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의병광장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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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광장은 역사다
  • 행정신문
  • 승인 2016.03.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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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생명력 이어온 ‘민족혼’의 고장

Opinion

 

제천 의병광장은 역사다

끈질긴 생명력 이어온 ‘민족혼’의 고장

 

이근규 제천시장

 

이제 제천시 화산동‘숭의로 85번지’에‘의병광장’이 생겼다.

그동안 공약사업인 의병광장 조성사업에 대해 시민들과의 공감대를 넓히고자 1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병광장에 대한 시민의견을 수렴해 왔다. 마침내 2015년 9월 3일 시정소통시민회의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였고 이어 9월 24일에 시정조정회의를 전원일치로 통과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법적 절차를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해 10월 9일에 선포식과 제막행사를 갖게 되었다. 참으로 가슴 설레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120년 전 을미년 10월 8일 고종황제의 부인인 명성황후(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민비’라 낮춰 부름)께서 일본 자객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셨다. 백성들은 분노했고 제천에서는 을미의병이 창의되었다. 꺼져가는 민족혼을 살려낸 제천의병의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1896년의 남산전투에서 중군장(中軍將)안승우(安承禹)와 그의 종사관(從事官) 홍사구(洪思九)를 비롯한 수많은 제천의병들이 전사했다. 바로 제천시 화산동의 제천교육지원청에서 야외음악당, 실내체육관, 공설운동장 일대가 의병들이 통한의 죽음을 맞이했던 처절했던 땅이요, 의병사에 남아있는 남산성전투 전적지인 것이다.

제천에는 우리 민족의 가멸찬 삶과 장엄한 투쟁의 기록이 역사로 남아있다. 구석기시대 유적인 송학면 포전 점말동굴, 매장문화를 확인해준 청풍면 황석 고인돌 유적,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의림지에 이르기까지 제천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혼의 고장이다. 여기에 더해 구한말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선 의병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제천이다.

 

왜병에 절대 굽히지 않았던 ‘류인석 의병대’

 

이 제천의병은 1907년 8월 15일의 천남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일주일 후, 전열을 재정비해 대부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왜병들은 제천 전역을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이를 취재하던 영국 데일리매일의 멕켄지기자는 ‘항아리 하나 남지 않았다.’고 썼다. 8월 23일의 일이다.

제천의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암 류인석 의병장과 함께 태백산맥 등줄기를 타고 끝없는 전투를 해가며 연해주로 올라가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이어갔다.‘봉오동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의암 류인석 의병장 부대에 속했던 의병 출신이다.

 

‘제천이 대한민국 건국의 모태’라고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의병운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올해는 을미의병 121주년, 의암 류인석 순국101주기 그리고 광복을 맞은 지 71년이 되는 해다. 이러한 역사적인 날을 맞아 비로소 야외음악당 일대를 의병광장으로 이름 짓고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휘호는 의병출신인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종찬 회장께서 써주셨다.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하신 그분의 할아버지 6형제는 전 재산을 들고 온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이다. 특히 만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친손이 이종찬 원장이시다. 의병광장은 남산전투의 눈물겨운 분투의 현장, 청소년 홍사구 의병의 가슴 뭉클한 죽음이 가슴을 찢는 땅이다. 이곳은 훼손된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잊혀져가는 애국지사들을 되새기는 상징이 될 것이다. 의병광장은 이미 우리 가슴 속에 성큼 들어와 있다. 의병광장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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