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하고 조용한 시골의 영험한 기도도량 용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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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고 조용한 시골의 영험한 기도도량 용두사
  • 행정신문
  • 승인 2017.11.1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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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옥 주지스님

서울 청량리에서 일반 기차를 타고 3시간 거리, 경상북도 영주시에는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영험한 기도도량이 있다. 바로 조계종에 속한 용두사(龍豆寺)다. 영주시는 동쪽으로는 봉화군,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며 내륙교통의 요지로서 유적이 많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가흥동의 영주가흥리암각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해, 휴천동의 휴천리 지석 및 입석(경상북도 기념물 제24호), 순흥면의 순흥읍내리벽화고분(사적 제313호)·읍내리고분군, 안정면의 용산고분군, 고현동의 고분군 등이 있다.성지로는 구성산성(龜城山城)·고현성지·상을곡성지(上乙谷城址)·갈산성지·봉암성지(鳳巖城址)·순흥읍성지(順興邑城址)등이 있다.

사찰로는 부석사와 희방사(喜方寺)·성혈사(聖穴寺)·진월사(陳月寺)·흑석사,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용두사(龍豆寺)등이 있고 불교문화재로는 부석면 북지리의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石燈, 국보 제17호)·부석사무량수전(국보 제18호)·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부석사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부석사삼층석탑(보물 제249호)·부석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부석사당간지주(보물 제255호)·부석사고려각판(浮石寺高麗刻板, 보물 제735호)·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 )등이 있다.

그리고 이산면 석포리의 흑석사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黑石寺木造阿彌陀佛坐像幷腹藏遺物, 국보 제282호)·흑석사석조여래좌상(黑石寺石造如來坐像, 보물 제681호), 영풍두월리약사여래석불(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3호), 가흥동의 영주리석불입상(榮州里石佛立像, 보물 제60호)·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榮州可興里磨崖三尊佛像, 보물 제221호)을 들 수 있다.

또한, 순흥면의 영주석교리석불상(榮州石橋里石佛像, 보물 제116호)·영주읍내리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영주읍내리석불입상(榮州邑內里石佛立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이산면의 영주신암리마애삼존석불(榮州新巖里磨崖三尊佛像, 보물 제680호)등이 있다

이렇게 예로부터 불심이 깊은 곳이었고 많은 불교유적을 자랑하는 영주시에서 영험한 기도도량이 존재하는 것은 비단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주는 또한 청정함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기품이 있는 명소인데 용두사는 그러한 단아한 기품이 사찰 한곳 한곳마다 그윽하게 머무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주지스님은 비구니인 수옥스님인데 봉화군 출생으로 영주시에서 보살과 처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용두사를 운영하고 있다. 창건스님은 월명당 법신 스님으로 향년 100세를 사시고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수옥스님은 큰 스님의 뜻을 이어받아 용두사를 속세의 때에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수옥스님은 “큰스님의 진신사리와 480과가 넘는 사리를 보존하면서 사찰이 오랫동안 보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속세에서 벗어나 불도만을 생각하며 도량에서 계승되는 청정한 정신의 큰 지주가 되고 있었다.

용두사

영엄한 기도도량 용두사

용두사는 바로 옆에 한눈에도 눈에 띄이는 큰 바위가 상징하듯 다른 일반적인 사찰과는 뭔가 다른 특색이 있다. 바로 영험한 신통력이 함께 하는데 용두사에서 기도를 드리고 불공을 드리면 안되던 일도 잘되고 어렵던 일도 풀리게 된다. 그러다보니 고시공부하는 학생들도 가끔씩 찾아오기도 한다. 바위 위에 올라가보니 주변 경치가 한눈에 펼처젔다.

용두사는 비록 넓은 사찰은 아니지만 아담한 기도도량이 돋보이는 곳이다. 중앙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거기서 개구리들이 뛰어놀고 있으며 산에서 내려오는 멧돼지들을 막기 위해 백구 한 마리도 키우고 있다. 맑은 하늘에 산야 깊은곳까지 꼬불꼬불한 길을 타고 올라오면 용두사가 보인다. 그곳에서 용두사에 올랐던 이들이 쌓아올렸던 신심이 힘들어진 몸을 부비며 더위를 씻으려 하려는 애씀이 느껴젔다. 중앙엔 대웅전이 있는데 배 부른 기둥이 불법을 떠받치고 있었다. 대웅전 법당 입구의 고무신 한 켤레가 예불 올리는 스님 마음을 닮아 부처님 향해 가지런하다. 스님의 따뜻하고도 결연한 마음이 함께 느껴지는 건 왜일까.

대웅전 옆에는 석탑도 하나 가지런히 놓여있다. 대웅전 문턱에 올라 장엄하게 펼처지는 장수면 마을을 보면서 마음을 뒀다. 끝없이 이어지는 밭들과 마을에 산마루와 산마루가 잿빛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감상에 젖었다. 언제 오려나. 푸르른 나무들과 농사철에 바쁜 밭이 보이는 산기슭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수확의 계절 소식은 아련하기만 하다. 그네들 달래듯 앞에서 빗질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저물고 있었다.

수옥스님의 출가 계기

수옥스님은 원래 20대 초반까지는 헤어디자이너를 꿈꾸며 미용일을 배우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 1년만에 리비아에 갔던 남편이 사망하는 등 속세의 혼란스러움에 고통스러워서 하면서 괴로워하던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있었던 불교로의 출가를 결심했다. 허나 남은 딸 하나가 걱정이었다.천륜을 어길 순 없는지라 고뇌했지만 29살에 출가해 딸은 할머니집에 맡기고 청량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때 계사스님(처음 출가를 도와주고 가르치는 스님)께서 “너는 머리를 깎지 않으면 40을 못넘긴다” 라는 말을 하셨고 몸도 아프고 정신적 상처도 있고 그런 일들이 복잡하게 엮여 운명의 실처럼 결국 불문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수옥이란 법명도 계사스님께서 지어준 것이다. 봄에 한철, 여름에 한철, 기도를 계속 드리고 밤낮없이 불교를 공부했다. 그래서 승가대학에서 공부를 끝마치고 마산에서 포교원을 잠시 운영하다가 봉화군으로 옮겨와 15년을 지냈다. 그러다 영주로 옮겨온게 6년전이다.

대저 비구니 스님 가운데 팔자가 좋은 스님이 별로 없듯이 수옥 스님도 팔자가 참으로 기구하였던 스님인데 하나 있는 딸은 지체 장애 3급이었다. 어렸을 때 아이가 우는데 그냥 밥달라고 기저귀 갈아갈라고 우는 줄 알았다가 병원에 데려가 보니 신체적 장애가 있다는걸 발견한 것이다. 불도를 닦으면서 딸을 데리고 살 수 도 없었던지라 할머니집에 모든걸 맡기고 영주에 있는 딸과 가끔식 만난다는 그는 “그래도 딸이 지체장애가 있지만 말은 똑똑하게 하고 영주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시청에서 일하다 지금 잠시 휴직하고 있다.”고 했다. 수옥 스님은 어렸을때부터 절에 다녔는데 어느 절에 가서 염불을 하고 절을 하던 적이 있었는데 염불하던 비구니 스님들과 파마를 하고 화장을 한 보살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교가 됐다며 “나는 저렇게 까지 속가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결심도 한적이 있다고 했다.

기도 드리는 주지스님

용두사에 오게된 계기

용두사는 그 이름 답게 바로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것이 용두암이라는 바위인데 영험한 신통력이 있다고 동네 부근에선 소문이 다 나있다. 그래서 특별한 철이 되면 많은 신도들이 바위를 보면서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힘든 일이 빨리 나아지도록 비는데 수옥 스님도 여기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6년전에 봉화에서 나와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창건주 월명당 법신 스님은 너무 노쇠해서 병원에 가 계시고 절이 비어있고 어떤 떠돌아 다니는 노장스님이 간신히 몸을 의탁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절을 인수해서 용두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도를 닦고 건물을 하나둘 세워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수옥스님은 팔방미인이 되고 싶다라는 심정으로 가야금도 배웠는데 산조 가야금을 배우고 벗금을 하면서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노력하고 있다. 3년간 실력을 갈고 닦아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스님으로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해 여주 교도소에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점점 더 욕망은 없어지고 희미해지고 초연해진다.

수옥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어떤 욕망에서 초연해진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함”이 었듯이 수옥스님도 열반적정(涅槃寂靜)(애욕의 불길을 완전히 끄면(열반) 영원히 고요한(변함없는) 진리의 자리가 드러난다(적정))의 반열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월명당 법신 큰스님의 탑을 해드리고 싶다는 작은 소망만 말한 그는 법신 스님의 사리를 모시면서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더 높은 열반의 세계에 이르고자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수옥스님은 사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사리는 불교만의 특출난 것이라며 그냥 화장을 했다고 나오는게 아니고 정신적 수행과 높은 덕과 도를 닦아야지만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수옥스님은 성철스님 이후로 부도탑들은 그냥 뼛가루만 담아놓거나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 많다고 했다. 큰스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무조건 사리가 나오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우리나라 불자들이 많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수옥 스님은 월명당 법신 스님이 여인의 몸으로 큰 일을 이룬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오래된 노스님들만이 받을 수 있는 당호를 받은것도 그러한 큰 스님을 기리기 위해서 였다. 수옥스님은 삼화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지금도 불교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스님은 수행은 어떠한 시점에 중단하는게 아니고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며 공부와 수행의 중요성을 둘 다 강조했다. 스님은 책도 보지 않고 염불만 끊임없이 외울정도로 공력이 높은데 염불 하나만 제대로 외워도 무례하게 굴던 사람들도 고개를 숙이며 스님을 존경했다는 일화도 알려줬다.

용두사를 지켜내며 일평생을 보내고 싶어

수옥스님은 별다른 욕망이 없다. 그저 용두사를 지켜내며 일평생을 보내고 싶다. 한가지 낙이 있다면 가야금을 치는 것이다. 사회봉사활동과 함께 가야금을 치며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서 사는게 그의 꿈이다. 찾아오는 불자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네들의 고충과 힘든점을 따듯이 보살펴 주는것도 스님이 하는 일이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다시 감상에 젖는다. 항상 초조해가며 사는 기자들의 신발에 젖어있는 흙을 짐처럼 딸려 보냈다. 마음바닥에 달라붙은 중생심이 질척거렸다. 이따금 짖어대는 백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야금에서 나오는 애절한 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면 용두사에서 느끼는 편안한 마음을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 선선해진 날씨속에 수확철은 언제나 오려나, 기품있는 가야금은 산기슭에 깃든 생명들을 일깨우고자 애절한 산조를 울렸건만. 취재 중인 객 마음속은 슬프기보다는 편안해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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