존되어 있다. 사후 퇴계원에 조성된 그의 묘소는 가묘이며 그 옆에 또다른 가묘가 있다. 통일이 되면 북의 아내를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박동호 선생와 부부 묘 옆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들 창건씨의 묘, 이렇게 나란히 3기의 묘가 민족화합과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 선생이 만년에 머물던 퇴계원 야산의 집 근처에 세워진 천부경과 국조단군제단

  인류 5대 성인의 가르침도 천부경에

  선생의 위대함은 천부경의 다각도의 깊이있는 연구를 통해 지구상 모든 종교, 유불선, 5대 성인의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음을 깨닫고 종교로 인한 전쟁과 갈등의 역사를 종식하고 인류 화합과 평화를 위해 스스로 모범이 되고 실천하는 삶을 산 데에 있다.

그는 의사로서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자신은 종이 한 장, 단돈 100원이라도 아끼고 근검절약하여 오직 민족의 통일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쓰겠다는 정신으로 살아갔다. 월 3~4만원의 돈으로 한달 생활을 하며 어쩌다 책 한권을 사보려 서울로 나가는 날은 점심을 거르는 것은 보통이었고 늘 지팡이과 검정모자, 우편 배낭같은 낡은 가방을 메고 언제나 일반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천부경 연구를 통해 잊혀져가는 민족정신을 부활하고자 의도했던 학회 설립은 뜻하지않게 탐욕적인 위장 사회사업가를 만나면서 좌초되고, 종교적 편견을 가진 사법당국에 의해 되려 죄를 뒤집어쓰게 되자 그 충격과 아픔을 견디다 못해 94세의 일기로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선생의 유지를 잇기 위해 당시 학회설립을 주도하였던 박종구(66) 현 단수일도학회 이사장은 “오랜 추적과 관련자 탐문 등을 통해 23년전 유언장 및 각종 기부서류가 허위 조작됐음을 밝혀냈으며 당시 공범의 한사람이 최근 양심선언을 했다”며 주범이 형사고발되어 현재 수사중에 있어 박동호 선생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지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고자 숱한 고통을 딛고 의롭게 살다간 박동호 선생의 신원이 이번에 회복된다면 어쩌면 남북화해와 사법정의 회복의 큰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퇴계원=최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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